지난 11월 9일, 공전을 거듭하던 21대 국회에서 노조법 2‧3조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본회의에서 가결된 법률안은 정부에 이송된 날로부터 15일 이내 대통령이 공포하도록 하는 절차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개정노조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일찌감치 시사한 바 있습니다.
정부‧여당뿐만 아니라 경영계와 보수언론까지 한목소리로 개정노조법이 시행된다면 "노사관계가 파탄날 것"이고 "불법파업이 횡행할 것"이라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이처럼 보수세력은 일제히 개정노조법의 의미를 왜곡‧폄하하는 데 혈안입니다. 모든 노동자의 온전한 노동3권 쟁취를 위해 이제 겨우 한걸음 내딛었을 뿐입니다. 간접고용‧특수고용 노동자들이 개정노조법의 즉시 공포가 왜 필요한지 당사자의 목소리로 전합니다.
이정식 장관님 오랜만입니다.
지난 11월 9일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노동조합법 2조‧3조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 기뻤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이정식 장관님이 "비통한 심정을 억누르기 어렵"다며 긴급 브리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작년 여름 장관님을 만났던 그 날이 떠올랐습니다.
2022년 7월 20일,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가 조선업 불황기에 삭감된 임금 30%의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파업을 한 지 49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출근길에 연일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을 언급하며 경찰병력 투입과 강제진압의 뜻을 밝혀 모든 언론이 하청노동자 파업을 주목하고 긴장감이 고조되던 때였습니다.
장관님은 직접 대우조선해양에 찾아왔고 우리는 낮에 잠시 장관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자정이 다 된 한밤에 장관님이 다시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낮에 너무 짧게 이야기를 나눠서 부족한 이야기를 좀 더 들으려고 하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장관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장관님은 우리를 만나 이른바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장관님은 버릇처럼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 내용은 지금 파업을 끝내면 하청노동자 저임금, 다단계하청 등 우리가 이야기하는 조선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겠지만, 오늘 밤을 넘기면 이제 상황은 장관님의 손을 떠나 어쩔 수 없게 된다는 협박 아닌 협박이었습니다.
지금 고백하지만, 그때 장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실소(失笑)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 국가의 장관이 하청노동자에게 최후통첩이나 하려고 한밤중에 특별히 만나자고 한 건가 황당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협박 아닌 협박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상황은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틀 뒤 파업이 노사합의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장관님은 그날 밤 최후통첩이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라면 위험천만한 선박 구조물에 경찰특공대를 동원한 강제진압을 지시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50일 넘게 파업해 온 조합원들과 충돌이 발생하면 커다란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파업을 끝냈다는 건 사실이라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이정식 장관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생각이 다르다고, 파업이 끝난 뒤 장관님과 정부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고용노동부도 합의 과정의 일익을 담당해 구성하기로 했던 '노사정 협의체'는 원청 대우조선해양의 거부로 아주 손쉽게 무산되었지만, 고용노동부는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대신 장관님은 원하청 노동조합은 쏙 뺀 채 원하청 사용자만 모아서 이른바 '상생협약'을 추진하고 발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하청노동자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오히려 최저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 고용을 대폭 확대하고, 다단계하청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이름만 바꾼 다단계하청인 '프로젝트 협력사'를 권장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청노동자의 목소리는 배제하고 만든 정책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 뒤로부터 지금까지 언론사에서 끊이지 않고 연락이 옵니다. "고용노동부에서 상생협약을 통해 조선소의 문제점을 여럿 개선했다고 계속 자료를 내는데, 우리가 봐도 좀 의심스러워서 진짜 조선소 현장이 바뀌고 있는지 궁금하다"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고장 난 라디오가 된 것처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청노동자 저임금 구조는 전혀 개선되지 않아서 지금도 20~30년 일한 숙련노동자가 하나둘 조선소를 떠나고 있고, 고용구조는 오히려 악화되어서 상용직 하청노동자는 줄어들고 다단계하청인 물량팀, 아웃소싱 노동자는 늘어나고 있다"라고요.
이정식 장관님.
작년부터의 악연(?)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 하고 다시 처음으로, 노동조합법 2조‧3조 개정 문제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지난 7월 18일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에서 여러 헌법학자를 모셔서 국회 토론회를 열었는데 저도 토론자로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헌법학자들은 노동조합법 2조‧3조 개정안은 헌법 제33조에 규정한 노동삼권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는 내용이므로 헌법에 합치하는 반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그 적법성과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헌법 제33조에 반하는 행위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장관님은 노동조합법 2조‧3조 개정에 반대하는 긴급 브리핑에서 법 개정이 "노동조합법의 목적과 정신에 명백히 위배"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노동조합법은 헌법이 규정한 노동삼권을 구체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위법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노동조합법 제1조 (목적)도 장관님이 내심 강조하고 싶어 하는 '노동쟁의의 예방, 해결', '산업평화 유지', '국민경제의 발전'보다 '헌법에 의한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보장'을 가장 앞머리에 두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장관님은 노동조합법 2조‧3조 개정이 노동조합법의 목적과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헌법 제33조의 목적과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장관님도 노동조합법 2조‧3조 개정이 헌법의 목적과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실 수는 차마 없었을 겁니다.
또한 장관님은 노동조합법 2조‧3조가 개정되면 "폭력적인 파업이 공공연해질 우려"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며 혹시 작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을 떠올리거나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요? 그런데 '팩트체크'를 하자면 작년 우리의 파업은 0.3평 철장에 스스로 몸을 가두고 용접을 한 '극단적' 투쟁일 수는 있어도 '폭력적인 파업'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폭력은 하청노동자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사무직과 관리직 수백 명을 동원해 농성천막을 칼로 찢고, 천막 안에 있던 노동자에게 소화기를 분사하고, 농성물품을 부수고 어디론가 싣고 간 원청 대우조선해양에 의해 저질러졌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점은, 이 같은 어쩌면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은 노동조합법이 개정되어서가 아니라 현행 노동조합법이 노동조건의 거의 모든 지배력을 가진 원청과 하청노조와의 단체교섭을 보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법이 보장하는 단체교섭권을 비정규직 노동자는 껍데기만 보장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작년에 원청 대우조선해양이 하청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조직된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더라면, 파업을 했을지언정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디 조선소 하청노동자뿐이겠습니까. 노동조합법 2조‧3조 개정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실제 사용자인 원창과 단체교섭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지 않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극단적인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정식 장관님.
장관님의 긴급 브리핑 내용 하나하나 따져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짧은 글에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작년 7월 어느 날처럼 한밤의 갑작스러운 최후통첩을 위한 만남이 아니라, 공개된 자리에서 모든 언론이 보는 앞에서 일대일 토론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노동조합법 2조‧3조 개정이 정말 헌법에 합치하는 것인지 아니면 헌법에 반하는 것인지, 노동조합법 2조‧3조를 개정하면 정말 노동 현장이 폭력파업으로 아수라장이 될 것인지 아닌지 등을 충분한 시간을 토론하고 그 판단은 토론을 보는 시민들에게 맡겨두면 어떻겠습니까.
이정식 장관님은 장관이 되시기 전에 오랜 기간 한국노총의 정책담당자로 활동하며 사무처장까지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과 말이 오고 가며 부딪히는 일대일 토론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정식 장관님, 부디 1년 4개월 만에 일대일 토론 자리에서 다시 만나 뵙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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