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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압권(壓卷)’과 ‘압존(壓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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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압권(壓卷)’과 ‘압존(壓尊)’

처음에 교단에 섰을 때는 자존감이 참 높았다. 서울시 순위고사(요즘은 임용고시라고도 한다)에 합격하고 처음 태능중학교에 발령받아 갔을 때 우리 반 학생이 72명이었다. 책상이 앞뒤로 벽에 붙어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한 명 씩 이름을 익히는 데도 여러 날이 필요했다. 그때의 제자들이 이미 쉰 살은 넘었을 것이다. 성적을 낼 때 교직의 선배였던 선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필자는 5학년 때부터 아버지의 성적 정리(전표정리)하는 것을 도왔으니 전표정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채점하는 것은 늘 그렇듯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객관식으로 출제하는 경우가 많았고, 주관식은 거의 없고, 단답형만 가끔 내는 정도였다. 지금도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난다. 장난삼아 하신 말씀 중에 “채점하기 싫으면 시험지를 선풍기에 날려서, 멀리 가는 것은 머리가 빈 것이니 낙제점을 주고 가까이 떨어지는 것을 좋은 점수를 주면 된다.”던 말씀이 있었다.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다.

대학에 와서 시험 문제를 낼 때는 항상 논술형으로 출제했다. “논하시오, 혹은 설명하시오” 등으로 문제를 내니 출제할 때는 좋은데 채점할 때는 힘들었다. 아버지 생각이 또 났다. 선풍기에 날리는 편이 쉬울 것 같았다. 특히 ‘문학과 성’이라는 과목은 수강생만 300명이 넘어서 학기 내내 과제 정리하고 채점하고 피드백하다가 세월 다 갔다. 그래서 시험을 보고 나서 생각해 낸 것이 석차순으로 성적을 내면 아무도 말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답안지를 받아서 읽으면서 잘 쓴 글을 위로 올리는 방법이다. 대부분이 비슷하지만 특히 잘 쓴 답안지는 맨 위에 올린다. 그리고 또 읽다가 더 잘 된 답안지가 있으면 그것을 그 위에 올린다. 그러면 1등부터 300등까지 자동적으로 서열이 생기고, 그에 따라 성적을 내면 뒤탈도 별로 없다. 물론 처음에는 읽어 가면서 붉은 색으로 표시하고 오•탈자 써 주고, 논리 미흡한 부분은 보태주었는데, 이렇게 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그러니 성적순으로 위로 올리는 것이 제일 편했다. 그러면 맨 위에 있는 것이 아래 있는 답안지를 누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압권(壓卷)이라고 한다. 사실 필자가 늘 해 오던 채점 방식인데, 이것이 한자어와 상관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과거 시험을 볼 때 나온 말이다. ‘권(卷)’은 원래 책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시험지(답안지)’를 말한다. 두루마리(한지)에 답을 적어 내면 관리들이 성적순으로 쌓아 놓는다. 그럴 때 잘 된 답안지를 위에 올리기 때문에 성적이 낮을수록 밑에 깔리게 된다. 그것이 곧 잘된 답안지가 다른 답안지를 누르는 형태가 된다. 그래서 ‘누를 압(壓)’ 자를 쓰게 되었다. 그 속뜻은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문장’이라는 뜻이다. 사전적으로는 “예술 작품이나 공연물 또는 어떤 대상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예문으로는

태호의 책 <우리말 바로 알기>가 이번 한국어학계에서는 압권이지.

그의 소설은 화려한 수사와 수려한 문체가 압권이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다음으로 몇 번 글로 썼던 것 중에 압존(壓尊)에 관한 것이 있는데,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좀더 부연한다. 우선 우리말에서 압존법이란 “높여야 할 대상이지만 듣는 상대방이 더 높을 때 압존이 되는 높임법”을 말한다. 할아버지에게 아버지 얘기를 할 때 “아비가~~”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어른에 대한 공대를 그보다 더 높은 어른 앞에서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압존법은 이제 서서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워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존대법도 조금씩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압존의 예절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습이라 어느 정도는 지키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세월이 흘러서 영어처럼 높임이 사라진다면 모를까 아직은 예절교육의 일환으로 압존법 교육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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