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행어가 된 "산업클러스터"
지난 20여 년 동안 '산업클러스터', '혁신클러스터' 같이 인기 있는 정책도 드물었다. 산업클러스터란 연관산업-기관들의 집적체(때로는 지역)를 의미하는데 이 개념의 이론적 원조는 마이클 포터(M.Porter)라는 미국 경영학자다.
그는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산업들이 몇몇 소수지역에 마치 포도송이와 같이 집적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첨단산업의 집적지에서 학습과 혁신이 발생한다"는 그의 연구는 이후 많은 국가에서 받아들여 정책화되었다.
일본의 '산업클러스터'(2001년) '지식클러스터'(2002년), 프랑스의 경쟁거점(2002년), 캐나다의 '혁신슈퍼클러스터'(2018년) 등에 이르기까지 잊을만하면 새로운 버전의 클러스터정책들이 나온다. 우리나라 또한 산업클러스터정책이 지역균형발전 논리와 결합하여 깊게 자리 잡았으며, 역시 잊을만하면 유사한 정책사업들이 출현해왔다.
그럼에도 성공으로 인정되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 물론 클러스터정책의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과 잣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고, 측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성공과 실패라는 양단의 판단은 곤란할 것이다.
다만 최근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혁신클러스터 관련 보고서와 영미권의 정책동향을 보면 산업클러스터정책이 지역적 성격을 완화하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캐나다가 2018년에 시작한 혁신슈퍼클러스터정책을 보면, 산업클러스터별로 주된 근거 지역을 명시한다. 예를 들어 첨단제조클러스터는 온타리오, 디지털기술클러스터는 브리티시콜럼비아, 인공지능클러스터는 퀘벡 등에 근거를 둔다.
그럼에도 클러스터의 운영과 협력네트워크는 전국차원에서 조직된다. 지방정부와는 독립된 비영리기관이 별도로 설립되어 있으며 연방정부 지원 예산으로 운영된다. 클러스터별 참여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중앙정부 지원 자금의 지역분포를 알 수 있다.
첨단제조클러스터(Advanced Manufacturing)는 전체 프로젝트 165개중 57%인 95개가 온타리오주에서 추진되나. 온타리오지역 외 다른 지역의 참여도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브리티시콜롬비아주가 19개, 퀘벡주가 17개, 노바스코샤주와 알버타주에서 각각12개가 추진되고 있다. 캐나다 단백질산업클러스터(Protein Cluster)는 단일 지역이 아닌 중부 프레리지역(사스캐치원, 알버타 등)으로 느슨하게 지정되었으며 예산의 30% 이상을 점유하는 주 지역은 없다.
영국의 캐터펄트(Catapult)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전국 9개의 클러스터에 참여기관이 거의 전국에 걸쳐 분포해 있음이 확인된다(그림 참조). 세계 대부분의 첨단산업클러스터는 지리적 집적지라는 물리적 실체를 지닐 수 있으나 네트워크는 예외 없이 글로벌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첨단산업클러스터가 지니는 로컬 네트워크는 강한 지역적 응집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글로벌 파이프라인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2. 로컬연계에 묶인 한국의 지역산업클러스터
한국의 산업클러스터 정책은 지역 내 혁신주체 간 협력을 강조하며, 반(半)폐쇄적으로 운영된다. 지역의 주력산업이 정해지면 지역 소재 대학 및 연구기관 위주로 컨소시엄이 구성되고 역내 기업을 대상으로 지원프로그램이 운용된다. 지역 혁신 주체를 집적화하기 위해 테크노파크를 조성하고, 공공연구기관 지역센터 등이 설립된다.
외견상 산업클러스터에서 강조되는 '학습과 혁신의 지역화'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비교적 최근에 도입된 국가혁신클러스터사업의 경우에도 주관기관, 공동주관기관, 참여기관 등이 14개 시도별로 특정 구역 내에 한정된다. 동 사업은 1단계(2018-2020), 2단계(2021-2022년)까지 총 6418억 원의 공공자금이 투입되었으며, 올해부터는 고도화 단계 사업을 진행한다.
지난해 12월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지역혁신클러스터 활성화 방안'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보면 정부는 고도화 단계의 정책 방향으로 첫째, 지역의 주도성 강화 둘째, 클러스터 내 협력연계 심화, 셋째, 클러스터 간 경쟁 촉진 등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로컬네트워크는 혁신적 성격을 가지기 어렵다. 첨단산업일수록 협력 파트너를 일정 지역 범위 내에서 확보하기 어렵다. 더욱이 혁신도시, 기업도시처럼 최근 조성된 지역일수록 산업혁신 생태계가 척박할 가능성이 높다.
첨단산업생태계 형성의 초기 단계의 경우 입주기업(기관)으로 하여금 글로벌 또는 국가적 차원의 자원을 활용하는 네트워크 형성을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 혁신도시의 산업발전을 위해 자기지역 인근의 기업/기관과 협력하라는 것은 넌센스이자 유사 혁신네트워크를 양산할 뿐이다.
현행 지역 기반의 산업클러스터 정책은 로컬 차원의 초기 역량 구축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개방형 혁신을 저해하고 산업생태계의 질적 양적 성장을 막아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선진국이 도입한 혁신클러스터 정책들은 대체로 장소기반 혁신체제 구축을 도모하나 참여기관은 처음부터 전국적이어서 입지지역과 관계없이 해당 프로그램 참여가 가능하도록 설계된다.
3. 산업클러스터정책의 과제 : 탈지역화(de-localization)
첫째, 기존 산업클러스터 정책의 경우 광역지자체 규모를 넘어서는 협력체계와 네트워크의 확대가 요구된다. 사업의 총괄기관은 해당 지역 내 기관이 수행하더라도 세부과제 수행기관은 외부 지역의 참여를 보장함으로써 해당 클러스터의 미비점이 보완될 수 있다. 클러스터 참여기관의 지역적 범위와 네트워크 규모가 확대될수록 자체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전국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 방식의 거버넌스 도입이 필요하다. 현재의 정책 기조는 중앙의 권한과 책임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것으로써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지방정부의 역할과 권한이 강화될수록 산업혁신생태계의 네트워크 외연을 확대하기 어렵다. 지방정부는 지역의 한정된 자원이 외부로 유출되는 환경에 거부감을 가진다. 아무리 개방형 혁신과 글로벌 네트워크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하더라도 '지역 주도'의 산업클러스터 정책만으로는 경쟁력 확보가 곤란하다.
셋째, 국가 차원의 글로벌 경쟁력을 지향하는 새로운 프로그램 도입 검토가 필요하다. 기존의 산업클러스터 정책은 각각 별도의 목표와 존재 이유가 있으므로 기존 정책의 개선과 구조조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캐나다, 영국의 경우에도 다양한 지역산업클러스터 프로그램이 있음에도 Catapult(영국), Global Innovation Cluster(캐나다) 등 새로운 프로그램과 조직을 운영한다. 새로운 프로그램과 조직의 장점은 우선 기존 지원제도의 관성으로 벗어나 혁신적인 사업환경을 구축하기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우선 현 정부가 추진하는 '전략산업특화단지' 관련 사업에 국가적 관점의 혁신클러스터 프로그램 마련을 기대한다.
산업과 혁신이 공간과 상호작용하는 스케일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단순히 '지역주도성 확대'라는 그럴듯한 말로 산업클러스터의 공간 스케일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필자소개
문미성 박사는 서울대학교에서 경제지리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경기연구원에 재직하고 있다. 주된 관심분야는 산업클러스터, 혁신생태계 관련 정책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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