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부터 사회학적으로 '세대론'은 자주 사용된다. 최근에는 MZ세대가 대표적이다. 1980~1994년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5년 이후에 태어난 ‘Z세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전 세대와 달리 조직과 자신을 분리하고 ‘워라밸’을 지키는 세대로 규정된다.
그런 의문도 든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걸까. 더 정확히는 자신의 근무조건에 적극 문제제기를 하고, 보장된 휴식시간을 반드시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
같은 세대 내에도 부모의 능력과 교육, 성별, 태어난 지역 등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고 이는 불평등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어떤 동질성'이 같은 세대라고 치부하며 그들을 MZ로 묶어버린다. 이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자칫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은폐 내지는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은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만난 10명의 도시 속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MZ세대이나 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MZ세대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도시 속 2030 여성들이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편집자
제트는 유튜브 작가, 속기사, 온라인마케팅 회사를 거치는 중에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의 문을 두드렸다.
위 세 가지 일 이전에 케이블방송사 사무직 알바를 1년 정도 했지만, 제트가 제일 먼저 했던 일, 직업으로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은 신문사 편집국 기자였다. 대학에서 언론 계열 학과를 졸업한 제트는 학과 선배들이 했던 대로, 대학이 있는 도시에서는 꽤 영향력이 있는 신문사 인턴에 지원했다. 기사를 보고 제목을 뽑는 일이나, 홍보 글을 쓰는 일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해야 하는 일은 빠른 속도로 해내고, 시각 디자인에 대한 감각도 있는 제트는 6개월 인턴을 거치면 신문사 정직원으로 지원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6개월의 신문사 인턴은 예기치 못한 난제 앞에 제트를 침잠하게 만들었다. 편집국의 부장이었다. 디자인이 끝난 편집대장을 들고 가면 부장의 손이 제트의 엉덩이로 내려왔다. 회식을 하고 노래방엘 가서는 제트의 노래를 듣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직원들이 복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콘도 시설을 인턴도 사용할 수 있는지 물은 날은 '누구와 콘도에 가려고 하느냐' 며 사무실이 울릴 말큼 큰 소리로 물었다.
이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제트는 그저 무력했다.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 공포, 비명은 삭혀지기만 할 뿐 몸짓으로 음성으로 표출되지 못했다. 드러낼 수가 없었다. 우선 부장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도 제트에게 반응을 해 오지 않았다. 선배 기자들은 분명히 보고 있거나 듣고 있는데도 안 보이는 것처럼 안 들리는 것처럼 제트의 옆을 통과할 뿐이었다. 신문사에는 학교 선배들도 있었지만 제트를 위로하거나 함께 화를 내주는 이가 있지는 않았다. 평소에 밥을 같이 먹거나 커피 한 잔이라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제트가 나쁜 일을 겪고 있다고 해서 갑자기 말을 걸어주는 이가 있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제트 역시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는 했다. 말이 오가고 눈빛, 손짓이 오가고, 먹거나 마시는 일을 하지 않는 한. 한 사무실 한 공간 안에 있어도 멀리 있는 느낌. 그 거리감은 당겨지지 않는 법이다.
6개월을 한 공간에서 있으면서 물리적으로 고립된 느낌은, 엄청 긴 시간은 아니겠지만 외로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제트는 혼자였다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동료애나 신뢰는 한 공간에 있다고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닌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 이유에서 제트에게 부족한 점은 없었나. 왜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못했나요?
'인턴에게는 곁을 주지 않으니까요'
'왜요?'
'인턴은 금방 나갈 사람이잖아요. 도와줄 필요가 없는 사람'
어느 날 여성 선배가 조용히 불러 '부장이 그런 사람인 건 우리도 알고 있다', '이야기하고 싶으면 익명으로 블라인드 같은 곳에 올려라'라고 말했다. 제트를 생각해서 준 정보일 수도 있지만 문제로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지침'일 수도 있었다. 여튼 연대나 도움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듬해에는 후배들이 인턴으로 와야 한다. 공개적으로 항의를 하면 학교에서 알게 될 테고, 후배들의 인턴십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제트는 후배들의 인턴 지원이 막히는 상황이 가장 걱정되었다고 한다. 이타심이 제트를 주저앉혔다. 물론 학교와 연계가 있는 신문사는 제트의 힘으로는 손도 댈 수 없는 거대한 영역이기에 이타심이라는 말은, 초라한 제트의 처지에서는 어색하다. 남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에도 따져야 할 자격이 매우 많은 세상이다. 또 하나, 우리 사회 학연의 힘이 크다 해도 고용 상의 지위를 넘어설 만큼은 아니라는 것을 신문사의 선배들은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렇게 여성 선배의 정보 제공은 선택지로도 고민해볼 여지가 없는 무용한 일이었다. 씁쓸하고 쓸쓸했다. 같은 공간의 동료로 인정받거나, 인정 이전에 교류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 조직의 선택이고 습성일 것이다.
인턴이 끝났다. 어서 신문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인턴이 되려고 준비했고 정직원이 되고 싶었던 직장이지만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바로 다음 일을 찾아 나섰다. 사기를 당한 부모가 부채를 줄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숨을 고르고 차분히 진로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서울로 갔다. 유튜브 컨텐츠를 제작하는 기획사에 작가로 들어갔다. 몇 개월 버티지 못한 것은 건강 컨텐츠를 찍는 병원 원장이 촬영시간을 밤에도 잡고 새벽에도 잡고 고무줄처럼 스케줄을 써서만은 아니었다. 기획사가 있는 강남에서 쉐어하우스라고 부르는 곳에 월세로 사는 동안 한 달 수십만 원의 월세는 급여 수준에 비해 배보다 배꼽이 큰 모양새였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남성 직원들과 한 공간에서 일하는 것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안 좋은 일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도 경직되고 불편했다. 제트는, 인턴의 시간에 멈추어 있었던 것 같다고 스스로를 진단했다. 부장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한 용기 없는 자신을 자책했다고 한다. 제트 자신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자신이 해온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나온 자리에서 제트는 맴맴 제자리를 도는 것처럼 인턴의 기억으로 되돌아오고는 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인턴의 시간과 서울에서의 몇 개월의 불편감에 대해서 짚었다. 제트는 신문사 직원이 될 기회를 잡지 않는 것으로 자기 치유를 도모했지만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딪치지 않고 도망친 것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부딪쳐서 더 아프느니 빠져나오는 것이 좋은 결정일 때도 있다. 그러나 도망을 나오더라도 상대가 그것에 대해 깨닫긴 해야 한다. 신문사 부장도 선배들도 제트를 기억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도망도 성립하지 않는다.
제트의 서울행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날부터 자립해서 살라고 권하던 부채 많은 부모가 최초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300만원을 보내주었다. 그 돈으로 속기사 자격증을 땄다. 지방의 한 도시에 속기사로 정착하고자 하였으나 월급이 너무 적어 월세방 꾸리기도 만만치 않았다. 지인의 방 한 칸에 얹혀 지내다가 신문사가 있던 도시로 돌아왔다. 프리랜서 속기사를 하면서 알바 하나를 더 찾으려고 하니, 익숙한 잘 알고 있는 도시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와인 판매점 점원 일을 구했다. 와인샵은 와인 박스를 옮기는 일도 빈번했지만, 와인을 구매하러 온 고객들에게 와인을 시음해 보도록 하는 '디캔팅'이 있었다. 도시의 신시가지에 있는 와인샵은 손님이 많았다. 속기사도 어깨, 손목을 많이 쓰지만 와인병을 들고 손목을 돌리는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병을 들고 손목을 돌리는 일을 하는 시간에 비례해 어깨가 으깨지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제트의 어깨부상이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제트의 노동의 이력은 신문사가 있던 지역을 떠나 큰 도시와 작은 도시를 거쳐 다시 신문사가 있던 도시로 돌아온 여정이었다. 와인샵 점원에서 일단 멈춘 제트의 여정은 그러나 잠깐 멈춤이었다. 온라인 마케팅 회사로 이직을 고려하는 중이라고 했고, 이직을 위해 다른 도시로 갈지 고민하고 했다고도 했다. 어깨부상이 자동차 브레이크의 붉은 등처럼 잠시 멈추게 했지만, 발을 떼면 곧 길을 떠날 것이었다.
이때 청년 여성을 인터뷰하러 다닌 이래 거의 처음으로 개입했다. 아주 미약한 강도였지만 잠시 멈추어 보라고, 지금 있는 그 도시가 가장 익숙한 곳이라면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면 어떻겠는지 전달은 될 정도의 의견을 냈다.
어느 도시인가보다 내가 어떤 상태인가가 중요하다.
지방 청년 여성을 많이 만났다. 서울의 식당 주방에서 일하다 서울에서 먼 남쪽의 고향으로 돌아간 청년 여성은 TV에 남산타워가 나오면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휴일에 오르던 인왕산도 그립다고 한다. 그러나 인왕산을 오를 기운이 남아있지 않은 휴일에는 내내 잠을 잤고, 더러는 허리와 손목에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다녔다. 뮤지컬을 보거나 한강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만난 방송작가가 전해준 바로는, 코로나19로 방송 제작이 크게 줄었을 때 방송국에서 일하던 '막내 방송작가'들 가운데 일이 끊어져서 '고향'으로 돌아간 이를 여럿 보았다고 한다. 프리랜서인 방송작가들은 수입이 불규칙하고 특히 '막내 작가'들은 아주 적은 임금을 받는데, 서울을 떠난 이들은 대부분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잦아들고 방송이 다시 활기를 찾을 때, 고향으로 갔던 '막내 작가'는 서울로 다시 왔을까. 그것은 대체로 그 가족의 사정에 달렸을 수 있다. 주거비를 보조해줄 수 있는 경제력있는 가족이 있다면 방송국 일을 위해 다시 상경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이들은 애초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거비가 안정적으로 확보되어 있었다면 버티면서 방송 일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월세집부터 찾아야 하는 이들은 제트의 여정처럼 길 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동의 여정은 인터넷 구인사이트 같은 취업정보를 포함하긴 하지만 어떤 취업정보를 클릭하느냐는 최종 결론일 뿐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사회가, 때로는 가족이 부모가 더 얹어주거나 덜어주지 않은 삶의 과제를 안은 채로 청년 여성들은 이동하고 있었다.
* 이 연재는 2022년 '노동건강연대'와 '아름다운재단'이 함께 한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에서 만난 여성들, 노동건강연대가 활동하면서 만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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