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이초와 경기도 의정부의 한 초등학교에서 유명을 달리한 초임 교사들의 명복을 빕니다. 필자
지난 4일자 <중앙일보>의 김훈 특별기고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는 SNS상에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기고문 중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부를 끌어내 '내 새끼 지상주의'의 표상으로 설정하고 반성도 안 하는 인물로 설정한 때문으로 보인다.
나는 다른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의 글은 사건의 근본 원인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외면했다. 문제의 본질보다는 표피의 묘사에만 열심이었다. 그리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교사들의 '울음'과 '절규'에 올라타 '나쁜 학부모들'이라는 매우 편리하고도 당연한(?) 결론으로 마무리했다. 세상에 대한 일갈 같기는 한데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없다.
그는 '공교육은 죽었다'면서 그 원인으로 '악성 민원'을 꼽았고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이 이 사태의 핵심이자 배후"라고 지목했다.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도심 거리에 모여 교육에 가해지는 학부모 집단의 행태에 절규하고 저항하는 사태는 아마도 세계 공교육 역사상 초유의 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 그의 말마따나 '세계 공교육 역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왜?
'악성 민원' '갑질 학부모'는 누구인가?
우리나라에서 학교는 통제의 역할을 수행하는 교사와 복종의 의무를 가진 학생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당연히 상호 적대적이다. '절대 복종'의 훈육이 그 갈등을 짓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사실 학교문화가 곧 군대 문화이었다. 공간마저도 '군대적'이다.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학교 건물들은 중앙과 좌우측의 현관, 그리고 운동장 사열대 등 그 구조가 실상은 군대 막사다. 과거엔 그 공간을 교련이나 체육 교사 등 남자 선생님들이 훌륭하게 통제했다.
부인하지 말자. 학교는 원래 폭력의 공간이었다. 고교생 시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의 뒷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친 생물선생님에게 '찰나적 살의'를 품기도 했으나 '절대 복종'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 훈육받은 덕에 나는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키 크고 가슴 봉긋한 여학생들은 남자 선생들의 성추행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촌지 문화는 많은 아이들에게 박탈감과 억울함을 느끼게 했다. 권상우가 "대한민국 학교 다 × 까라 그래"라고 울부짖었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보여준 학교는 내가 보고 들었던 학교생활에 비해 오히려 점잖은 편이었다.
많은 이들은 학교에서 물리적, 언어적 폭력과 부조리를 경험했다. 그런데 지금 교사들에게 온갖 '악성 민원'을 날리는 '갑질 학부모'들은 바로 이러한 교육시스템을 경험한 당사자들이다. 경험자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이들이 이제 그들의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다. 옛 경험을 떠올리게 되고 일부 학부모들은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들의 악성 민원은 매우 경험적인 것이기도 하다.
문제의 원인이 오직 악성 민원 하나뿐일까
13일자 <한국일보> 기사가 현 사태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듯하다. 현직 교사들과의 인터뷰 결과 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① 악성 민원, ② 관리자 무책임, ③ 과도한 업무라고 한다. 교장, 교감의 무책임한 태도와 과도한 업무도 악성 민원 못지않게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그런데 이 두 문제는 조직 문제인 관계로 군말없이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악성 민원'이라는 외부 충격이 들어오는 순간 이들은 무방비 상태로 곧 무너지는 것으로 보인다.
김훈의 표현대로 "교육청, 교장, 교감 등 교육의 관리자들은 이 사태의 뒷전으로 물러서 있"기도 하지만 이들은 학부모들의 부당한 민원이 시작되면 "부모에게 사과하라"고 교사들에게 강요해 왔다고 많은 언론이 지적한다. 결국 교사들은 '업무폭탄'에도 시달려야 하지만 '악성 민원'이 발생하면 "허허벌판에 혼자 서서…교장도 믿을 수 없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한국일보> 기사는 초임 교사들에게 담임은 물론 기피 업무까지 떠안긴다고 전한다. 견디다 못해 학교 측에 업무를 덜어달라고 하면 '그 교사는 일을 못해서 못 맡긴다'는 답변만 되풀이한다고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교감이 교사를 괴롭히려면 이렇게까지 할 수도 있구나" 하는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는 서이초 교사나 최근 다시 문제가 된 2021년 의정부의 초등학교에서 6개월 간격으로 생을 마감한 두 교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스물셋, 스물넷, 스물다섯 나이의 젊은 초임 교사들로 모두 담임을 맡았었고 모두 업무 부담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학교 측은 교사 경력이 매우 짧은 젊은(어린?) 교사들에게 어려운 업무들을 맡기고는 집요한 학부모들까지 상대하게 방치했다.
대한민국의 학교를 <동물의 왕국>으로 만들어 놓고는 어려운 업무는 물론 학부모 상대까지 하게 만든 주체는 바로 학교와 교육청, 그리고 선배 교사들이다. 결국 선배들이 어려운 일들은 모두 후배들에게 떠넘기고, 민원 발생하면 뒤치다꺼리는 물론 사과도 떠넘기고 법적 분쟁까지 떠넘기는 것이다. 문제의 시정을 위해 애쓰는 게 아니라 입단속시키고 덮고 넘어가는 게 다반사다. 참으로 비겁하고 무책임한 자들이다. 집회에 참석한 교사들은 교대 교수들도 참석했다 해서 고무적인 듯한데 번지수 잘못 짚었다. 그들도 이 사태에 책임이 큰 자들이다.
그들은 왜 학교를 선택했을까
청소년들은 자살을 결심하기 직전 주변에 신호를 보낸다. 교사나 학부모에게 SOS를 보낸다. 그럼에도 회신이 없으면 그들은 실행에 옮긴다. 그것이 한 서린 복수의 형태일 수도 있고 억울함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번에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는 서이초 교사 사망 후 발표한 성명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느낌'은 자살 위험과 큰 관련이 있다"고 했다. 서이초 교사와 의정부 교사들도 주변에, 특히 학교 측에 수차에 걸쳐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회신이 없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마지막 장소를 학교로 정했다. 혹시 학교에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던 것은 아닐까? 혹시 배신감?
과거엔 소수의 폭력 교사들이 학생들을 훈육하며 학교를 통제했다. 폭력이 통제의 최저선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들이 사라져버리니 속수무책이 됐다. 바로 그 시스템에서 맞고 자란 졸업생들, 학교의 부조리를 12년간 경험한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보호하겠다고 나서는데 감당이 안 된다. 학부모가 교사를 신고하고 고소한다. 왜? 이미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 신뢰를 무너뜨린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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