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명예로운 전쟁' 또는 '정의로운 전쟁'이 있었을까.
대부분의 전쟁연구자들은 '조국방어전쟁이나 민족해방전쟁 말고는' 그런 전쟁은 없다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런 전쟁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는 논쟁사항이다. 거꾸로, '부끄러운 전쟁' 또는 '더러운 전쟁'(dirty war)들이 자주 벌어졌다는 데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더러운 전쟁'의 대표적인 보기가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1840, 1856)이다.
아편전쟁 뒤 더 많은 중국인들이 아편 중독자로 삶이 황폐해졌다. 흔히 '신사의 나라'라 일컫는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인들에게 해를 끼쳤고 홍콩을 빼앗은 것을 사과하지 않았다. 이른바 '문명국가'임을 자부하는 프랑스, 그리고 콩고를 '지옥의 땅'으로 만들었던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사람들이 과거사를 사과하는 모습은 보기 드물다. 오히려 이들은 유럽문명을 미개한 지역에 전했다는 '문명 전파론'을 편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논리나 마찬가지다.
"아편무역까지 정당화할 생각은 없지만, 도대체 무엇을 사죄하라는 것인가. 이 미래지향적인 도시에서 19세기 이야기를 하다니 놀랄 일이다"(오누마 야스아키, <한중일 역사인식 무엇이 문제인가> 섬앤섬, 2018, 201쪽).
1997년 홍콩의 마지막 영국총독 크리스터퍼 패튼이 홍콩 반환식에 즈음한 기자회견장에서 짜증이 섞인 말투로 했던 말이다. '아편전쟁의 비도덕성, 그리고 그 전쟁 뒤 1세기 반에 걸쳤던 영국의 홍콩 점령에 대해 사죄를 할 생각이 없는가' 하는 질문이 나오자, 패튼 총독은 사과는커녕 '영국은 홍콩의 민주제도를 발전시켰다'고 자화자찬했다. 한국의 '신친일파'들이 말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맥락을 같이하는 말이다.
오누마 야스아키(도쿄대 명예교수, 국제법)는 패튼 총독의 말을 옮기면서, 영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도 '일본을 비판하기 전에 자국의 모습을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야스아키 교수에 따르면, 중국의 피해자 의식에 책임이 가장 큰 나라는 일본이고, 그 다음이 영국이다. 다만 일본과의 문제가 워낙 크기 때문에 영국은 뒤에 가려 있을 뿐이다.
중국, 덕으로 원수 갚겠다며 배상 청구 포기?
"반성이나 사죄 요구는 이제 좀 그만하자." 일본의 극우파들이 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에서 들리는 소리다. 이들이 덧붙이는 말들이 있다. "중국은 덕(德)으로 원수를 갚겠다며 배상 청구를 포기했다." "배상하라고 악쓰는 나라가 한국 말고 어디 있는가?" 자료를 뒤져보면, 부분적으론 맞는 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서 일본국에 대한 전쟁 배상의 요구를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 1972년 중국과 일본이 오랜 협상 끝에 내놓은 국교 정상화 공동성명 5항의 문구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배상청구를 포기했다는 말은 맞는다. 하지만 중국 인민들은 청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만주침략(1931)에서 중일전쟁(1937)으로 이어져 1945년 패전으로 끝난 이른바 '15년 전쟁' 동안 숱한 중국인들이 희생됐다. 피해 회복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런 요구다. 하지만 일본은 '공동성명 5항' 때문에 중국 피해자들은 배상 청구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마치 한일협정(1965)으로 한국인들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주장과 판박이다.
많은 국제법 전문가들은 한국은 물론 중국도 '개인 청구권'은 살아있다고 본다. 국가가 배상 청구를 포기했더라도 개인이 포기하지 않는 한,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중국 피해자들은 일본 현지 소송을 걸었고, 오랜 법정투쟁 끝에 일본 기업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냈다. 미쓰비시(三菱) 계열사인 미쓰비시광업을 계승한 미쓰비시 머티리얼은 2016년 6월 중국인 피해자(유가족 포함) 3765명에게 '윤리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사과와 함께 1인당 10만 위안(약 1800만 원)의 배상금을 건넸다.
배상 액수가 많다고 보긴 어렵지만, 중국인 피해자들의 눈으로 보면 오랜 법정투쟁 끝에 이룬 값진 승리였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2020년 미쓰비시 중공업은 중국인 피해자 30명에게 1인당 10만 위안을 건넸다. 중국인들에 대한 일본 전범기업들의 배상 사례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한국만 '악을 쓰며' 배상 요구를 이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비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중국은 되고 한국은 안 된다'는 일본의 '선택적 배상' 태도 탓이 크다.
일본과 너무 다른 독일
전후 처리를 합당하게 매듭지으려면 전범자 처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피해 당사자들, 또는 남은 가족들에게 합당한 배상을 해야 한다. 일본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 국가로 낙인 찍혔지만, 전쟁범죄 피해자에 대한 배상에서 너무 큰 차이를 보인다. 독일은 1970년 12월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을 찾아가 비에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모습이 상징하듯이, 독일은 일찍부터 나치 히틀러 정권의 가혹행위에 대해 나름 진정성 담은 사과와 배상을 해왔다. 홍성필(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관련 글을 보자.
[서독은 1차적으로 1952년 이스라엘과의 룩셈부르크 협정을 통하여 34억 5천만 마르크(DM)을 지불하고, 이어 1956년 연방보상법을 통해 나치에 대한 저항과정에서 박해받은 이들에게 약 679억 DM을 추가적으로 지불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체 배상규모는 2000년도 말 DM 102billion(US $66billion)에 이르게 되었다](홍성필,「일본의 전후책임인식과 이행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충남대 법학연구, 제23권 제1호, 2012년6월, 412쪽).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항. 독일은 유대인 희생자 배상엔 적극적이었지만, 강제노동에 동원 됐던 외국인 노동자 배상엔 오랫동안 모른 체 했다. 독일 정부와 사법부는 물론 나치 독일 당시의 전범기업들도 냉담했다. 유대인 희생자들과는 달리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핑계를 댔다. 여기엔 동서냉전이라는 국제정치의 대결구도가 한 몫 했다. 서독 정부가 폴란드나 체코, 헝가리 같은 동구권 국가들의 피해자에게 배상하는 방안이 얘기될 때마다 미국이 반대했다고 알려진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 그동안 억눌려 왔던 비유대인 피해 소송이 줄을 이었다. 광산, 공장, 농장 등에서 나치 침략정책을 따랐던 독일 기업들은 1998년까지 50여 건의 소송에 휘말렸다. 1999년 말 독일 정부와 기업들은 반반씩 부담하여 피해자 보상을 위한 100억 마르크(52억 달러)의 기금을 모은 뒤 배상이 이뤄졌다. 2001년 오스트리아 정부와 기업들도 외국인 강제동원 및 재산 몰수 피해에 대하여 11억 달러를 내기로 했다(홍성필, 413쪽).
2023년 현재 독일이 나치 시절의 강제노동 피해자 160만 명에게 배상한 액수는 44억 유로(약 62조원)에 이른다. 독일은 이를 '1회성 지급이행'이라 부른다. 단 1회의 지급으로는 회복될 수 없는 피해이므로, 앞으로도 꾸준히 배상을 해나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1952년부터 2022년까지 70년 동안 나치 전쟁범죄 희생자들에게 지급한 배상금은 800억 유로(약 112조 원)에 이른다.
그게 끝이 아니다. 2022년 9월 독일 정부는 전세계에 생존해 있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13억 유로(약 1조 7400억 원)를 추가 배상하기로 했다. 2022년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에서 열린 룩셈부르크 협약 70주년 행사에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사회민주당)는 그런 추가 배상 방침을 밝히면서, '이 협약이 독일인이 자초한 무거운 책임을 청산할 수 없지만, 그 도덕적 책임을 지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돈도 돈이지만, '진정성 담긴 사과'가 듣는 이들의 마음에 와 닿기 마련이다.
일본이 전쟁 피해국?
이렇듯 전쟁범죄 과거사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은 독일과 너무나 다른 태도를 보여 왔다. 독일인들에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잔혹함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일본인들에게 난징 학살이나 '위안부' 성노예를 비롯한 전쟁범죄의 기억은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일까.
많은 일본인들이 독일과 일본은 사정이 다르다는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두 가지다. 첫째, 일본은 독일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과 같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둘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전쟁 피해국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전쟁 피해국? 물론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일본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어마어마한 기록들을 떠올리면, 가해국 쪽이 무게가 훨씬 무겁다. 이런 사실을 좀체 받아들이지 않는 게 문제다. 전쟁범죄의 가해기억은 흐릿하고 히로시마 원폭의 피해기억은 생생하다. 아시아·태평양에서 일본이 일으켰던 침략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적어도 2000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기억의 창고에서 빼내 지운지 오래인 듯한 모습이다.
타이완 여성들의 분노
1995년 일본 정부는 진상 규명과 진정성 담긴 사과를 건너뛴 채 '아시아기금'이란 이름으로 동아시아의 '위안부' 여성 희생자들에게 건네주려 했었다. 제시된 배상금은 피해자 1인당 200만 엔(약 2000만 원). 문제는 일본이 피해 당사자들과 피해국 정부와의 사전 협의 없이 내놓은 일방적 제안이었던 데다,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서 국제사회에다 요란하게 홍보하고 나섰기에 논란을 불렀다. 지난날 전쟁범죄의 법적 책임을 피하려는 수단으로 일본이 '아시아기금'을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따랐다.
한국은 물론 타이완에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커졌다. 타이베이 부녀구원복리사업기금회(약칭 부원회)는 한국의 정의기억연대와 같은 성격의 단체다. 당시 타이완에는 42명의 '위안부'가 살아있었다. 부원회는 '아시아기금'을 거부하면서 일본의 태도를 비판했다. 2017년에 타계한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아라이 신이치(전 이바라키대 명예교수)의 글을 보자.
[(아시아기금은) 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서 활동을 알리고 배상금을 신청할 것을 옛 '위안부'들에게 호소했다. 타이완 사회는 이런 행동에 대해 불쾌해했다. 부원회의 스언메이즈언 회장은 "이 방식은 강간 범인이 배상 책임에서 도망가기 위해 급히 자선가로부터 돈을 모아 피해자에게 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아라이 신이치, <역사화해는 가능한가> 미래M&B, 2006, 90쪽).
타이완은 입법원(한국의 국회)에서의 결의안을 통해 타이완 정부가 피해자 1인당 50만 타이완 달러(일본이 주기로 한 200만 엔과 같은 액수)를 줌으로써, 피해자들이 일본 쪽 돈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또한 한 독지가가 내놓은 기부 물품들이 경매에 붙여졌다. 이렇게 돈이 모아지자, 타이완 정부는 1997년 피해자 1인당 50만 타이완 달러를 건넸다.
"강간은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그때 한국에서도 일본 돈을 받느냐 마느냐로 논란이 컸다. 정신대대책협의회(지금의 정의기억연대)는 '일본 정부가 사실 규명 없이 피해 당사자들에게 진정성 담긴 사과를 하지 않은 채 주는 돈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몇몇 할머니들은 돈을 받았고, 이를 둘러싸고 할머니들 사이에서도 입씨름이 오갔다.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인 1998년 4월, 시민단체들과 뜻을 같이 한 한국 정부는 정신대대책협의회의 모금을 더해 '위안부' 할머니 186명에게 1인당 3800만 원을 지원했다. 그러면서 정부 성명을 냈다. '일본정부는 아시아기금 활동을 중지하고,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를 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이었다. IMF 사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금 정부와는 결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8년 10월8일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통절한 반성과 진심의 사죄'를 나타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 속에 일본의 '아시아기금'은 2002년5월 활동을 멈추었다. 기금의 실무자는 그해 연말 참의원 공청회에서 생존중인 피해자의 40%(364명)만이 기금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 대부분은 필리핀 할머니들이었다. 364명 가운데 네델란드 할머니 79명은 돈이 아닌 '의료 복지사업' 명목으로 '배상'을 받았다(아라이 신이치, 93쪽).
진상 규명과 피해자의 동의 없는 일본의 일방적 돈 공세는 혼란과 불신을 부른 채 막을 내렸다. 스즈키 유코(전 와세다대 교수)는 일본의 여성사, 사회운동사 연구자다. '한일 여성과 역사를 생각하는 모임' 대표로 있으면서 1990년대 초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스즈키 대표는 일본 정부가 '아시아기금'으로 전쟁범죄를 입막음하려는 태도를 이렇게 비판했다.
[처음부터 '위안부' 범죄는 명백한 성범죄, 전쟁범죄, 국가범죄이다. (진정한 사죄와 진상규명 없이, 국가는 팔짱을 낀 채) 민간기금을 자원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은 본질을 벗어나도 심하게 벗어났다. 마치 강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갑자기 '지원금'이니 '위로금'이니 하는 명목으로 돈을 들이대면서 '강간'은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스즈키 유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젠더> 나남, 2010, 117쪽).
2015년과 2023년 외교참사의 공통점
지난 2015년 12월28일, 한일 외교 장관(윤병세, 기시다 후미오)이 공동기자회견에서 밝힌 일본군 '위안부' 합의도 '아시아기금'과 마찬가지로 많은 논란을 불렀다. 합의의 핵심은 일본이 10억 엔의 자금을 내고, 한국은 피해자를 위한 재단을 세워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이 합의의 성격은 10년 전 '아시아기금'보다 더 좋지 못했다. 일본이 전쟁범죄에 대한 진상규명과 진정성 담긴 사과 없이, 피해자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도 생략한 채, 관련 합의문서도 공개하지 않고 공동기자회견이라는 '외교적 꼼수'를 부렸다는 점에서다.
박근혜 정부가 일본의 술책에 넘어갔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했다. 결국 문재인 정부 들어 '위안부' 합의는 파기됐다. 이로써 한일 갈등과 불신은 더 깊어진 상황이다. 일본은 '우리도 할 만큼 했다. 약속을 어긴 건 한국'이라는 명분을 챙겼다. 후세의 역사가는 이를 두고 한마디로 '무능한 박근혜 정부의 외교 참사(慘事)'로 기록할 것이다. 장혜원(이화여대 법학연구소 국제인권법연구센터) 연구원의 글을 보자.
['위안부합의'는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 그 어느 것 하나 만족할 만한 수준의 합의라고 말하기 어렵다. 더욱이 합의를 수용하는 국민의 대중적 여론은 더더욱 냉담하기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합의'는 다수의 한국인 피해자들에 의해 거부된 1995년의 '아시아 여성기금'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측면을 보이며, 오히려 더 후퇴한 것이기도 하다. 합의 과정에 피해자의 의사가 배제된 정부 간 타협에 의한 합의는 진정한 의미의 합의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장혜원,「2015 '위안부합의'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국제법적 의미」이화젠더법학 제10권, 제2호, 2018년 8월).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활용 못했다"
2015년 '위안부' 합의에 이어, 2023년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 해법'은 또 다른 외교참사를 기록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둘 다 피해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정부 주도 아래 이뤄진 밀실 해법이란 공통점을 지녔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세종대 독도연구소장)의 비판.
"결론적으로 '위안부'는 성노예였다. 그러므로 일본정부는 그 범죄성을 우선 인정해야 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에서는 일본 정부가 이런 범죄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10억 엔이란 돈으로 유야무야 사건을 해결하려고 시도했을 뿐이다. 한국(정부) 측은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을 무시해 일본 측과 밀실로 합의안을 만들어 합의를 강행했다"(세종대·호사카유지, <일본의 위안부문제 증거자료집1> 황금알, 2018, 369쪽).
호사카 교수는 2023년 한국정부의 제3자 변제안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함에도 피해자의 동의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일본의 사전 동의도 없었다.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해 일본에 알린 것이며 이에 일본은 '높이 평가한다'고만 응답했을 뿐 합의서도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을 상대로 한 '위안부' 협상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고 호사카 교수가 지적한 대목은 귀 기울일 만하다. 한국의 연구자들, 그리고 일본의 자성사관(自省史觀)을 지닌 양심적 연구자들은 '위안부'를 비롯한 여러 유형의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관련된 실증적 조사를 벌여왔다. 이미 그 노력의 성과물로 상당히 많은 학술논문·보고서·책들이 나와 있다.
그 속에는 일본의 전쟁범죄 기록과 의미, 평가들이 담겨 있고, 무엇보다 피해자들을 배려하는 바람직한 해결책까지 제시돼 있다. 한국 정부는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힘써 이뤄낸 연구 성과물들을 정책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을 덜어주고 전범기업들을 편안하게 해준 셈이 됐다.
"과거사 반성에 '본심'이 없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는 이제 끝난 문제라고 여긴다. '위안부' 합의 다음해인 2016년 10월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신조 총리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 편지를 쓸 것인가에 대한 질의를 받자, "합의한 내용 외의 것은 우리 측으로서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매몰차게 답했다. 과거사를 둘러싼 아베의 역사인식은 딱 그 수준까지였다. 지금의 일본 총리이자 2015년 외무장관으로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냈던 기시다 후미오도 아베와 다를 바 없다.
<妄言の原形>을 쓴 역사학자 다카사키 소지(쓰다주크대교수, 한일근대사)는 일본인들의 과거사 '반성'(사과)이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까닭은 그 '반성'에 '본심'(진심)이 담겨 있지 못하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풀이한다(그러면서 다카사키 교수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일제 강점기 기간에 벌어진 피해와 전쟁범죄를 포함한 식민지배를 사죄한다는 결의안이 일본 국회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일관계에서 조선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인의 '반성'이 거듭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 측의 '반성'이 본심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일 양국의 정부 지도자들이 잘 알고 있고, 한일 양국 국민도 많든 적든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다카사키 소지, <일본 망언의 계보>, 한울, 2010, 244쪽).
슐링크, "피해자가 용서의 주체다"
'일본의 침략전쟁과 그 전쟁으로 비롯된 범죄를 이제는 용서하고 화해하자'는 말들이 들린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제는 털고 넘어가자는 뜻이다. 좋은 얘기다. 화해를 하려면 용서를 먼저 하는 게 순서다. 그렇다면 용서를 누가 할 것인가. 가해자가 아닌 제3자가 용서를 할 수 있을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피해자가 아닌 제3자가 나서서 '반성이나 사죄 요구는 이제 좀 그만하자'고 나설 수 있을까.
이와 관련, 2009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널리 알려진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1995)를 쓴 베른하르트 슐링크(전 훔볼트대교수, 법학)의 '용서'에 대한 분석은 참조할 만하다. 1944년생인 슐링크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지식인이다. 한국 최초의 국제문학상으로 전세계 소설가를 대상으로 하는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뽑혀 2014년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다.
슐링크는 소설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전공은 법학이다. 대학교수와 헌법재판소 판사를 지냈다. 지난날 나치의 전쟁범죄를 겪은 독일 출신답게 국가가 저지른 범죄와 과거사 청산에 관심을 쏟았다. 그의 책 <과거의 죄>(2007)는 국가범죄를 주제로 삼아, 특히 나치 히틀러 정권과 옛동독 시절에 저질러졌던 범죄에 대한 법적·도덕적 책임을 다루었다. 여기서 슐링크는 죄를 저지른 자들의 용서 문제와 관련, '용서를 누가 하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책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 하나. 나치 강제수용소에 배치됐던 친위대 소속 군인의 손자와 강제수용소 희생자의 손자(유대인)가 만나는 장면이다. 친위대 군인의 손자는 할아버지의 과거를 알고난 뒤 속죄를 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집단농장인 키부츠에서 일을 한다. 그곳에서 강제수용소 희생자의 손자인 한 유대인 소년을 만나지만, 그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 유대인 소년도 할아버지의 희생을 알고 나서 겪게 된 트라우마를 그 독일 소년 탓으로 돌릴 수 없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두 소년 모두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거나 용서할 입장이 아니다. 슐링크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피해자만이 용서를 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기에는, 용서를 요구하기에는, 보상을 둘러싼 협의와 협정에서 전략적·전술적 이점으로 용서를 사용하기에는, 용서는 너무 실존적이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도, 용서할 권리도, 범죄자와의 관계에서 오직 피해자가 갖는 권리이다.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범죄자 가족들도, 후손들도, 친구들도, 더군다나 정치가들이 용서를 구할 수는 없다. 용서 받지 못하는 범죄자와 범죄자를 대신해서 용서를 구할 수 없는, 그의 죄에 연루된 사람들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세상은 용서되지 않고, 용서될 수 없는 죄로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의 세상을 제외하면] (베른하르트 슐링크, <과거의 죄> 시공사, 2015, 200쪽).
용서란 말이 공허하게 들릴 때
슐링크는 거듭 '용서가 너무 실존적'이라 말한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일본의 정치인들이 '무라야마 담화'를 들먹이며 '계승하겠다'고 말하듯) '정치적 의례가 되어 버리기엔' 용서가 너무 실존적이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1970년 폴란드 유대인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듯이) '정치가들이 대중에게 자신들의 인간적이고 고뇌에 찬 모습을 보이는 기회로 사용'하기에도, 용서는 너무 실존적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공허하게 들릴 때가 잦다는 게 문제다.
[내무부장관은 외국에서 자국의 축구팬(훌리건)들이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추기경은 자기 밑에 있는 사제들이 아이들에게 입힌 고통(성추행)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경찰서장은 경찰관들이 업무 수행중 보인 만행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말하는 용서가 공허하게 들린다](베른하르트 슐링크, 199쪽).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용서를 구한다고 말할 때, 슐링크는 그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분명히 감독이나 관리를 잘못한 죄가 있는데도, 마치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듯이 가볍게 말하기 때문이다. 일본 총리가 '사죄'라는 보다 직설적인 용어 대신에 '담화의 계승'이란 편리한 용어를 밥 먹듯이 남발할 때마다 우리 귀에 공허하게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글을 매듭지어야겠다. 한·중·일 3국의 역사학자들이 '역사 화해'를 모색하며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2005)를 내는 등 동아시아에서 '화해' 얘기가 나온지도 제법 됐다. 한·일 두 나라의 화해, 좀 더 범위를 넓혀 동아시아의 화해를 위해선 '용서'라는 길목을 지나야 한다. 용서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진상규명, 그에 합당한 배상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뤄질 것이다. 피해자(또는 그 유가족)가 아닌 제3자가 이래라 저래라 용서와 화해를 말할 수 없다. 슐링크도 지적했듯이,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는데 정치가들이 용서를 말할 수는 없다. 용서를 할 권리, 또는 용서 안 할 권리는 피해자의 몫이다.
일본은 지난날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과거사'란 애매한 이름표를 붙여 진공 포장한 채로 21세기 오늘에까지 시간을 끌어왔다. '용서' 절차를 건너뛴 일본이 맨입으로 '화해'를 말하는 사이에 '용서'를 못한 피해자들은 하나둘씩 눈을 감았다. 한국의 생존 '위안부' 할머니는 이제 9명뿐이다. 일본이 전쟁범죄의 피해 당사자들로부터 용서를 받을 기회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일본 극우파들은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자들을 제신(祭神)으로 모신 야스쿠니 신사 안팎을 들락거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패전 뒤 도쿄재판은 정치재판이었어. 우리가 이겼다면 법정 피고석엔 다른 자들이 섰을 거야." 곰곰 따져보면,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도쿄 공습(1945년 3월)이나 원자폭탄 두 방으로 많은 비무장 민간인을 죽였던 미국 지도자들은 전범재판을 받지 않았다. 드레스덴 공습(1945년 2월)을 비롯, 독일 주거지역을 파괴했던 영국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전범재판은 '승자의 재판'일 수밖에 없는가. 다음 토요일엔 이 물음을 놓고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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