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이 근래 가장 낮은 폭으로 증가한 채 편성됐다. "민생을 내팽개쳤다"는 질타가 곧바로 쏟아졌다.
29일 정부는 내년 예산 총지출을 전년 대비 2.8%(18조2000억 원) 증가한 656조9000억 원으로 편성했다고 밝혔다.
정부 예산 총지출 2005년 이후 최소 증가
이는 재정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후 20년 만에 최소 증가 폭이다. 올 6월 말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재정전략회의에서 논의된 긴축안보다 증가율이 낮다.
당시 4% 중반대 증가율이 반영된 예산안이 오르자 기획재정부는 각 부처에 내년도 예산을 다시 짜 올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이는 "예산을 얼마나 많이 합리화하고 줄였는지에 따라 각 부처 혁신 마인드가 평가될 것"이라던 윤석열 대통령의 회의 발언에 따라 결정된 조치다. 그 같은 요구안이 이번 '짠돌이 예산안'에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가 내년 한국의 경상 성장률을 4.9%로 잡은 만큼, 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역대급 긴축 재정'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줄곧 강조해 온 재정 긴축 기조가 내년에도 이어지는 셈이다. 정부는 "국채 발행으로 지출 규모를 크게 늘리기보다 강도 높은 재정 정상화로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집중"하겠다고 편성 이유를 밝혔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문재인 정부가 연 7~9%대 총지출 증가율을 기록하며 짠 예산안과 크게 대비된다.
총수입 612.1조 원… 통합재정수지 적자 44.8조 원
내년 총수입은 전년 대비 2.2%(-13조6000억 원) 줄어든 612조1000억 원으로 편성됐다. 국세수입을 올해 예산 대비 33조1000억 원 줄어든 367조4000억 원으로 잡고, 국세외수입에서 19조5000억 원이 증가하는 것으로 정부는 편성했다.
올해의 경기 둔화와 자산시장 침체로 인해 국세 수입이 적게 걷히는 상황을 반영한 결과다.
이에 따라 내년 예산은 총지출(656조9000억 원)이 총수입(612조1000억 원)을 웃도는 적자재정으로 편성됐다. 그만큼 재정수지 악화가 발생하게 됐다.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올해 58조2000억 원에서 33조8000억 원 증가한 92조 원으로 잡혔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은 3.9%로 불어나 정부 재정준칙 한도(3.0%)를 넘어서게 됐다. 정부가 재정 졸라매기를 했음에도 재정 악화가 일어났다. 이에 관한 비판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채무는 올해 1134조4000억 원에서 61조8000억 원 증가한 1196조2000억 원이 됐다. 이에 따른 내년도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올해보다 0.6%포인트 오른 51.0%로 잡혔다. 즉 재정 지출을 줄이면서 국가채무 비율은 더 올라간 셈이다.
한편 이를 반영한 내년도 통합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올해 13조1000억 원 대비 31조7000억 원 증가한 44조8000억 원이 됐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사전브리핑에서 "그간 확대된 재정수지 적자와 누적된 국가채무로 재정 상황이 어려운 데다 올해와 내년 세수 상황이 녹록지 않다"며 "경제 상황, 민생, 국민 안전을 위한 재정 소요를 감안하면서도 건전재정 기조를 놓지 않는 지점이 어디일지 고민했다"고 밝혔다.
참여연대 "건전재정 집착 결과…민생 희생 선언"
정부의 이번 예산안이 발표된 후 시민사회에서는 곧바로 강력한 비판이 제기됐다.
참여연대는 이날 배포한 논평에서 "거듭된 세수 부족 사태에도 감세로 점철된 세법 개정안을 내놓은 윤석열 정부는 예상대로 2024년 총지출을 2005년 이후 역대 최저 증가율인 2.8% 증가한 656.9조 원으로 편성했다"며 "지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밝힌 내년도 경상성장률 4.7%(실질성장률 2.4%, 소비자물가상승률 2.3%)를 감안하면 사실상 지출을 크게 줄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는 한국의 주요 수출국인 중국 경제가 가라앉는 마당에 "재정지출까지 이렇게 줄이는 것이 적정한지 우려된다"며 "이는 결국 상반기에만 40조 원 발생한 역대급 세수결손과 건전재정 집착이 결합된 결과"라고 촌평했다.
참여연대는 "경제위기 시 정부가 긴축에 나설수록 경제는 악화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이는 결국 재정만 고려해서 민생을 희생시키겠다는 것과 같다"며 "재정지출 감소로 민생이 악화되고 이는 다시 세수 부족으로 이어지고, 재정은 더 위축되는 악순환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어 "재정 정상화로 포장된 재정 역할 포기 선언과도 같은 내년도 예산안으로 인구변화의 구조적 위기, 경제위기, 기후위기 등 복합적 위기에 대응할 수 없"다며 참여연대는 "적극적 재정운용 기조로의 전환과 이를 위한 국회의 역할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처럼 삭감된 예산안이 나옴에 따라 야당은 물론, 한 표가 아쉬운 처지인 여당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연구개발 예산 큰 폭 감소…내년 예산 어디 쓰이나
정부 예산의 분야별 재정 편성 내역을 보면, 보건·복지·고용에 올해(226조 원) 대비 16조9000억 원(7.5%) 증가한 242조9000억 원이 편성됐다.
일반·지방행정에는 올해 112조2000억 원 대비 9000억 원 감소(-0.8%)한 111조3000억 원이 잡혔다.
다음으로 덩치가 큰 교육 예산은 올해(96조3000억 원) 대비 6조6000억 원(-6.9%) 줄어든 89조7000억 원이 배정됐다.
가장 큰 폭의 예산 감소가 일어난 부문은 연구개발(R&D) 분야다. 올해 31조1000억 원 대비 5조2000억 원이 줄어든 25조9000억 원이 됐다. 예산안 감소 폭이 16.6%에 달한다.
이에 관해 정부는 "그간 R&D 투자가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성과 도출에는 미흡했다"며 "도전과제 대신 나눠먹기식 소규모 R&D 사업이 난립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지난 2018년(19조7000억 원) 이후 올해(31조1000억 원)까지 연평균 R&D 예산 증가율은 10.9%였다.
정부는 이에 "나눠먹기·관행적 지원 사업 등 비효율적인 R&D는 구조조정하고, 도전적·성과창출형 R&D에 집중 투자"하기로 했다고 이번 예산안을 설명했다. 관련해 바이오 분야 연구 프로젝트(KARPA-H)dp 495억 원이, 민간 발사장과 우주환경시험시설 및 특화지구별 거점센터 구축에 100억 원이, 반도체 첨단패키징과 차세대 이차전지 관련 지원에 600억 원이 각각 신규 책정됐다.
하지만 이에 관한 과학계와 기술계 반발이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장기 한국 기술 경쟁력의 바탕이 될 과학분야에 가장 큰 폭의 삭감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의 격변이 이뤄져 기술 격차가 곧 국가 경쟁력이 될 시대에 과학 분야 투자가 줄어드는 데 따르는 과학계 우려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환경(2.5%)에는 올해보다 1000억 원 증가한 8조7000억 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부문에는 올해 대비 1조3000억 원(4.9%) 증가한 27조3000억 원의 예산이 편성됐다. 사회간접자본(SOC)에는 올해 대비 1조1000억 원(4.6%) 증가한 26조1000억 원의 예산이 잡혔다.
국방 예산은 올해(57조 원) 대비 2조6000억 원(4.5%) 증가한 59조6000억 원으로 책정됐다.
내년에도 "건전재정 기조 견지"
정부는 "건전재정 기조를 견지하고 재정을 정상화해 예산의 체질 개선"에 나서겠다고 이번 예산 편성 취지를 밝혔다. 아울러 "정부가 해야 할 일에는 제대로 과감하게 투자"하겠다고 강조했다.
관련해 내년도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생계급여액은 올해 대비 4인가구 기준 21만3000원 인상된 183만4000원으로 잡혔다. 이는 최근 5년간(17~22년) 총 인상액 19만6000원보다 많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주거급여 선정기준은 종전 중위소득 47%에서 48%로 상향해 2만 가구를 추가 지원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장애인 취업 지원을 위해 조기취업수당이 신규 도입되는 것도 변화다. 장애인 연금은 월 최대 40만3000원에서 41만4000원으로 인상됐다.
특히 최근 들어 크게 증가한 노인일자리 부문에는 관련 수당을 6년 만에 2~4만 원가량 인상하기로 했다. 종전 88만3000명 수준이던 노인일자리는 103만 명으로 증가한다. 14만7000명이 늘어나 역대 최대로 노인 일자리가 늘어나게 됐다.
소상공인 대상 새출발기금은 올해 2800억 원에서 내년 7600억 원으로 확대된다. 소상공인의 경영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고효율 냉난방기(6만4000대)와 식품매장 문달기(1만5000대)에는 1100억 원의 예산이 신규 책정됐다.
소상공인 융자 총액은 올해 3조 원에서 내년 3조8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니트(NEET, 무직이면서 취업 활동을 하지 않는 이)족 청년을 대상으로는 발굴‧심리상담‧교육‧온보딩 종합지원 플랫폼(10개소)과 특화형 일경험 프로그램이 신규 지원된다. 대상자 규모는 6000명이다.
저소득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가장학금 지원한도와 대상을 확대하고 대중교통요금 할인을 지원하는 '케이-패스(K-pass)를 신규 도입하기로 했다. 적용 대상자는 177만 명 규모다.
모든 기초생활수급가구 아동은 출생시부터 17세까지 디딤씨앗통장 가입을 지원받게 된다.
에너지 바우처 지원대상 확대
급등하는 에너지 비용에 관한 대응책으로 올해 85만7000가구이던 에너지 바우처 지원대상이 내년에는 115만 가구로 증가한다. 지원단가는 올해 19만5000원에서 내년 36만7000원으로 늘어난다.
중소기업 대상으로 에너지 효율진단 지원이 확대되고 일반가구의 경우 탄소포인트 지원 대상이 250만에서 260만 가구로 증가한다.
정부는 아울러 에너지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주요 광물과 석유 등의 공공비축을 확대하고 국내유전과 해외자원 개발 투자와 융자를 강화하기로 했다.
원전과 관련해서는 원전 생태계 조기복원을 위해 2000억 원 규모의 저리융자와 보증지원이 이뤄진다.
출산율 정책으로는 신생아 출산 가구(출산 2년 내, 23년 이후 출생아)에 총 2조1000억 원 규모의 주택 구입, 전세자금 융자 및 주택 우선공급 지원이 이뤄진다. 신생아 출산 가구의 디딤돌·버팀목 대출 소득요건은 연 소득 7000만 원 이하에서 1억3000만 원 이하로 줄어든다.
자녀 돌봄을 위한 유급 육아휴직 기간은 6개월 연장하고 영아기 맞돌봄 특례 기간은 3개월에서 6개월로, 급여는 상한 300만 원에서 450만 원으로 각각 확대된다.
아빠의 돌봄 휴가 문화 정착을 위해 중소기업 노동자의 배우자 출산휴가 급여기간은 종전 5일에서 10일로 확대된다.
안정적인 보육지원이 가능하도록 정원에 미달하는 어린이집 영아반(0~2세)에는 미달 1명당 62만9000원~23만2000원가량의 보육료가 추가 지원된다.
난임가구에는 남녀 필수 가임력 검진비, 난임시술, 난임휴가 등의 신규 지원이 이뤄진다.
정부가 주도하는 이른바 '노동시장 합리화'를 위해서는 우선 대기업과 하청기업 노동자 간 이중구조 개선을 위해 원·하청 공동복지기금이 종전 10억 원에서 20억 원으로 증가 책정되고 2, 3차 협력사를 대상으로 50억 원 규모의 상생연대기금이 신설됐다.
총 167개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주 2시간 이상 실근로시간을 단축할 경우 월 30만 원의 단축장려금이 신규 지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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