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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손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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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손자에게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들어가며 1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나의 손자 벤자민 지용아,

할아버지는 해방 한 해 전 서울의 서편 인왕산성 아랫줄기 너머 바위비탈 동네인 현저동 한 가운데에서 태어났단다. 할아버지의 어머니 아버지는 일찍이 경기도의 동북편 가평 땅의 명지산과 그 아래 연인산, 그리고 연인산 건너 청계산으로 둘러싸여 사시사철 맑은 물소리 내며 흐르는 큰 개울가 한켠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사시다가 일찍이 서울로 올라오신 분들이었단다.

할아버지가 태어나기 삼십여 년 전인 1910년부터 우리나라 조선민족의 땅은 식민제국 일본의 일부였으니, 할아버지는 식민제국 패망 1년 전에 일본 신민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속은 배달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조선민족의 씨알이었구나.

이 때 서울의 북악산 밑에는 일본의 총독 관저가 있었을 터이고, 그 앞에는 조선총독부가, 그리고 맞은편에는 조선 황민화 정책의 상징인 일본의 신사가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경성(서울)의 한복판에는 전차가 오갔을 것이고, 서울역은 일제의 관동군 관할 만주국을 오가는 기차의 중간역이었을 터, 시중을 오가는 백의의 사람 모두는 조선민족의 피가 흐르는 조선 사람이면서도 제국 일본의 통치를 받는 일본의 신민이었을 터.

할아버지가 태어난 1944년 10월과 그 다음 해인 해방의 날 1945년 8월 15일 사이의 10개월 간, 태평양을 거머쥐려던 제국 일본의 병대는 미국 군대에 밀려 마침내는 자기들의 본토마저 폭격 당하면서도 전장이나 전투에서 죽는 것을 영예로 알았고, 그들의 중심 자리에는 늘 천황 히로히토가 제국민(帝國民)의 신으로 자리하고 있었을 터였다.

할아버지 태어나기 35년 전인 1910년부터 우리 조선 땅이 제국 일본에 합병돼 우리 땅, 우리 인민들의 마음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졌고, 쪼그라든 만큼 일본 놈들의 기세와 재산은 불어갔을 터.

더불어 제국 일본놈들의 통치 아래 조선 민족의 피를 이어 받았다 해도 제 잘 나 일본놈들의 쪼가리에 붙은 조선놈들은 권력과 부와 지식을 쌓아갔을 터이고, 혹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두루두루 자본주의 시장문화를 익히고 돌아와 으스대며 행세하고 있었을 터.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반도 오천년 조선 민족으로서의 기개가 높고 의지가 강한 사람은 조상의 땅을 등에 지고라도 첩첩한 산을 넘고 눈 덮인 압록과 두만의 강을 건너, 대륙의 남남북북 깊숙히 들어가 땅을 일구고 밭을 갈거나 혹은 항일 독립군으로, 혹은 중경의 장개석 국민군과 합쳐, 혹은 연안의 모택동 홍군과 어울려 중국의 본토는 물론 만주의 대평원과 깊은 산록에서 눈비 맞으며 일본의 관동군과 맞불었을 터.

태평양 군도들을 하나하나 회복해 가던 미군이 장장 4년 간의 태평양전쟁을 앞당겨 끝내기 위해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사흘이 지난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그 무서운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한 순간에 제국의 두 도시와 신민을 잿더미로 만들자 일본놈들의 신 천황 히로히토는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의 항복을 선언 했더라니.

이로써 반도의 조선 땅 조선 인민은 민족과 나라에게 덧씌워져 있던 제국 일본의 삼반세기 식민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 환희의 순간을 맞이했더라니, 아하! 우리 땅 조선 만세! 해방 만세! 조선인민 만만세세! 이 순간만큼은 남과 북을 가르는 38선도 없었을 터이로구나.

조선민의 마음에는 '이제부터는' 그 누구의 지배도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이 땅을 우리들 조선 인민, 조선 민족만의 땀과 피로, 광영과 평화가 넘치는 땅으로 만들겠다는 꿈과 희망으로 가슴 차 있었을 터이니.

잠깐은 그래 보였구나. 허나 세세대대 36년 동안이나 짓눌릴대로 짓눌려 민족의 피와 땀과 한숨이 속속들이 배인 이 땅은 오로지 우리들 조선 인민만의 땅이 아니었음이니. 해방의 한 축 스탈린의 소련과 미군의 점령군으로 민족의 땅 조선반도가 두 조각으로 나뉘어야 했음이니, 아아!

비록 해방이 되었다 해도 삼팔 이남의 제국 일본의 조선총독부와 그 아류배들은 무려 25일 동안이나 점령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터이고, 해방의 날 스무사흘이 지나간 9월 7일에서야 연합군 사령관 하지는 승전군이자 점령군으로 미24군단 2만5000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여, 끌고들어온 미군을 각지로 풀고, 이틀이 지난 9월 9일에야 서울에 입성하여 일장기를 내리고 미국의 성조기를 꼽았노니.

즉시 여운형을 중심으로 설립된 인민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약칭 '미군정청'을 설치하여 점령군으로서 총독부의 통치조직 통치방식을 빌어 이 땅 조선을 다스리기 시작하였음이니.

이때 가서야 항복문서에 서명한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떠나기 전 남긴 한마디 말,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조선민이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으니…"

일제시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조선 이 땅을 짚었지 않았겠더냐.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조선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조선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조선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조선이 되니 이것이 도대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노예정신이 아니냐!"

아하, 조선이 그러하지 않았더냐! 다만 통치세력만 태평양전쟁의 승자인 미군으로 바뀌었을 뿐. 미군이 상륙하기 사흘 전, 조선인 여운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미 군세에 밀려 즉각 건국의 깃발을 내려야 했고…

해방 후 미군이 들어서기 25일 전부터 이 땅에는 조선총독부 묵인 하에 극우세력으로부터 극좌세력에 이르기 까지 온갖 정치배들이 득실대지 않았더냐. 그 중심에는 좌편향 중립의 여운형과 분명한 좌세력 박헌영은 물론이고 이승만과 김구의 우익 정치세력이 갖은 술수와 기술로 앞다퉈 자기 세력을 넓히려고 혈안이었을 터이니.

이때 이 땅 조선반도에 상륙한 미24군단 2만5000 병력은 점령군으로 전국 요소요소에 풀렸고, 미군 사령관 하지는 워싱턴과 멕아더의 특명을 받아 조선총독부 대신 미 군정청을 세웠더라니.

하지만 미 군정청이 이 땅 조선을 속속들이 알 리가 있었겠는가? 그러하니 미 군정청은 일본제국 치하의 일본인 관료는 물론하고 제국 일본 총독부에 몸담았던 조선인 관리 관료와 경찰마저 다시 등용하여 그들을 옆에 두고 38 이남의 조선을 다스려 나가면서, 일본인이 남기고 간 온갖 재산과 산업시설 모두를 자기식대로 관장해 나갔더라니, 미군은 과연 조선총독부와 무엇이 달랐겠더냐.

이것이 지금까지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옭죄고 슬프게 하는 이 민족 조선의 역사요 운명이었더라니, 이처럼 이 땅 조선에는 인민은 있으나 인민 위에는 미 군정청이, 미군정청 안에는 미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다시금 조선총독부에 있던 조선인 관료와 관리, 경찰과 군인이 섞인 채 이 나라가 관장되어갔을 터이니, 너무도 기가 차 숨조차 멎는구나. 이것이 조선반도 조선 민족이 지니고 가야할 운명이던가.

여운형은 해방 2년이 지난 1947년 백주대낮에 혜화동로터리에서 총 맞아 죽고, 전국을 비호하던 사회주의 세력의 지도자인 박헌영은 이 땅의 지배자 미군정청의 체포령과 군정청의 비호를 받는 우익세력에 쫓겨 38 이북으로 넘어가 김일성에게 붙고, 김구는 남한에 남아 오로지 민족 통일의 염원 하나만으로 분투 진력하다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후에 자기가 머물고 있던 경교장에서 총 맞아 죽고….

미군정청을 배경으로 일찍부터 조선 인민의 인지도가 높고 미국의 시민문화가 골수에 배인 반공주의자 이승만에게는 은근히 군정청이 뒤를 받쳐 자기들 세력으로 키우고 있었을 터이고.

이 땅 이 바닥에는 이 땅의 뿌리인 수많은 인민이 있었다 해도 그 많은 인민의 꿈은 한낱 허공 위에 떠도는 하늘 위의 꿈일 뿐, 때로는 크게 일어서다가도 세상의 혼탁함에 쫓겨 허기지고 맥이 풀려 자기 일 자기 주변 자기 생활에만 파묻혀 지내야 했을 터. 자유 의지의 신청년 신지식인의 지혜와 피맺힌 울분도 더 강한 군정력과 군정 밑 친위 우익세력에 짓눌려 있어야 했을 터이니, 숨이 막히고 피눈물이 고이는구나, 이 민족 이 땅 비운의 역사로 인하여.

이 땅을 파고든 그 많은 점령미군 2만5000은 미군정 3년 동안 각지의 주둔지에서 365일 무슨 짓을 하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이를 알 길이 없어 답답하고 낭패롭기 그지없으나, 전쟁 시기 미군 곁 양공주 거리의 짓거리로 보아 짐작되는 바 없지 않으니. 그리고 그들은 미국 자본주의 돈 문화, 소비문화의 확실한 전파자!

할아버지는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미 군정청의 통치방식과 그 내용을 세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아는대로 몇 가지만 추려내어 본다면,

미 군정청은 제국일본 정부나 그 기관 또는 그들의 국민·회사·단체·조합 및 기타 단체가 소유·관리하던 모든 종류의 재산과 수입 일체를 몰수하여 그 소유권을 미군정청이 취득 소유 내지 관리했더랬다.

때로는 미곡가격 자유화를 멋대로 강행하다가 천정부지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이에 더해 제주도 4·3 사건, 대구 10·1 사건의 수습을 회피하여 우리 조선인민의 원성을 샀고, 소위 '귀속재산', 그중 미군정청에 의해 이뤄진 귀속농지의 분배는 농민의 요구와는 달리 군정청 단독으로 분배하여 농민의 분노를 샀더라니. 특히나 무산(無産) 농민은 영원한 무산자, 기껏 소작농.

잘하든 못하든 미군정청의 혼탁한 3년 간의 시대는 잦아들고 있었을 터. 유엔의 반도 통일을 위한 신탁통치 노력도 못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반도의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시대의 강물, 시대의 바람이 흘러가야 했더라니. 어떻든 이 땅 한반도는 소련이나 미국의 땅이 아니기에 3년의 군정시대의 끝머리에는 우리 조선 민족만의 정부 수립의 날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더냐.

해방 3년이 지난 1948년 5월 10일의 총선거로 설립된 제헌의회는 그 해 5월 31일에 이 나라 헌법을 제정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 중심에는 74살의 이승만이 제헌의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초대정부의 대통령으로 자리 잡고, 북은 북대로 37살 김일성을 주축으로 사회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처럼 반도의 양분은 조선 역사의 비극이던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이던 조선 인민의 곁에 붙어 다니는 엄연한 현실이요 하늘이 내린 조선인민의 운명이었음이니, 할아버지인 나는 우리 반도의 역사와 운명 앞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입 악물고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민초(民草)이기에.

할아버지는 반도의 북은 모른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지만, 우연한 기회에 안다고 해도, 자칫 이 땅 38 이남의 지배자가 만들어낸 '반공법'이란 공권력의 힘에 눌려 평생을 허우적거리며 지내야 했을 터이니, 어찌 이를 가까이 할 수 있겠더란 말이냐.

우리 민족 우리 남한 겨레가 아는 세상은 미국 하나여야만 했더라니, 우리는 어릴 적부터 우리 문화보다 미국 문화 미국 글만 익히려 들지 않았더냐. 더욱이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였기에 독재와 독선의 나라 우리 남쪽나라마저 모르지 않았겠더냐. 이 나라 이 땅이 조선과 일본 그리고 미국 세 세력의 짬뽕문화의 나라라는 사실을.

할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해 재수를 하고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리고 학생운동에 참여하고서야 피의 조국 조선반도의 역사 흐름의 중심축을 알기 시작했고, 보다 큰 세계와 시대의 역사도 살피기 시작할 수 있지 않았더냐. 더욱이 할아버지는 대한민국 최고학부 속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생이었기에 남보다 빨리 이러할 수 있었던 것 같구나.

슬프고 슬픈 우리 민족의 분노의 역사! 우리 아닌, 남의 나라 미군정 하의 조선 땅 남반도 3년의 역사, 조선역사 슬픔의 상징 4·3 제주도민과 여수·순천 백성들의 격노와 통한의 역사, 뒤이어 이어진 이승만 독재 12년의 기구망측한 분노의 역사. 더구나 이승만 시대 초엽 조선 민족상잔 3년 전쟁으로 인한 인륜파괴의 핏빛 민족의 역사! 초등학교 초급생이던 할아버지의 머리 위로는 허구한 날 폭격기 B-29와 제트기가 북으로 날아가고 있었더라니.

잇대어 이승만 독재시대를 무너뜨린 4.19 시민 대혁명 후 짧디짧은 시간 동안의 민중민주민족 중흥 준비의 역사, 민족 통일을 위한 민중의 새 흐름의 싹이 트기도 전에 44살 군인 박정희로 인해 그나마 새로 세워진 민주정부가 짓뭉개져야 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서막의 역사!

할아버지는 이를 대학교 1년 재수시절인 1964년에 을지로 입구에 있는 국립도서관에서 독서 중에 알기 시작했고, 거리의 길머리 신문 가판대와 벽보판에서 1964년의 3·24와 광분의 6·3 데모 현장을 목도하였더라니. 분노의 이 땅 조선의 역사를!

1964년 6월 3일, 대학생 데모대는 4·19 혁명 때처럼 기어이 중앙청의 돌담을 돌아 경무대로 짓쳐나가지 않았더냐. 이때 병술에 능한 박정희는 급격히 위수령을 포고, 총과 탱크와 불심검문으로 이를 죄어오던 날, 할아버지는 을지로 국립도서관에서의 시험공부를 마친 후에 살얼음 빛 감도는 침묵의 을지로 입구 네거리와 시청 앞 광장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와 신문로 언덕길을 거쳐 영천 전차 종점 위 산동네 안의 할아버지 집으로 걸어가고 있지 않았더냐. 그때 할아버지가 걸어온 거리의 요소요소에서는 불심검문과 더불어 가두경비를 서고 있는 중무장의 군인과 탱크가 버티고 있지 않았더냐.

이러한 시기에도 할아버지는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걷는 북한산성 성길을 따라 북한산 꼭두머리 백운봉을 향한 등성길에서도 조선반도 조선인민의 역사와 더불어 총칼 찬 중무장의 계엄군의 모습이 떠올랐더구나. 백운봉을 향한 산성길은 봄여름가을겨울 마냥 호젓했더라니, 그 시절 서울민은 종일 노동으로 자기만의 빈 시간이나 있었겠는가 말이다.

1965년 서울대 문리과 대학에 입학한 지 4개월이 지나 징병제에 낚여 군대로 들어가기 넉 달 전, 할아버지는 문리대 마로니에 곁 4.19 기념탑 앞에서 학생회 주최로 거행된 4.19 기념행사에 참여한 후 기념식 무리의 선두에서 학생회장 조순 선배의 곁에 붙어 보슬비 내리는 동숭동 대학로를 지나 종로5가를 돌고 있었더라니.

이때 갑작스런 '삐~'하는 호각소리와 함께 경찰대 트럭을 타고 행진대의 양옆에 붙어오던 백골단들에게 목줄을 잡히고 팔을 꺾여 행진대 모두와 함께 평화극장 안에, 이어 종로4가 동대문경찰서 안에 쳐녛어져 하룻밤을 지세워야 했더라니.

이때부터 할아버지는 문리대 학생운동의 앞머리에 섰고, 강의실의 강의는 모두가 미국판 서양색 일색이라 홀로 국립도서관과 서울대 중앙도서관, 혹은 친구 유주석이 있는 한국일보사 자료실, 때로는 각국 대사관 도서실에서 서글픈 이 땅 조선, 반도 조선 인민의 역사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기 시작하지 않았더냐.

특히 1892년의 동학혁명 때의 하늘 치는 동학민중의 분노에 찬 아우성은 할아버지의 심금을 통탄과 한숨과 눈물로 온몸을 적셨더라니. 1919년 민족 민중의 3·1 조선독립 만세 운동도 할아버지의 가슴을 메이게 했고, 1950년부터 시작된 6·25 3년 전쟁 역시 조선의 비극이자 반도역사 인식에서 슬픔이요 눈물의 역사이어야 했더라니.

선량하기 그지없는 많은 농민과 노동자, 또한 민중과 서민이 아무러한 죄도 없이 죽어야 했고, 죽임을 당해야 하지 않았더냐. 남자이건 여자이건, 나이가 많건 어리건 가릴 것 없이 말이다. 낮밤없이 수많은 조선민족 조선민중이 죽임을 당해야 했더라니.

이 모든 게 누구의 탓일거냐! 시대의 탓일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기득권에 빠진 못된 지도자들의 무관심, 무능력, 무한폭력 탓이 아니었겠더냐.

할아버지에겐 이 나라의 슬픈 역사가 가슴에 남아 도무지 가시어지질 않아 왔단다. 여든 살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말이다. 이 나라 조선민족의 슬프디슬픈 민중민주의 역사!

<계속>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신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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