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사슬재의 비극
한반도의 허리춤에 깊숙이 꽂힌 포탄
그 서슬에 제일 먼저 목숨을 잃은 건
군인도 경찰도 아니었다.
인민군의 남하에 짓밟힌 민간인
국난의 땅이었던 섬은 여전히 고난 앞에 놓인 저어새였다.
저 시커먼 갯벌에 무엇이 있을 줄 알고.
쌀독의 밑바닥은 컹컹 쇳소리로 짖었지만
적들 앞에 감자를 캐 내놓아야 했던 사람들
그 감자 캐낸 골골마다 피 흘러넘칠 줄 꿈에도 모르고.
숨죽인 채 연명했던 그들 앞에
드디어 구원군이 왔다.
눈물범벅으로 맞이한, 내 편이라 믿었던 그들
한 마을에서 자란 익숙한 얼굴들이
벌게진 눈으로 동무를, 이웃 아재를,
엄마 손에 매달린 어린아이와 노인을
구덩이에 밀어 넣고 청솔가지를 덮어 태웠다.
연기 사이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인민군에게 내어준 감자가 빨갱이의 증거라니.
어느 편에 섰어야 했나
그저 살기 위해 조심조심 디뎠던 까치발
그대로 구덩이에 처박혔다.
너덜너덜 살점 떨어져나간 썩은 감자처럼
향토방위특공대는 양민들을 줄 세웠다.
결박한 몸뚱이를 사슬처럼 이어서.
금줄에 매단 붉은 고추처럼
사슬 하나마다 빨갛게 터진 몸
어쩌란 말인가
인민군은 국군부역자라고 탕!
돌아온 군경들은 인민군부역자라고 탕!
올가미를 씌워 밤낮으로 죽음을 채웠다.
천여 명의 비명이 묻히고
산목숨엔 재갈이 물렸다.
유골도 없이 땅에 누운 돌 위패들
죽어서도 두려워
학살지에서 멀리 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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