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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오는 시절에 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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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오는 시절에 시라니?

[시인 6411] 니들의 시간

<작은책과>과 노회찬재단이 기획한 '시인의 시선으로 6411 투명인간을 바라보다'는 노동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시인들이 <한겨레>에 연재 중인 '6411의 목소리' 한 편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다. 9월부터 11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세 차례 진행된다. <프레시안>에서는 이를 세 차례에 걸쳐 올릴 예정이다. 편집자

절로 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오는 시절에 시라니? 과연 시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사실 이런 의구심도 있었다. 김해자 시인을 초대한 첫 번째 대화는 9월 25일 저녁 고영직 문학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됐다.

고영직 : 올해 나온 <노회찬 평전>에서 생전에 그분이 이 사회의 공기를 바꿔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 사회 공기가 몹시 안 좋습니다. 시대의 불안, 우울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일상과 노동에서 무엇이 좋은 삶이고 좋은 사회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럴 때 더욱 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詩)는 말씀 언(言)과 절 사(寺). 언어의 사원? 말이 힘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는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모신 김해자 시인은 드물게 시와 삶이 일치하는 분입니다.

김해자 : 한창 고구마를 캘 철인데 계속 비가 와서 캐다 말고 왔어요. 비 올 때 캐면 흙이 묻어서 팔 수도 없고 누굴 주지도 못해요. 내려가면 고구마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노동문제를 이야기하는 자리지만, 농사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원치 않으면 문을 닫고 있어도 되고…. 1982년인가? 운동권 선배들이 무섭잖아요. 일주일씩 합숙하면서 공부하는데 딱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에 가겠다고 선언하고 가리봉동 오거리에 있는 협진양행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컨베이어벨트에서 쫓기듯이 일하면 뒤에서 '쪽가위'를 휘두르며 재촉하고 앞에 목표치 적어 놓고 독촉하고. 그런 것만 아니면 머리 많이 안 쓰고 몸으로 일하고, 오전에 일하고 땡볕에 줄 서서 식판에 받아먹는 밥이 그렇게 꿀맛일 수 없어요. 한참 일하다 보면 뒤에서 꽈배기도 오고 '커피믹스' 같은 게 넘어와요. 물에 타 먹을 수는 없으니까 가루를 조금 손바닥에 털어 먹고 또 앞으로 넘기고…. 나눔이나 보살핌, 공동체 같은 말들을 모르던 때였지만 함께 있던 사람들의 표정. 그걸 행복이라고 말하면 좀 뭐 하지만 나를 들어 올리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어쩌면 재수 없게 살았을지도 모를 사람을, 몸으로 이렇게 살 수 있게 해 준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광장과 나의 내밀한 정신세계, 상처, 밀실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어요. 목소리 큰 어떤 주장, 그런 건 재미가 없었어요. 내 몸 안, 내장에서 꽁무니로 나오는 어떤 실 같은 것, 비원, 간절함. 광장과 내장이 하나의 길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그게 제 인생, 제 시의 화두이기도 해요. 자칫 너무 울화가 나서 제가 쓰는 언어들이 너무 가파를 수 있는데, 광장의 언어, 무식하지만 단순한 언어가 필요한 시대가 있었고, 지금도 그런 시대지만 내장과 연결된 광장의 언어가 있어야 아픈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고 함께 젖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8월 21일자 <한겨레> '6411의 목소리'에 실린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영훈 씨의 '기후위기 뒤에 노동자의 위기가 있다'를 골라 와 함께 읽었다. 2018년 석탄 이송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일하던 그 현장이다. 충격적인 죽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잠시 높아졌다. 그러나 기후위기와 탄소중립 때문에 2025년부터 석탄화력발전소들이 순차적으로 문을 닫으면 한여름에도 4, 50도에 육박하는 열기와 분진, 화학물질을 감내하며 생계를 이어 온 노동자들과 그들에 의지해 온 지역의 자영업자들은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된다. 김영훈 씨의 글은 미래세대에게 깨끗한 환경을 물려주는 과정에 어떤 이해당사자도 억울한 희생을 치르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을 소망하지만 이런 노동이나마 언제까지 이어 갈 수 있을지 걱정한다는 말로 맺고 있다.

김해자 : 농사지으면서 2018년부터는 기후변화를 실감해요. 멈춰야 되는 시점이 이미 많이 늦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더 뺏길 것도 없는 노동자의 것을 빼앗아 기후위기에 대응하겠다는 것은 또 말이 안 돼요.

고영직 : <녹색평론> 발행하던 고 김종철 선생 표현처럼 노예의 노동을 하기 때문에 문제죠. 젊었을 때 노동 현장 경험도 말씀하셨는데, 좋은 노동은 어떤 걸까요?

김해자 : 서울에 오면 택배 차량,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배달 오토바이가 제일 눈에 들어와요. 무슨 '사' 자 자격증 안 받았다고 이렇게 평생 쫓기면서 살아야 하나. 저도 몇 년 전 수술 후유증으로 약간 불안증을 갖게 됐어요. 그걸 드러내니까 30~40대 친구들도 너무 많이 불안과 우울, 수면장애 등으로 힘들어하는 걸 알게 됐어요. 특별히 예민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개 불안한 노동을 이어 가는 실정인데…. 좋은 노동은 없어요. 우리 사회 정치의 공기가 이렇게 타락한 것처럼 거의 많은 노동은 고용과 합체가 되어 버리고. 파트타임 따로, 정규직, 비정규직 따로, 원청, 하청 이렇게 신자유주의가 인간들을 쪼개 놓은 사회에서는 교사나 의사조차도 자기를 실현하는 바람직한 노동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국의 백수들이여 단결하라! 각자.'

고영직 : 백수가 '하얀 손'이 아니라 '백 개의 손'이죠. 농촌에서 일손(일꾼)을 '놉'이라고 하잖아요. 김해자 시인 산문집에 양순이네 할머니 집에서 고추도 따고 그런 일들이 재미있게 묘사돼 있습니다. 천안 광덕에서 10년 이상 농사를 짓고 계신데, 산문집에 묘사된 그런 노동이야말로 좋은 노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해자 : 곧 수도권에 70퍼센트 이상 몰려 살게 되면 농촌 소멸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새 직업들이 생겨나고 농촌 기본소득도 시작될 거예요. 한여름에 땀 흘려 일하다 보니 밥맛도 좋고 양심의 가책이 덜어지는 것 같아요. 지구라는 별에서 사람을 육체적으로 만나고 어떤 물건을 창조하고 만들어 내고 옮기고 이런 육체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생각해요. 노동자로서 어떤 정의를 위해, 내 생존권을 위해 열심히 싸워라. 내 자식을 위해, 미래를 위해. 그런 김에 시를 낭송하겠어요.

▲ 김해자 시인을 초대한 첫 번째 대화는 9월 25일 저녁 고영직 문학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됐다. ⓒ노회찬재단

니들의 시간

연해주에서는 우리에게 조금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삵이 마을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밤 창문을 닫으려다 흠칫 놀랐어요

누군가 여태껏 훔쳐보기라도 한 듯

뻣뻣한 털들이 돋아난 유리창은 거대한 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찔릴 것 같았지요

수상쩍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이상스러운 생물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죠

봄이 오긴 온 건가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안전해지긴 할까요

이끼 낀 계단이 노려보았어요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

모서리가 너무 많아요

2

비늘구름 속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어요. 인형 속의 인형 탄두 속의 탄두 아이 손에서 터지는 탄두 속 작은 집속탄, 밀밭은 보고 있었죠 무너진 담벼락과 흩어진 살점들, 폭격에 쓰러진 나무가 가리키고 있었죠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떨어진 토치카-U 로켓에 쓰인 흰 글씨 "어린이를 위해서"

겨우네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친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

남 몰래 사그라진 화장장의 연기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살아도 죽어도 제로가 되는 수치

한낮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군요. 소금을 바가지로 뿌려대다

영구 엄니는 옥수수 밭에 서 있는 발 없는 귀신들에게 넙죽 절했다죠

한 잔 받으시오 고수레,

술 가득 부어 고수레

삭삭 빌었다죠 손가락 넣고 휘휘 저어

석 잔 대접하고야 놓여났다죠

발 붙들고 놓지 않는 산 그림자

3

합체는 멸족당한 자들의 모음

정수리인 오늘의

뒤를 가리키면 어제를 말하고

앞을 가리키며 내 일을 말하던 인디오들처럼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

내가 니를 어떻게 했는데, 없이

니를 부르면 니가 나와 섞일까요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없이

나의 반대말들로만 이루어진 니들,

니는 대체 왜 그래, 없이

한 잔 받으시오 죽은 사람에게 고수레

한 잔 받으시오 산 사람에게 고수레

한 잔 받으시오 앞으로 살 사람에게 고수레

4

뜨고 나서야 눈 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우리는 한꿰미로 사이좋게 도망가는 사이

불안과 사랑을 두 쪽 내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이

철창 속 달궈진 철판 위에서 번갈아 발을 떼는 개처럼(니들은 사람이 아니야)

니가 할딱거리는 동안 뜨거운 철상자 속에 갇힌 하청에게

맞불을 놓는 원청처럼(니들도 사람이 아니야)

니가 깎여 나가는 동안 허리가 묶인 물고기들처럼

아무리 헤엄쳐가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우리는 우리가 아니야)

밤이 내려와도 뜬 눈으로 누워 있는

니들이 실종되는 사이 빠른 속도로 감염되는

멜랑콜리를 나눠 마시며

우리는 점차 말이 없어지는 사이

니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산이

공들여 x자를 붙였어도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창에 비치던 너와 나의 얼굴이 우리는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앞으로 올 니들을

니들의 시간을

고영직 : 이 시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떨어진 폭탄에 쓰인 '어린이를 위해서'라는 말. 아들 부시가 '친환경 폭탄을 발명했다'고 했던 말. 권력을 잡은 자들이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통치행위를 하는지 정곡을 찔러 까발려 놓은 표현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더욱 시를 읽고 언어에 민감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참석자 중에 정부 산하 기관에서 일하는 분도 계신데 참 힘들 거예요. 위로의 말을 좀 해 주세요.

김해자 : 화병에는 그냥 욕을 시원하게 하는 게 약이더라고요. 대우조선 비정규직 노동자가 1제곱미터 철 상자 안에서 그렇게 여러 날 농성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잖아요. 이태원 참사 뒤 화병이 나서 서울 오면 거기 가서 걸었어요. 진짜 아픈 사람들 앞에서는 무슨 말을 못 하잖아요. 걷는 것처럼 그냥 행동하는 수밖에 없어요. 별자리를 보니까 올겨울에 우리가 좀 싸워야 할 것 같아요. 바위뛰기펭귄처럼, "어머니는 얼마나 위대한가 넘어져도 으깨지지 않는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 퉁퉁한 배를 주셨으니" 이런 마음으로 바위에서 떨어져도 다시 또 떨어져도 다시 올라가고. 지구가 절멸로 가는 것 같고 가망이 없는 것 같지만… 지치면 친구들과 한잔하고, 욕을 바가지로 하고 다시 용기를 내서 니들의 시간, 우리가 먹어 버린 게걸스럽게 먹어서 탐욕이 물들어 버린 그 언어를 후세들은 적어도 (저쪽으로) 덜 끌려가는….

고영직 : 노회찬재단같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곳에 만 원씩 기부를 한다든지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거죠. 올해 나온 미국 사회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Cannibal Capitalism(식인 자본주의)》. '니들이 먹어 버린 시간'이라는 대목은 여기 닿아 있어요.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훌륭한 시인은 예시적 상상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니들의 시간>이 굉장히 급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시를 쓰셨지만 이 시가 대표 시가 될 것 같아요.

참석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유현아 시인은 시골을 동경하지만 여성의 몸으로 농촌에 가서 사는 일이 두렵다고 했다. 아이와 함께 온 돌봄 전문가 이은주 씨는 그동안 어머니와 아이를 돌보느라 너무 가족만 생각했는데 이번 강연에 자극받고 시야를 좀 더 넓혔고 아이를 노회찬재단에 기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겠다고 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참석자는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의 글에 동의하기 어렵다며,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이 아니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져서 노동자들이 억울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김해자 : 시골에 와서 사는 건 너무 많은 수고와 결단이 필요하긴 해요. 내 농사가 효율적인 건 아닌데 여기서 버티고 사는 것만으로도 이 시대에 대한 저항이라고 여겨요. 너무들 싸워요. 고소 고발이 난무하고. 사회의 공기가 변하면 저 골골의 짐승들에까지 영향을 끼쳐요. 그냥 시골에 가지 말고 외곽에서 작은 텃밭만 일구고 살아요. 김밥집 앞을 지날 때 그분들이 김밥을 싸면서 목례를 하고 계신 것 같아 저도 고개 숙이고 지나가요. 친교를 통해 동네에서 작은 희망을 보는 것이지요.

고영직 : 냉소주의의 특징은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갇혀서 스스로 먼저 이렇게 좌절하고 벽을 느끼는 이런 마음의 태도….

김해자 : 멀리서까지 오셔서 웃어 주고 눈을 맞춰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김해자 : 시인.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축제》, 《무화과는 없다》,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해피랜드》, 민중 구술집 《당신을 사랑합니다》,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평 에세이 《시의 눈, 벌레의 눈》 등을 펴냈다.

* 고영직 : 문학평론가. 1992년 <한길문학> 등단. 저서로 《천상병 평론》, 《희망의 예술》, 《행복한 인문학》, 《경성에서 서울까지》 등이 있다

*| 월간 작은책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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