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성격상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투원이 아닌 비무장 민간인들을 한꺼번에 수십만 명을 희생시키는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은 인도적 차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다. 흔히 핵무기라 알려진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은 독가스, 세균무기보다 더 살상력이 높기에 '우리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대량살상무기'로 일컬어진다.
1945년 8월6일 아침 8시15분 우라늄 핵폭탄인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 상공 580m 지점에서 폭발했다. TNT(트리니트로톨로엔) 2만 톤이 폭발한 것과 같은 위력이었다. 먼저 폭심지 800m 안에 거대한 불덩이가 생겨났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증발해 버리거나 작게 눌어붙은 둥근 덩어리로 바뀌어 길거리에 뒹굴다 멈추었다. 파괴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보여주는 끔찍한 보기 하나. 은행 앞 대리석 돌계단에 앉아 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사람이 증발해버리고 그가 앉았던 흔적만이 돌계단에 남았다(사진 참조).
조선인 4만 포함한 시민 21만 희생
폭발에 뒤이은 폭풍으로 화재가 일어났고 히로시마 시내 7만 6천 호 가운데 7만호가 불타잿더미가 됐다. 그리고 방사능이 섞인 검은 비가 내렸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그 비를 마셨고, 방사능에 오염돼 죽었다. 히로시마 원폭으로 인구 35만 가운데 (일제의 강제동원 등으로 히로시마에 머물던) 조선인 2만 명을 포함한 시민 11만 명과 군인 2만 명이 피폭 당일 또는 바로 얼마 뒤에 죽었고, 1945년 말까지 모두 합쳐 14만 명이 사망했다(広島市·長崎市 原爆災害誌編集委員会, <広島·長崎の原爆災害> 岩波書店, 1979, 274쪽).
위 원폭재해편집위원회는 조선인이 히로시마에서 2만 명이 죽었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그 뒤 후유증으로 죽은 조선인 숫자를 더하면 희생자 규모는 더 늘어난다. 히로시마 원폭 사흘 뒤인 1945년 8월9일 11시2분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졌다. 플루토늄 핵폭탄인 '팻 맨'이었다. 3만5천에서 4만 명이 곧바로 죽었고, 원폭의 후유증으로 죽은 시민을 합치면 희생자는 7만에 이른다. 원폭 투하 뒤 사망자가 늘어난 것은 후폭풍과 부상 합병증 탓이다.
그때 나가사키에 머물던 우리 조선인들도 많이 희생됐다. 자료마다 편차가 있지만,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으로 1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으로 적어도 4만 명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또는 생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가운데 미군의 잇단 주요도시 폭격으로, 특히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머물다가 운명의 그날 원폭을 맞고 숨진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지금 돌이켜 봐도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진주만과 미군포로 학대의 보복
히로시마 원폭 투하 바로 뒤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했다.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이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을 벌인 행위에 대한 보복'이라 했다. 이어 그는 '더 강력한 폭탄'이 만들어질 것이라며 일본에 다음과 같은 경고를 날렸다.
[1945년 7월26일 (포츠담회담에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냈던 것은 일본 사람들을 완전한 파괴로부터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는 곧바로 이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무조건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볼 수 없었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파괴의 비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하세가와 쓰요시, <종전의 설계자들> 메디치, 2019, 366쪽).
히로시마 원폭 사흘 뒤인 1945년 8월9일 11시2분 나가사키에 두 번 째 원폭이 떨어졌다. 그 때 나온 트루먼의 라디오 성명을 보자.
[우리는 폭탄을 개발했고 그것을 사용했다. 진주만에서 경고 없이 우리를 공격한 자들에 대해, 미국인 포로를 굶겨죽이고 때리고 처형했던 자들에 대해, 또한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지키려는 시늉조차 포기해버린 자들에 대해 이 폭탄을 사용했다](하세가와 쓰요시, 415쪽).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뒤 미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의 공통점은 진주만공습과 미군 포로들을 학대하고 죽였던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응징이라는 점을 밝혔다는 점이다. 일본이 죄를 저질렀으니 보복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무렵 미국 시민들이 일본을 얼마나 미워했는지는 갤럽 여론조사로도 드러난다. 나가사키 원폭이 떨어진 다음날인 1945년 8월10일부터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진 8월15일까지 갤럽은 '일본의 도시에 대해 새로운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결과는 '사용하자'는 의견이 85%, '사용하지 말자'는 쪽이 10%, 나머지 5%는 '모르겠다'였다(아라이신이치, <폭격의 역사> 어문학사, 2015, 177쪽).
"일본인들은 잔인하고 미개한 짐승"
미국 안의 여론이 원폭 사용에 다수가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다른 목소리들도 있었다. 민간인과 전투원을 가리지 않는 대량살상 행위를 비판하는 항의성 편지나 단체의 성명서 같은 문서들이 백악관으로 보내졌다. 트루먼은 원폭 투하에 찬성하는 사람에게나 반대하는 사람에게 답신을 보낼 경우, 일본이 '잔인하고 미개한'(cruel and uncivilized) 국가라고 못 박고 일본인들을 '짐승'(beast)에 견주는 내용을 담았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던 8월 9일, 트루먼은 개신교 목사인 사무엘 맥크레아 케이버트로부터 항의 전보를 받았다. '원자폭탄 때문에 더 이상의 파괴가 일본 국민들에게 닥치기 전에' 폭격을 중단해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틀 뒤 트루먼은 케이버트 목사에 보낸 답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들(일본인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언어는 우리가 그들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해온 언어입니다. 당신이 짐승을 상대해야 할 때 당신은 그를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대해야 합니다(When you have to deal with a beast, you have to treat him as a beast)"(출처: https://www.nps.gov/articles/trumanatomicbomb.htm).
만에 하나 8월9일 소련의 참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의 히로히토가 8.15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일본인들에 대한 트루먼의 증오심에 비춰볼 때, 일본의 또 다른 대도시에 제3, 제4의 원폭을 떨어뜨려 더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미국은 다음 원폭 투하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를 논의하고 있던 상황에서 8.15를 맞이했다.
"내 손에 피를 묻혔다"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미국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팀을 이끌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손에 넣었다고 확신한 것은 1945년 7월16일 5시30분.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뜻하는 '트리니티'라고 이름 붙여진 플루토늄 핵폭탄의 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뉴멕시코주 사막의 어슴푸레한 이른 아침에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강렬한 빛이 갑자기 하늘과 땅을 밝히더니, 날카로운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멀리서 숨죽여 지켜보던 한 개발자는 '마치 누군가 태양의 스위치를 켠 것만 같았다'는 소감을 남겼다. 원자탄이 지구상의 대기를 다 태워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던 이도 있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기자들에게 '거룩한 자의 노래'라는 뜻을 지닌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고 했다. '나는 죽음이 된다. 세상을 흔드는 자가 된다'는 구절 그대로 오펜하이머는 그가 만들어낸 핵무기로 수십만의 죽음을 낳았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칭송도 받았다. 그러나 곧 그의 삶에 위기가 다가온다.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인 오펜하이머는 사려가 깊은 인물이었다. 트리니티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의 기쁨도, 그 원자폭탄으로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낸 기쁨도 한때였다. 얼마 가지 않아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2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것을 두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번민에 빠져 줄담배를 피웠다. 그러면서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다가 악명 높았던 매카시즘 선풍에 휩쓸려 일터를 잃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오펜하이머의 삶을 다룬 영화가 올여름에 개봉된 '오펜하이머'(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2023)다. 이미 영화를 보신 독자분들도 많겠지만, 영화 속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면서 "내 손에 피가 묻은 것 같습니다(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라고 말했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트루먼에게 그런 말을 했다. 트루먼의 반응은 퉁명스러웠다. "걱정 마세요. 폭탄을 만드는 것은 물리학자의 소임일 뿐이고, 폭탄 투하 명령은 대통령인 내가 내렸으니까요"
그 무렵 트루먼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기쁨과 더불어 민간인의 대량살상을 낳은 원폭 투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감을 털어내지 못해 심기가 불편했다. 그런 터에 순진한 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손에 피가 묻었다'는 말을 하니, 기분이 언짢아졌을 것이다. 대통령 면담 뒤 돌아서는 오펜하이머의 등 뒤에다 영화 속 트루먼 대통령은 이렇게 소리친다. "피는 내가 더 묻었어. 저렇게 징징거리는 놈은 (내 앞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실제로 트루먼이 오펜하이머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진 않았다고 한다).
트루먼의 자기기만, "여자와 아이들은 빼고..."
트루먼도 정치인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일본과의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원폭 투하를 밀어붙였지만, 민간인 대량살상을 명령한 데 대해 죄책감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트루먼은 자신의 결정으로 많은 비무장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긴다는 기록을 곳곳에 남겼다. 이를테면, 1953년 1월 대통령 퇴임 직전에 토머스 머레이 원자력에너지위원장이 '당신의 원폭 투하 결정은 정당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을 때, 트루먼은 이렇게 답신을 보냈다.
"원폭 사용은 독가스나 세균전쟁보다도 훨씬 악질적입니다. 왜냐하면 원폭은 일반 시민들을 대량으로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표현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보다 더 원폭 사용을 놓고 고민을 했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Barton Berstein, <Truman and the A-Bomb, and his Defending the Decision> Journal of Military History, 62, no 4, 1998).
'나보다 더 고민한 사람은 없을 것'이란 트루먼의 말은 자기기만이자 위선적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다. 7월16일 트리니티 핵실험 성공 뒤 8월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하기까지 트루먼은 (다음 주 글에서 살펴볼 여러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원폭 투하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민했다'는 말은 트루먼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자기위안이자 변명이라는 지적이 따른다.
트루먼의 위선을 드러내는 또 다른 자료는 그가 남긴 <포츠담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45년 7월16일 독일 포츠담에 가 있다가 원폭 실험 성공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받고 이렇게 썼다.
[(핵무기의 공격) 목표는 여자와 아이들이 아니라 군사시설, 육해군 병사들이라고 지시했다. 일본인들이 아무리 야만인이고 잔혹하며 광신적일지라도, 만민의 행복에 봉사하는 세계의 지도자가 이 무서운 무기를 옛수도(교토)나 지금의 수도(도쿄)에 떨어뜨릴 수 없다](Dennis Merrill, <Documentary History of the Truman Presidency> University Publication of America, 1995, 155-156쪽).
실제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는 일본의 옛수도나 지금의 수도가 아닌 것을 맞다. 하지만 그 두 도시에도 '여자나 아이들'이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게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민의 행복에 봉사하는 세계의 지도자'가 일본의 수도가 아닌 다른 도시들의 여자와 아이들을 죽일 권리가 있을까 싶다. 그는 원폭투하로 20만 비무장 민간인들이 죽은 데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다. 용서를 빈 적은 더더욱 없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차이
원폭 투하를 둘러싼 개인적 부담을 떠나, 트루먼은 공식적으론 원폭투하를 결정한 최고위급 책임자다. 그는 원폭 투하 결정을 놓고 '그게 저 혼자 결정한 게 아니고요' 투로 책임을 회피하려든 적은 없다. 만에 하나 미국이 일본에게 패했다면 트루먼이 전범재판 피고석에 서야할 운명이었다.
그는 1945년 일본에서 그 자신에게 닥친 상황과 "같은 상황이 눈앞에 놓인다면, 똑같은 선택(원폭 사용)을 하겠다"고도 말했다. 이 말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수사'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트루먼은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란 사실을 매우 부담스럽게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부담이 6.25 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는 쪽으로 결심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반도에 원폭을 투하하지 않겠다는 트루먼의 입장은 1951년 4월 연합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해임과도 관련된다. 1951년 초 중국군의 개입으로 미군이 밀릴 때 맥아더 사령관은 청천강 일대에 핵폭탄을 떨어트려 핵 오염지대로 만들어 중공군의 진격을 막고, 압록강 넘어 중국 영토에 대한 공습을 고집하면서 트루먼과 갈등을 빚었다).
'인류 문화에 대한 새로운 죄악'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다음날(8월10일) 일본은 중립국인 스위스 정부를 통해 원폭투하에 항의하는 문건을 보냈다. 일본 정부는 자국 국민들에게도 미국의 원폭 투하가 '새로운 비인도적인 전쟁범죄 행위'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려고 8월11일자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등 일간지에도 항의문을 싣도록 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국 정부의 원폭 사용은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무기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헤이그회의(1899년과 1907년)의 육전 법규에 위배된다. 미국이 이번에 사용한 폭탄은 그 성능의 무차별성, 그리고 잔학성에서 사용이 금지된 독가스 및 기타 무기들을 훨씬 능가한다. 종래의 어떤 무기에 비교할 수도 없는 무차별한 잔학성을 지닌 이런 폭탄을 사용하는 것은 인류 문화에 대한 새로운 죄악이다. 미국 정부를 규탄함과 동시에 즉시 이런 비인도적 무기의 사용을 포기할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이치바 준코, <한국의 히로시마>, 역사비평사, 2003, 44-45쪽).
위 문장을 하나씩 뜯어보면 틀린 말은 없어 보인다. 미국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량살상무기로 무차별 학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피고 쪽 변호인들은 '원폭 사용은 전쟁범죄'라고 목소릴 높였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의 A급 전범 모두가 무죄라고 주장하며 소수의견을 냈던 인도 출신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도 그의 소수의견서에서 '원폭투하야 말로 국제법을 어긴 전쟁범죄'라고 주장했다. 팔 판사는 그런 주장으로 일본 우익의 추앙을 받고 야스쿠니 신사에 추모비까지 세워지는 영예(?)를 누렸다(본 연재 35 참조).
핵폭탄 투하는 민간인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은 무차별 살상이라는 점에서 전쟁범죄라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미국의 전쟁범죄를 탓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는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하면서 독가스를 마구 뿌렸고, 731부대를 운용하면서 세균전을 펼쳤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충칭(重慶)을 비롯한 중국 주요도시들에 대한 무차별 공습도 일본군의 전쟁범죄 목록에 들어간다. 미국의 원폭 사용은 비판받아야 할지라도, 일본이 미국을 향해 전쟁범죄를 탓할 자격은 없어 보인다.
일본도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에 원폭을 개발하려고 애썼다. 한반도에서까지 우라늄을 찾아 나섰지만, 이런저런 역량부족으로 초보 단계에서 머물던 상황에서 8.15 패전을 맞았다는 사실이 훗날 드러났다. 원폭 개발에 실패한 것은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이들 파시즘 국가들이 원폭을 먼저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전쟁의 판도가 뒤바뀌고, 도쿄와 뉘른베르크가 아닌 워싱턴과 런던에서 전범재판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법정 피고석에 선 영국과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에겐 드레스덴 공습(1945년 2월)이나 도쿄 공습(1945년 3월)의 책임을 묻게 됐을 것이다.
USSBS 보고서, "원폭 투하 없어도 항복했을 것"
1945년 봄 일본은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일본 선박은 3분의 2가 침몰했고, 일본 내 공장들은 석탄과 원자재 부족으로 가동을 멈추었거나 공습으로 파괴됐다. 식량 수입이 끊겨 1인당 식량 배급은 하루 1,200칼로리 수준으로 떨어졌다(A.J.P 테일러,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페이퍼로드, 2020, 412쪽 참조).
미국이 원자폭탄을 꼭 사용했어야 했을까. 이 물음과 관련해 참고가 되는 자료 하나가 있다. 지난 글에서 1944년 11월 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에게 독일과 일본을 겨냥한 공습의 성과와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는 점을 살펴봤다(본 연재 40참조). 그에 따라 구성된 미국전략폭격조사단(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USSBS)은 여러 관련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 가운데 1945년 9월 30일에 작성된 보고서는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사실에 대한 상세한 조사와 관련된 생존 일본 지도자들의 증언에 근거하여 볼 때, 1945년 12월 31일 이전에는 확실히, 그리고 1945년 11월 1일 이전에는 아마도 항복했을 것으로 본다. 이는 곧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러시아가 참전하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침략(일본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이 계획되거나 고려되지 않더라도 일본이 항복했을 것이라는 것이 본 조사팀이 내린 결론이다](USSBS 관련 원문: 바로가기 클릭)
르메이, "공습 표적 삼을 곳 바닥날 거다"
당시 일본은 미군의 잇단 공습에 제대로 대응다운 대응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945년 3월10일의 도쿄 대공습에서 B-29 폭격기 편대가 낮은 고도로 비행하면서 네이팜탄을 마구 퍼부었지만, 일본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다. 미 윌리엄 레이히 제독은 그가 남긴 회고록 <I Was There>(1950)에서, '1944년 9월 무렵 일본은 바다와 공중의 완전한 봉쇄로 말미암아 실질적으로 거의 패배한 상태였다'고 적었다(다이애나 프레스턴,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 뿌리와이파리, 2006, 539쪽).
커티스 르메이 소장(미 육군 제21폭격단 사령관)은 도쿄 대공습을 지휘해 민간인 살상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장본인이다(본 연재 40). 르메이도 레이히와 같은 판단이었다. 그는 1945년 6월 상관인 헨리 아놀드 대장(미 육군 제20항공군 사령관)에게, "9월이나 10월에 이르면 공군조종사들이 표적으로 삼을 만한 산업시설들이 모두 바닥나고 말 것"이라 보고했다(다이애나 프레스턴, 539쪽).
아시아·태평양전쟁이 1945년 8월15일로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호전적이고 잔혹한' 성격을 지닌 르메이 장군이 손을 놓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부하들에게 일본의 바닥난 산업시설 대신 (지난 글에 살펴본 도쿄 대공습처럼) 다른 중소도시들의 민간인 주거지역을 계속 공습해대라고 명령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제 글을 매듭지으려 한다. 위 미군 장성들의 판단처럼, 일본은 더 이상의 민간인 희생을 줄이려면 빨리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 군부의 강경파들은 '1억 옥쇄(玉碎)'를 부르짖으며 결사항전의 허망한 주장을 펴다가 핵무기 공격으로 숱한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이들의 죽음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1차적 책임은 (지난주에 살펴봤듯이) '일격 강화론'을 고집하며 미적거렸던 히로히토와 강경론을 폈던 일본 전시지도부에게 돌아가지만, 원폭 투하를 결정한 투르만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전쟁지도부의 책임도 크다.
그렇다면 조금 더 기다리면 일본이 항복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미국은 왜 굳이 원자폭탄을 두 방이나 거푸 떨어뜨렸을까. 민간인 대량살상이라는 끔찍한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말이다. 다음 주엔 미국이 원폭 두 방을 서둘러 투하했던 나름의 이유들과 문제점을 짚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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