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블랙리스트 신호탄을 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김승수 의원이 나서서 사과해야 할 겁니다." -박재동 작가
특정 예술가들을 겨냥해 정부 지원금 수령 자료를 요청한 여당 국회의원. 감사의 '표적'이 된 작가들의 분노는 쉬이 사그라들지 않을 듯하다. 그들은 국회의원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국민의힘 김승수 국회의원(대구 북구을)이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풍자한 전시에 참여한 예술인만 콕 집어서 정부 지원금 수령 내역을 뒤졌다는 내용을 지난 21일 보도했다.(관련기사 ☞ 국민의힘, '윤석열 풍자' 작가들만 콕 집어 지원금 내역 뒤졌다)
최근 김승수 의원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2023 굿바이전 in 서울>(이하 굿바이전)에 참여한 고경일, 박재동, 백영욱, 이정헌 등 예술인 33명의 지원금 수령 내역 자료를 요청했다.
<굿바이전>은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10·29 이태원 참사 등을 주제로 한 정치 풍자 작품이 주를 이룬 전시로, 본래 국회의원회관에서 지난 1월 9일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일 새벽 국회사무처에 의해 철거돼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인 바 있다.
김승수 의원은 해당 논란으로부터 약 8개월이 지나 <굿바이전> 참여 작가들만을 대상으로 지원금 수령 내역 자료를 요구했다. 국회의원이 해당 기관의 직원도 아닌 '민간인'에 대한 정보를 캐묻는 것은 이례적일 뿐더러, 위법적인 지점도 있다. <셜록>의 취재가 시작되자 김승수 의원은 자료 요청을 취소했다. 반론을 구하는 연락 이후 불과 1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의원실 관계자는 지난 21일, 문자 메시지를 통해 "해당 자료 요구는 논란이 된 <굿바이전>에 대한 국비 투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의도가 아니다"라며 "확인해보니 (작가들이) 만화진흥원에 자료 제출은 하지 않았으며 자료요구는 취소한다고 밝혔다.
의원실은 '<굿바이전> 국비 투입 여부'를 확인하려 했다고 해명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굿바이전>이라는 전시회에 들어간 국비 자료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해당 전시에 작품을 낸 '작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이전부터 받아온 정부 지원금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다. 의원실은 "다른 의도가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정권에 비판적인 작가들에겐 지원금이 지급돼선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이유다.
의심의 근거는 또 있다. 김승수 의원은 그밖에도 김신, 박재동 작가를 '콕 집어서' 각각 별도의 자료를 추가로 요구했다. 박재동 작가의 경우, '2021년 벨기에 브뤼셀 국제만화축제 전시'에 어째서 박 작가가 참여하게 됐는지 그 과정의 자료를 요청했다.
"저에겐 자료 요청을 중복해서 했더군요. 김승수 의원실에 묻고 싶네요. <굿바이전> 참여 작가들에 관한 자료 요청은 취소했을지 몰라도, 브뤼셀 국제만화축제에 관련 자료는 어떻게 된 건지요? 의원실이 저한테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해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전혀 없었거든요. 이건 불법 아닙니까?" -박재동 작가
작가들은 김승수 의원의 자료 요청이 사실상 '블랙리스트의 시작'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김승수 의원의 자료 요청과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블랙리스트 사태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약 9년간 이뤄진 블랙리스트 사태의 핵심은 사전에 정부 비판적 성향을 보인 예술인 개인 및 단체를 특정해 명단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번 자료 요청 역시, 대통령 부부를 풍자한 전시에 참여한 일부 예술인만 콕 집어 이뤄졌다.
"사실상 블랙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의원실에서 이번에 자료 요청을 하면서) 제 이름을 알게 됐는데, 이후로 제게 어떤 불이익을 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려고 하진 않을까…" -백영욱 작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작가들을 위한 여러 지원 사업을 합니다. 저도 지원 사업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하고 생활했는데… (이번 일로) 내년부터는 (다음 사업 선정이) 안 될 것 같다는 공포가 큽니다." -이정헌 작가
작가들은 "김승수 의원실의 자료 요청은 부적절한 행위"라며 항의 행동을 시사했다.
"의원실에서 자료 요청을 철회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을 인정한 거 아닌가요? 우리가 알게 되고 언론이 이에 대해 물어보니, 의원실에서도 '와 큰일 났다' 생각한 거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회의원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으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책임지는 게 맞지요." -박재동 작가
작가들은 의원실에 공식 사과와 더불어서 △자료 요청 경위를 설명할 것과 △앞으로 유사한 자료 요구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을 함께 요구할 계획이다.
"피해 작가들끼리, 다음주 중에 의원실에 공식적으로 사과 및 재발 방지 약속을 요구하는 공동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경일 작가
"이렇게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을 확실하게 문제 삼고, 공식적으로 사과를 받아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정헌 작가
작가들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다. 현재 블랙리스트 부활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 지난해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권에 비판적인 예술 활동에 대한 검열과 탄압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 국회사무처가 <굿바이전> 작품들을 기습 철거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정부를 비판한다고 작품을 꼭두새벽에 다 치워버리는 게 말이 되나요? 그 전시가 허가 없이 기획된 것도 아닌데요. 정부를 비판하는 전시도, 옹호하는 전시도 모두 가능한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우리가 비판 전시를 했다면, 옹호 전시도 누군가 기획하면 되는 거잖아요." -박재동 작가
<굿바이전> 철거 사건 전에는 '윤석열차' 논란이 있었다. 지난해 10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주관한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윤석열 정부를 풍자한 만화인 '윤석열차'가 전국학생만화공모전 금상 수상작으로 전시됐다. 행사 후원 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엄중 경고' 조치를 내렸다. "행사 취지에 어긋난 정치적 주제의 작품"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이번에 김승수 의원이 예술인들에 대한 자료를 요청한 기관이다.
지난해 풍파를 겪은 전국학생만화공모전 수상적 전시는 올해 없어졌다. 문체부는 부천만화국제축제 후원자 명단에서 이름을 뺐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문체부가 국고보조금 예산을 절반 가까이 삭감한 것. 지난 20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내년 만화영상진흥원에 지원할 문체부의 만화 관련 국고보조금 예산은 60억 3000만 원으로, 올해 116억 4000만 원에 비해 48% 감소했다.
"고등학생이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을 그렸다고 (문체부가) 보복을 한 거죠. 예술에 대한 억압과 표현의 자유 침해입니다. 고등학생도 정부를 비판하는 만화를 그릴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인데도 말이죠." -박재동 작가
과거 블랙리스트 연루 의혹을 받는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의 '귀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작가들의 불안은 더 커졌다.(관련기사 ☞ 윤석열 1년... 블랙리스트의 '밑그림'은 이렇게 그려졌다)
"유인촌 전 장관이 다시 소환된 이 상황에서 이런 시도(김승수 의원의 자료 요구)가 이뤄진 게 상당히 미심쩍습니다. 의원실에 강경 대응을 할 필요가 있는 건, 유인촌 전 장관이 돌아오면 다시 블랙리스트가 시도될 수도 있기 때문에…" -고경일 작가
지난 13일 윤석열 대통령은 유인촌 문화특별보좌관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문화예술계는 이명박 정부 시절 초대 문체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 후보자에게도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지적을 해왔다.
이에 대해 유 후보자는 지난달 2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블랙리스트 부활'을 우려하는 시선에 대해 "증거는 없으면서 그냥 우긴다"는 답을 내놨다. 그는 "속칭 좌파 예술인들도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정부 예산을 요구해선 안 된다,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나"라고도 했다.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작가회의 등 문화예술인 단체들은 지난 15일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유인촌 장관 지명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유인촌 씨가 문체부 장관, 대통령 문화특보로 재직하던 시기 직권 면직 또는 해임된 문체부 산하 기관장만 최소 20건"이라며 "이명박 정부 블랙리스트 조사가 미진한 채로 마무리돼 유인촌 특보와 같은 '혐의자'에게 면죄부를 줬기 때문에 이 사태가 벌어졌다"고 강조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는 중대한 인권 침해 행위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20년 12월 23일 서울연극협회 등이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사건의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고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재판관 전원일치로 '위헌'을 결정했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 중대한 제약을 초래하게 된다"며 "(블랙리스트는) 정당화할 수 없는 자의적인 차별행위"라고 지적했다.
블랙리스트는 예술계 전반,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문화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면 비판과 감시라는 민주주의의 주요한 가치도 훼손된다.
"시사만평은 그 자체로 '싸우는' 예술입니다. 비판의 의미를 담은 한 장의 그림은 여러 힘이 있어요. 시민들이 그 그림을 매개로 정부에 대해 비판하며 속풀이를 하지 않습니까. 권력자, 위정자들은 그런 그림이 싫겠지요. 그래서 그런 그림을 그리는 만화가들을 블랙리스트에 가두고 지원을 끊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박재동 작가
"과거에 저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두 번이나 올랐습니다. 연재처가 줄줄이 끊기면서 약 10년 동안 굉장히 힘들었어요. 경제적 타격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작가들의 표현이 위축되는 분위기로 회귀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정부와 다른 생각을 하는 작가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그런 현상들을 보면서 자기검열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사회는 결코 경쟁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김신 작가
정부를 비판하는 작품에 대한 검열과 배제가 이어지고, '블랙리스트 시초' 의혹을 받는 전 문체부 장관의 귀환 가능성이 높아지는 시기다. 이때를 맞춰 여당 국회의원이 시도한 '표적' 자료 요청까지 드러났다. 작가들은 말한다. "블랙리스트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고. 그들이 김승수 의원에게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려는 이유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제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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