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에 영국 공군은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나치독일의 비밀국가경찰인) 게슈타포 본부를 폭격했다. 그건 완전히 정당한 목표물이었다.
하지만 영국 조종사는 실수로 게슈타포 본부 대신에 근처에 있었던 어린이 병원을 타격했고 이로 인해 84명의 어린이들이 타 죽었다. 그것은 전쟁범죄가 아니다. 당신들은 영국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합법적인 전쟁 행위가 수반한 비극적인 결과였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10월 28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민간인들의 살상 행위가 전쟁 범죄에 해당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80년 전의 일을 호출해 반박에 나선 것이다. 10월 30일자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일부 정치인들은 이런 말도 했다.
"미국과 그 연합국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을 격퇴하기 위해 가공할 만한 폭격을 핵심 전략으로 삼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러한 발언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간명하다. 이스라엘의 정부 입장은 자신들의 행위가 전쟁 범죄가 아니고 그래서 중단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부탁하듯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해달라는 미국과 영국 정부 등을 향해서는 '당신들이 과거에 한 일을 생각해보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나는 특정 국가나 정치지도자를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네타냐후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전시 내각의 행동과 발언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뿌리부터 흔들린다. 가지지구를 '생지옥'으로 만들어놓고선 이에 대한 일말의 성찰이나 개선의 여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소환한 2차 세계대전은 '전략 폭격'의 시대였다. 이 전쟁에선 전투원과 민간인을 구분해야 한다는 '전쟁의 규범'이 무너졌고 전후방과 전투원/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폭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총력전의 시대에, 장거리 공격이 가능한 전투기와 미사일이 등장한 시대에 승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최대한 파괴하고 살상해서 전쟁 의지 자체를 꺾어버려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인도주의 정신을 압도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선 대량학살도 서슴지 않았던 야만의 시대는 곧 인류 이성의 반격에 직면했다. 국제사회가 1949년 제네바 협약과 그 이후 추가의정서를 통해 교전국의 민간인 보호책임과 이를 위반하는 전쟁 범죄를 단죄하는 국제법을 만든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제네바 협약 및 헤이그 협약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전시 국제법은 전쟁 중에 발생한 부상자와 환자, 그리고 전쟁 포로 보호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자는 민간인들이었다. 민간인 사망자가 약 5000만 명에 달해 군인 사망자의 2배를 넘어선 것이다.
1949년에 정립된 제네바 협약은 이에 대한 철저한 성찰의 산물이었다. 전투가 불가능한 환자와 부상자, 그리고 포로뿐만 아니라 민간인 보호 책임도 법제화·구체화한 것이다. 또 이러한 책임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뿐만 아니라 내전과 국가-비국가 세력 사이의 전쟁에도 적용되고, 점령 지역에 있는 민간인도 보호 대상에 포함시켰다.
또 이 협약의 "중대한 위반"을 다루는 엄격한 규칙을 포함하고 있는데, 중대한 위반을 범한 자에 대해서는 국적을 불문하고 추적·재판·인도해 그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네타냐후 정권이 2차 세계대전을 거론하면서 가자지구의 민간인 살상이 전쟁 범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역시 1951년에 제네바 협약을 비준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아마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과 매일같이 자행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보다 인류의 미래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두 전쟁을 대하는 서방 진영의 태도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기에 그러하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연합(EU)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가혹한 제재를 부과하고 우크라의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전쟁 범죄자로 묘사해왔다. 또 푸틴을 응징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푸틴이 나올 수 있다며, 그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런데 네타냐후가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 범죄는 푸틴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아무런 제지 없이 범죄를 일삼고 있다. 병원도 난민촌도 가리지 않고 폭격을 가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미국은 이미 비례의 원칙을 한참 벗어난 이스라엘의 자위권 행사를 두둔하면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해달라고 부탁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재는 고사하고 이스라엘에 외교적 보호막을 쳐주고는 막대한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만행과 미국의 위선은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지구촌의 분노를 키우고 있다. 이는 그 누구에게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전쟁 범죄와 국가테러를 일삼고 있는 이스라엘 정권을 멈춰 세우기 위해서는 강력하고도 실효적인 대책이 요구된다.
이스라엘 정부가 즉각적인 휴전에 응하지 않으면 군사 원조를 중단하고 경제제재를 부과하며 전쟁 범죄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겠다는 유엔 안보리 차원의 결의가 필요하다. 그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