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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를 찾고 싶은 내 딸 "한국은 왜 미혼모를 돕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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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를 찾고 싶은 내 딸 "한국은 왜 미혼모를 돕지 않았나요"

[372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딸과 함께 친어머니를 찾고 있습니다

7월의 무더운 여름 서울 성북동 산언덕의 작은 골목길로 가기 전, 우리는 시원한 지하철을 즐기고 있었다. 내 10살 딸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나는 딸이 더위에 지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돌아서며 말했다. "엄마처럼 생긴 아줌마들을 찾고 있어." 잠깐 멈추고 그녀는 계속한다. "그리고 나처럼 생긴 사람도. 언젠가 (외)할머니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내 입양 파일에 따르면, 나는 성북동에 있는 '휘락원'이라는 기관 앞 길에서 담요에 싸여 발견되었다. 휘락원이 어떤 기관인지 모르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 나를 발견해서 1976년 5월 6일에 성북암 경찰서에 나를 넘겼다. 나는 대략 태어난지 3주쯤 됐다. 지금은 가족과 대한민국에서의 입양과 잠재적인 할머니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딸과 함께 돌아왔다. 입양 파일에 있는 정보가 매우 부족해서 우리는 경찰서 이름밖에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성북동의 오래된 동네를 돌아다녔다.

나는 딸을 출산하자마자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내 생애 첫 가족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전까지는 나는 거의 한국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백인 사회에서 자라면서 일상적인 인종차별을 겪었지만, 거의 내 배경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왜 생각해야 하나? 내 인생은 1977년 1월 덴마크로 가는 편도 티켓과 함께 시작됐다. 딸을 출산한 후에 내가 생물학적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크게 놀라게 했다. 35세인 나는 한국이나 내 배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제 스스로가 엄마가 되면서, 내 어머니를 찾을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빠르게 입양기관인 홀트가 도와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해외입양인을 위한 온라인 포럼을 찾아냈다. 이 포럼에서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나는 한국에서 해외입양은 한국전쟁 후 불행과 가난에서 생겨난 필연적인 인도주의적 노력이었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나는 의문을 갖게 됐다. 왜 다른 국가들은 위기 상황에서 20만 명의 아기를 해외로 보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왜 나와 대다수의 입양 아동들이 한국전쟁이 중단된 이후 대한민국이 크게 경제 발전하는 시기에도 해외로 보내졌는가?

해외입양인을 위한 이런 포럼에서 나는 한국 해외입양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입양절차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기록이 조작됐고, 입양기관과 한국 정부가 해외입양에서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한국에서 입양의 역사가 부모님의 동의 없이 아이를 빼앗거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하는 경우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어떻게 우리 한국 어머니들이 미혼모를 경멸하는 사회에 의해 굴욕을 당하고, 학대를 받고, 입양을 강요받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을 때, 그녀는 가슴 아파하며 외쳤다. "그건 너무 불공평하고 불필요해! 왜 결혼하지 않았다고 아이를 잃어야 하지? 왜 한국은 어머니들이 그들의 아이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아?"

가족과 나는 성북동의 오래된 빈민촌을 거닐면서 내 어머니에 대해 상상한다. 나는 그걸 여러 번 해봤지만, 이제 우리는 특정한 집을 가리킬 수 있고, 저 언덕 위의 파란 지붕이 있는 그 집에서 나는 태어났다고 상상할 수 있다. 나는 내 어머니가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런 젊은 여성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나를 혼외자로 출산했을 때 가족과 소원해지고, 아기를 혼자 돌보는 고생을 하다가 그녀 혹은 한국 사회가 나를 지킬 수 없다고 결정했다. 내 의료 기록에서 나는 아기로 발견될 때 아구창(구강 칸디다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이 병은 보통 유방에 염증을 갖고 있는 어머니를 통해 모유 수유중 발생한다. 이는 어머니에게 굉장히 고통스럽다. 나는 우는 아기와 함께 외로이 젖을 먹이고 있을 때마다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내 어머니를 상상하면서, 그녀가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은 포기해야 했다는 절망을 느낄 수 있다. 오늘 나는 아구창을 앓고 있었다는 그 정보를 알고 있는 것에 매달린다. 내게 그 정보는 어머니가 실제로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다.

덴마크 한국 권리 그룹(DKRG)이 작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 해외입양의 인권 침해 의혹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나는 딸에게 전 세계의 많은 입양인들이 한국 정부에 해외입양에 대한 진실을 밝혀 주고, 우리 어머니들의 삶을 불명예, 오해, 억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나는 딸에게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고도 말했다. 우리의 수색은 계속되고 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만약 어머니를 만난다면 나는 확신한다. 내 딸은 그녀에게 아기를 잃은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입양 당시의 필자 ⓒ제인 메이달
▲필자와 가족들. ⓒ제인 메이달

2022년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 달라는 조사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11월15일, 12월9일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372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 과정에서 인권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다행히 진실화해위는 12월8일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한 데 이어 지난 6월 8일 추가로 237명에 대한 조사 개시 입장을 밝혔다. 이는 한국이 해외입양을 시작한지 68년만의 첫 정부 차원의 조사 결정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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