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구호 물품 전달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아랍권의 분노는 키워 확전 우려를 잠재우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18일(현지시각) 이스라엘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8시간에 걸친 회담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귀국길에 기자들에게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과 통화해 가자에 라파 검문소를 통해 20대의 인도적 지원 물자를 실은 트럭을 보내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라파 검문소는 가자와 이집트를 잇는 통로로 이스라엘의 폭격 뒤 폐쇄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도로 보수가 끝난 뒤 오는 20일 이후엔 트럭이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바이든 대통령은 다만 구호 물자를 "하마스가 탈취하거나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면 (물품 전달은) 끝날 것"이라고 못박았다. 현재 150대 가량의 구호 트럭이 라파 검문소에 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두 번째 전달에 대해선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유엔(UN) 기구 및 국제 비정부기구(NGO)를 통한 1억달러(약 1357억원) 규모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도적 지원안도 발표했다.
네타냐후 총리실은 이스라엘이 "가자 남부 민간인을 위한 식량, 물, 약품에 한해 이집트를 통한 인도적 지원을 막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인질이 송환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은 가자에 인도적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텔아비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스라엘에 국방에 대한 "전례 없는 규모의 추가 지원 패키지"를 약속했다. 그는 이를 이번 주 내 미 의회에 요청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로이터> 통신은 이 문제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이 고려하고 있는 이스라엘 추가 지원 규모가 100억달러(13조5700억원) 가량이라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19일 저녁 이스라엘과 하마스 분쟁 및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연설할 예정이다. 통신은 600억달러(81조4200억원) 규모의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이 고려되고 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덧붙였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2001년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인이 이스라엘의 "충격, 상처, 분노"에 공감한다면서도 이 사건 뒤 미국이 "정의를 추구했고 정의를 실현했지만 실수 또한 저질렀다"며 "분노에 사로 잡히지 말기를 경고한다"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 "실수"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시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번 사태에서 이스라엘이 가자 민간인 인명 손실을 초래하는 과잉 대응으로 나아가선 안 된다는 의미를 전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가자 알아흘리 아랍 병원 폭발 사건 뒤 요르단에서 이집트, 요르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의 정상회담이 불발되며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이스라엘 방문에 대한 기대가 대폭 축소된 만큼, 구호 물자 통로를 열기로 합의해 가자 주민들의 숨통을 튼 것은 미약하나마 실질적인 성과로 평가되지만, 아랍권의 분노를 잠재워 확전 위기를 줄이려던 당초 외교적 목표 달성은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이스라엘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네타냐후 총리와 포옹했는데 이 장면이 미국이 이스라엘 편에 치우쳐 섰다는 상징으로 읽히며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권의 감정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영국 BBC 방송은 분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분노에 사로 잡히지 말라"며 가자 민간인 피해 확산을 에둘러 경고했지만 명시적인 자제 촉구 메시지를 내진 않았다. 가자에 구호 트럭 진입을 합의했지만 당장 환자가 넘치는 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연료 공급까지 이끌어내진 못했다. 이스라엘은 지난주부터 가자를 전면 봉쇄해 식량과 연료 공급까지 차단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전날 가자 병원 폭발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 쪽 입장을 지지한 것도 아랍 주민들을 다독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병원 폭발은 "현재까지 확인된 정보에 따르면 가자의 한 테러 조직이 잘못 발사한 로켓으로 인한 결과로 보인다"며 이스라엘의 책임을 부인했다. 앞서 이스라엘군도 레이더 정보, 가자 무장 단체 간의 교신 첩보 등을 들어 알아흘리 병원 폭발은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중 하나인 이슬라믹 지하드가 인근 묘지에서 로켓을 오발사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전날 가자시티 중심부 알아흘리 병원이 폭격 당해 가자 보건부에 따르면 적어도 471명이 숨졌다. BBC를 보면 폭발은 병원 안뜰에서 일어나 이스라엘 폭격을 피해 이곳에 피난해 있던 1000명 가량의 가자 주민들이 주로 피해를 입었다. 병원 내부에도 600명 가량이 있었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고 이스라엘이 지난 7일 가자를 통제하는 무장 정파 하마스의 습격 뒤 가자에 무차별 폭격을 가해 가자 보건부 집계에 따르면 3400명 이상이 숨진 상황에서, 인근 아랍국 정부들은 일제히 이스라엘을 공격 주체로 지목하며 규탄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병원 폭격 주체로 서로를 지목하며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후 역내 주민들이 병원 폭발이 이스라엘 소행이 아니라는 주장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국방부와 정보 기관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그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하마스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무언가를 발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주민과 하마스를 동일시해선 안 된다고 여러 번 강조하며 이 지역에서 하마스를 고립시키려던 바이든 대통령의 당초 구상과는 달리 병원 폭발 뒤 아랍 전역의 분노로 오히려 이스라엘의 고립이 심화되는 모양새다.
이란부터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반이스라엘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18일 <뉴욕타임스>는 2020년부터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에 나선 바레인과 모로코에서 시위대가 이스라엘과 단교할 것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바레인에서 시위대가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쳤고 바이든 대통령 얼굴 이미지에 "전범" 딱지를 붙였다고 덧붙였다.
미국 중재로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해 온 사우디아라비아도 전날 병원 폭발에 대해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튀니지, 이집트, 오만, 레바논 등에서도 반이스라엘 시위가 열렸고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는 이스라엘 영사관 앞에 8만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집결했다.
아랍권 "병원 폭발, 규모만 다른 이스라엘 탄압 연장"…하마스 "헤즈볼라, 가자 지상 공격 땐 참전 가능"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탄압해 온 역사 탓에 아랍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병원 폭발은 규모가 클 뿐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탄압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수사관들이 폭발의 원인에 대해 어떤 최종 결론을 내리든 많은 아랍인들에게 가자에 폭격을 가해 11일 전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이 이스라엘에서 죽인 민간인보다 훨씬 더 많은 민간인을 죽인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명백한 진실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이라고 지적했다.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은 18일 병원 폭발에 관한 이스라엘군 기자회견에서 언론이 발표의 신뢰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이스라엘군은 지난해 5월 요르단강 서안에서 알자지라 기자 시린 아부 아클레가 취재 중 피격 사망했을 때 처음엔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의 소행이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다 4달 뒤 이스라엘군 총격 가능성을 인정했고 사망 1년 뒤인 지난 5월에야 처음으로 사과했다.
역내 반이스라엘 정서 확산으로 확전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18일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은 전날 하마스 정치국장 아흐메드 압둘 하디가 매체에 하마스가 레바논 무장 세력 헤즈볼라와 긴밀히 협조 중이며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준비 중"이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헤즈볼라의 참전 여부는 특히 이스라엘의 가자 지상 진입 시도와 관련이 있다"며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이 선을 넘으면 전면 공격에 나설 것을 분명히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다만 1400명 이상의 이스라엘 사망자를 낳고 199명 이상의 인질을 납치한 하마스의 지난 7일 이스라엘 남부 공격은 헤즈볼라에 사전 통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