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문화예술계에 블랙리스트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문화예술계에는 검열 등 '표현의 자유' 탄압 논란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런 와중에 최근 국민의힘 김승수 국회의원(대구 북구을)은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작가들만 겨냥해 정부 지원금 내역을 뒤져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김 의원은 한국만화진흥원에 <2023 굿바이전 in 서울>(이하 굿바이전) 참여 작가들의 정부 지원금 내역 자료를 요구했다. <굿바이전>은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를 풍자한 것으로 논란이 된 전시다.
김 의원은 진흥원 측에 <굿바이전> 참여 작가들이 그동안 정부 지원금을 얼마나 받았는지 상세히 물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로 활동 중인 김 의원의 '표적 자료 요구'다. 해당 기관 임직원도 아닌 '민간인'인 작가들을 특정해 자료를 요구했다. 단순한 '확인' 차원으로 보기엔 부적절하다. (관련기사 ☞ 국민의힘, '윤석열 풍자' 작가들만 콕 집어 지원금 내역 뒤졌다)
작가들은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의 '블랙리스트' 악몽을 떠올렸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정권에 비판적인 성향을 보인 작가 혹은 집단의 작품 활동 및 사회 활동을 조사해 이를 목록화한 문건을 제작했다. 두 정권은 문화예술인들을 사찰·감시·검열해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인들을 여러 정부 지원사업에서 배제하고, 작품 활동을 사전에 검열했다.
이번 김승수 의원실의 자료 요구도 '특정 작가'를 대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과거 사건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블랙리스트 피해 법률 대응을 맡아온 강신하 변호사는 "특정 전시에 참여한 특정 작가를 콕 집어 자료를 요구한 건 블랙리스트 색채가 굉장히 짙다"고 지적했다.
다만 예술인들이 블랙리스트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는 건 비단 이 사건 하나 때문만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문화예술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블랙리스트 부활'에 대한 불안을 부추기고 있다. 특히 만화계가 그 불안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데는 지난 1년간 이어져온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셜록>은 윤 정부 출범 이후 1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블랙리스트 부활의 맥락'을 시간 순으로 정리했다.
[2022. 9. ~ 10.] 부천국제만화축제 '윤석열차' 전시 논란
지난해 9월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열린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전시된 '윤석열차'는 그해 7 ~ 8월 한국만화진흥원이 주최한 전국학생만화공모전 카툰 부문 금상을 거머쥔 작품이다. 작품 속 달리는 열차 정면에는 윤 대통령 얼굴이 그려졌다. 열차 첫 칸에는 김건희 여사, 나머지 칸에는 검사복을 입은 남성 4명이 칼을 들고 열차에 타고 있다.
당시 '윤석열차' 작품이 논란이 되자, 문화체육관광부는 "주최 측인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유감을 표하며 엄중히 경고한다"고 밝혔다.
[2023. 1.] 국회사무처, 윤석열 대통령 풍자 전시 '강제 철거'
<굿바이전>은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10·29 이태원 참사 등을 풍자한 작품 80여 점으로 기획됐다. 서울민족예술단체총연합 등이 주최하고 더불어민주당과 무소속 의원 12명이 공동 주관한 전시로, 국회사무처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해당 전시는 지난 1월 9일부터 닷새간 국회 의원회관 2층 로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회사무처는 "특정 개인 또는 단체를 비방하는 등 타인의 권리, 공중도덕, 사회윤리를 침해할 수 있는 회의 또는 행사로 판단되는 경우"라고 판단해 돌연 허가 결정을 번복했다.
전시를 주관한 의원들이 취소 공문을 받아들이지 않자 국회사무처는 전시 당일 새벽 국회 의원회관 2층 로비에 설치된 작품들을 기습 철거했다.
[2023. 4.] 국회사무처, 전시 작품 '사전 검열' 조항 신설
국회사무처는 이후 국회 의원회관 2층 로비 사용규정을 강화했다. 사무처가 신설한 조항에는 '전시회 개최를 위해 로비 사용 신청을 할 때 국회 시설물 예약시스템에 전시할 작품의 사진을 2달 전에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기존에는 행사명과 행사 목적, 주최·주관 등의 간단한 정보만 입력하면 자유롭게 로비를 사용할 수 있었다.
국회 사무처는 전시회 허가를 위한 미술 및 법률전문가 위주의 별도 자문위원회(9명)를 구성하는 조항도 만들었다. 이제 국회 사무총장이 전시회를 위한 로비 사용신청 허가의 객관성·공정성 등을 확보하기 위해 자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자문위를 구성할 수 있다.
[2023. 7.] 문체부·경기도교육청, '윤석열차' 나온 공모전 후원 불허
'윤석열차' 논란이 있고 1년 뒤, 전국학생만화공모전이 다시 열렸다. 올해는 문체부와 경기도교육청이 공모전 후원 명칭 사용을 불허했다.
한국만화진흥원이 개최하는 이 공모전에 문체부와 경기도교육청은 후원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상 수여자 역할을 해왔다. 대상 수여자는 문체부 장관, 금상 수여자는 경기도교육청이었다. 올해 문체부와 경기도교육청은 나란히 공모전 후원단체 명단에서 빠졌다. 그러면서 대상 수여자는 경기도지사, 금상 수여자는 부천시장으로 변경됐다.
[2023. 7.] 윤석열 대통령,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을 특보로 임명
이명박 정부 당시 블랙리스트 사업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는 유인촌 전 장관이 돌아왔다. 이명박 정권 시절 3년 동안 문체부 장관을 지낸 그를, 윤석열 대통령이 문화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2023. 9.] 윤석열 대통령,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지명
유인촌 특보는 문화특보 발령 두 달 만에 새 문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유인촌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다음 달 5일 열린다.
유 후보자는 지난달 2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속칭 좌파 예술인들도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정부 예산을 요구해선 안 된다,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나"라고 밝혔다.
한편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작가회의 등 문화예술인 단체들은 지난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유인촌 장관 지명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지난 블랙리스트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얻었나, 오히려 그 시대 이전으로 퇴보하려는 현실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지난 20일부터는 유인촌 장관 후보자의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릴레이 1인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2023. 9.] 문체부, 내년 한국만화진흥원 국고보조금 48% 삭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내년 국고보조금 예산이 절반 가까이 삭감됐다. 내년 문체부의 만화 관련 국고보조금 예산은 60억 3000만 원이다. 올해 예산 116억 4000만 원과 비교해 48% 감액됐다. 진흥원의 17개 예산 항목 중 7개 항목은 전액 삭감됐다.
모두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최근 1년간 만화계가 겪은 일이다. '윤석열차'를 향한 문체부의 "엄중 경고"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예산 삭감으로 돌아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이명박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건 당시 문체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런 '맥락' 속에서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 김승수 의원은 <굿바이전> 참여 작가들의 정부 지원금 내역을 들췄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블랙리스트에 두 차례 이름을 올린 김신 작가는 김승수 의원실의 이런 행동이 문화예술계를 '위축'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과거) 블랙리스트를 경험했음에도 다시 노골적으로 그런 모습들이 보인다.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건 작가들이 위축된다는 거다. 정부와 다른 생각을 하는 작가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그런 현상들을 보면서 (다른 작가들도) 자기검열을 하게 되지 않느냐. 그런 사회는 결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김신 작가
<굿바이전>에 참여한 백영욱 작가는 "내가 정부 예산으로 떳떳하지 못한 활동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안하다, 내 이름을 알아다가 나한테 어떤 불이익을 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다, 나를 괴롭히려고 하지는 않을까"라며 불안감을 내비쳤다.
윤석열 정권 1년. 대통령 풍자 만화를 중심으로 논란이 된 사건들 외에도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검열은 일어났다. 문화예술계 전반에 뻗친 '블랙리스트 부활'의 그림자는 더 이상 단순한 우려가 아닐지도 모른다.
※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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