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불타고 있다. 방송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기후위기'를 말한다. 유튜브에 나온 전문가들은 자칫하면 인간이 멸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한편 인구가 줄고 있다고 그래서 경제가 망하게 생겼다고 호들갑을 떤다. 많은 인구는 결국 생태학적 재앙임에도 모두가 출산율저하를 걱정한다. 인구증가를 생각하는 동시에 기후위기도 걱정하는 정신적 분열상태,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말한 '이중구속(double bind)' 상황이다. 그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은 이런 이중구속의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현대인의 정신분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영화 <돈룩업>(아담 맥케이 감독, 2021)이다. 지금 누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할 때 사람은 주저하고 결단을 미룬다. 결국 더 큰 파국이 도래하게 된다. 그래서 과감하게 성장을 포기하자고 말하는 사이토 고헤이의 책 <지속불가능 자본주의>(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펴냄)를 펼쳤다.
사이토 고헤이는 임박한 환경재앙을 향해 직진해 들어간다. 선진국의 진보적 시민들이 벌이는 비닐봉지 안쓰기, 페트병 사용 안하기 등에 대해서 "당신의 그런 선의만으로는 무의미할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작은 실천으로 세상을 바꿀 시기는 지났다고 본다. 그는 이제 생태주의 사회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생태주의 사회혁명의 사상적 기초를 마르크스에게서 찾는다. 그에게는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생태학적 재앙을 극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알던 마르크스와 저자가 말하는 마르크스는 많이 다르다. 그가 말하는 마르크스는 어떤 사람일까?
마르크스주의는 소련 해체 이후 한동안 공론장에서 사라졌다. 소련은 마르크스 사상의 종언을 상징했다. 사회주의권의 궁핍함은 서방의 풍요함과 곧잘 대비되었다. 기존의 사회주의는 성장과 발전을 최종 목표로 했다. 풍요로운 사회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소비주의에 매몰된 관점이었다. 더 많이 소비하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는 생각에 모두가 사로잡혀 왔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비센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이들은 선진국의 여유있는 삶은 제3세계 글로벌 사우스에서 자원과 에너지를 수탈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들은 선진국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제국적 생활양식'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제국적 생활양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국적 생활양식이란 간단히 말해 글로벌 노스의 대량생산·대량소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제국적 생활양식은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실현해주기 때문에 보통 바람직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글로벌 사우스의 사회집단과 지역에서 벌어지는 수탈,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의 대가를 글로벌 사우스에 떠넘기는 구조가 존재한다" 책에서는 방글라데시, 인도, 브라질 등의 노동자가 겪는 다양한 노동실태를 예시한다. 두 사람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새로운 계급투쟁>(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자음과 모음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사실상의 노예제의 체계적 확산은 참사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의 결과다." 지젝에 의하면 400만 명이 희생된 콩고내전의 실질적 배후도 미국과 프랑스였다고 한다. 사회학자 슈테판 레세니히는 갈등, 비용을 먼 외부로 전가하는 선진국 사회를 일컬어 '외부화 사회'라고 부른다. 서구의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활은 비서구의 고단한 삶이 지탱해주었던 것이다. 서구의 좋은 삶이 있고 비서구의 힘든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후자의 희생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저자는 현재를 "외부가 모두 소진된 시대'라고 진단한다. 세계체제론자 월러스틴도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발전에는 외부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내부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외부의 노동력, 천연자원, 환경 등 이 모든 것들이 드디어 한계에 이르고 있다. 외부를 이용해 온 지금까지의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선진국이 파괴한 외부 중 특히 중요한 것이 환경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환경파괴가 전지구적 생태위기를 초래했다. 자본주의의 내재적 원리로서 외부수탈과 환경의 문제를 19세기에 간파한 사상가가 마르크스였다. 우리가 알던 마르크스가 아닌 원숙기의 마르크스다. 저자는 생태위기 극복을 위해 우리가 몰랐던 만년의 마르크스를 소개한다. 자본1권을 쓰고 나서 십수년에 걸쳐 마르크스는 생태주의와 주변부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수많은 연구노트가 이제야 출간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연구노트를 기초로 한다.
마르크스는 생태연구 중에서도 특히 토양의 양분이 고갈되는 농업문제를 심도 있게 고찰했다. 마르크스는 동시대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약탈농업비판'을 참조했다. 곡물이 만들어지기 위해 흡수된 양분만큼의 무기질이 토지에 되돌려져야 한다. 그래서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토양의 양분순환이 중요하다. 이것을 리비히는 '보충의 법칙'이라 불렀다. 곡물의 생산량만큼 토질은 피폐해진다. 특히 농민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사람들의 배설물은 농지가 아닌 하천으로 버려졌다. 현대인은 20세기에 발명된 화학비료를 떠올리며 이미 해결된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료의 제조공정에는 막대한 화석연료가 사용된다. 토지를 위한 비용이 다른 쪽으로 전가되는 것이다. 21세기의 환경문제 돌파를 위한 중요한 전기라고 생각되는 전기차의 경우도 배터리의 핵심광물인 리튬채굴에는 막대한 양의 지하수가 사용된다. 최근 발표된 서울대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원인이 무리한 지하수채굴에 있다고 한다. 이래저래 우리가 친환경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환경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킬 수도 있다. 현재 많은 친환경정책들이 결국에는 비용을 다른 부분으로 '전가'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책에는 이 전가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이 예시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농학자 카를 프라스도 연구했다, 프라스는 고대문명들의 붕괴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문명의 붕괴에는 과도한 '산림벌채'라는 공통된 원인이 있었다. 산림벌채가 마구잡이로 이루어져 지역의 기후가 변했고 그에 따라 토착농업이 힘들어져 문명이 붕괴했다는 설명이다. 프라스는 산림벌채가 야기한 기온상승과 대기의 건조화를 특히 경고했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 출간 이후 여러 과학자들의 최신 연구를 접하면서 생산력 지상주의를 벗어나 생태사회주의를 구상했다. 이런 사실은 마르크스에 의해 정립된 진보사관을 위태롭게 만든다. 자본주의를 경유해야만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는 공식은 기초부터 흔들린다. 자본주의는 유럽에서 발원·발전했다는 관점은 은연중에 유럽중심주의를 퍼뜨렸다. 이제 유럽중심주의도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서구는 더 이상 글로벌 사우스가 따라야할 모범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생태주의 과학을 접하고 생산력 지상주의와 유럽중심주의를 탈피하여 노선을 전환한다. 자본론 초판에 "산업적인 선진국은 산업적인 후진국에 언젠가 그들이 도달하게 될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라는 지독하게 유럽중심주의적 문장을 쓴 마르크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주의를 추구하게 된 마르크스는 어떤 사회를 그렸을까? 최근에 집중적으로 연구되는 마르크스 연구의 중심에는 '커먼'(common)개념이 있다. 우리말 공(共)에 해당하는 말이다. 공유지는 커먼즈(commons)라 불린다. "커먼은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부를 가리킨다." 커먼의 개념을 경유해 시장근본주의 미국형 신자유주의와 국유화기반 소련형 사회주의를 극복할 제3의 길이 도출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커먼을 단순히 토지나 천연광물 등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다. 지젝은 문화, 외부자연, 내부자연, 인간 그 자체의 네가지 커먼을 열거한다. 저자에 따르면 코뮤니즘은 지식, 자연환경, 인권, 사회 등 자본주의에서 해체되어 바린 커먼을 의식적으로 재건하려는 시도다. 마르크스는 커먼이 재건된 사회를 가리켜 어소시에이션(associaotion-노동자 상호부조)이라 불렀다. 어소시에이션은 원래 칸트에 의해 상인자본을 배제시킨 생산자들의 협동조합을 의미했다. 마르크스에 와서는 일과 생활을 공유하는 작은 공동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을 가라타니 고진은 사회주의의 미래라고 주장한다. 철학연구자 이정은은 논문 <자본주의의 철학적 트로이 목마>에서 이렇게 어소시에이션을 평가한다. "마르크스에게 소생산자의 어소시에이션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인간적, 자연적 대안이다. 후대인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이론도 스탈린식 사회주의로 왜곡하기도 했는데 어소시에이션은 이런 측면을 교정할 여지를 지닌다."
마르크스는 사회변혁의 경로에 대해서 러시아 혁명가 자술리치에 보내는 편지에서 설명하고 있다. 당시 러시아에는 '미르'라는 촌락공동체가 있었다. 전근대적인 농촌공동체는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운명공동체다. 일종의 자연발생적 어소시에이션인 것이다. 러시아 혁명가들 사이에서는 이 촌락공동체를 확대해 자본주의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다. 그 가능성을 믿었던 이들이 나로드니키다. 자술리치는 마르크스에게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반드시 경유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답장을 저자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 담긴 역사적 분석이 어디까지나 '서유럽에 한정되어 있다'고 답장에 분명히 밝혔다. 근대화를 추진하여 굳이 러시아에 남아 있는 공동체를 파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확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를 집어삼키려 하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공동체는 자본주의에 저항할 중요한 거점이 될 것이다. '현재의 기초 위에' 서유럽 자본주의의 긍정적 성과를 흡수하면서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이 코뮤니즘을 실현할 기회가 되리라고 마르크스는 편지에 적었다."
저자는 생태주의 사회를 마르크스의 사상으로부터 이론적으로 유추하지만 혹시 역사 속에서 그런 문명을 구축했던 사례는 없었을까? 만약 실재했었다면 그 역사적 사실을 저자가 추론하는 생태주의문명과 비교해보면 시사점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완벽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문명은 실재했다. 넓게는 동아시아 좁게는 조선이다. 동아시아에서 17세기 초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거의 두배의 인구증가가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례적인 증가였다. 이런 인구증가를 가능하게 했던 시스템이 동아시아 유교소농체제였다. 역사학자 미야지마 히로시에 의하면 동아시아의 근세는 소농사회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농사회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농사회라는 것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리거나 간에 기본적으로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독립적인 농업경영을 행하는, 그러한 소농의 존재가 지배적인 농업사회를 지칭하는 말이다."(<나의 한국사 공부>(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너머북스 펴냄) 인구의 비약적 증가는 곧 경제의 성장을 의미하고 경제 성장은 쉽사리 환경파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동아시아와 조선의 경우는 어땠을까?
김상준 경희대 교수는 책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김상준 지음, 아카넷 펴냄)에서 동아시아의 환경친화적 농업을 지력약탈적 농법과 대비되는 지력보호적 농법 즉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농법'이라고 말한다. 책에는 미국 농림부의 고위관료였던 프랭클린 킹 박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1909년 9개월간 조선, 중국, 일본을 차례로 방문해서 연구일지를 남겼다.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해서 그의 연구는 오랫동안 묵혀 있다가 2004년 출간되었다.(한국어 번역본 <4천 년의 농부>(프랭클린 킹 지음, 곽민영 옮김, 들녘 펴냄) 킹 박사는 서양의 농법이 지력약탈적이고 반환경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중일의 지속가능한 유기농법을 발견하고 매우 놀란다. 김상준은 그의 놀람을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한중일의 농부들이 '질소가 풍부한, 잘 숙성시킨 유기물 거름'을 대량으로 만들어 땅과 작물에 공급하여 지력을 보호하면서, 사이짓기(간작), 섞어짓기(혼작), 돌려짓기(윤작) 등의 방법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한 치, 한 틈도 낭비하지 않고 근면하게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농학자로서 탄복했던 것이지요." 킹 박사는 자신의 책 서문에 이런 글을 적고 있다. "중국과 조선, 일본이 모두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좁은 땅에서 삶을 지속시켜왔는지를 완벽하게 설명만 할 수 있다면, 이로부터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산업적·교육적·사회적 시사점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전례가 없이 증가하는 인구를 환경 파괴없이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동아시아에는 있었다. 그런데 이런 하부구조의 생산력은 저절로 생긴 것일까? 이런 시스템이 수백년간 지속되는 데에는 상부구조 즉 정치체제의 안정성이 큰 역할을 했다. 그 상부구조는 주자학이었다. 소농체제와 주자학의 조응에 대해 역사학자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렇게 설명한다. "소농사회의 성립은 단순히 농업의 형태와 촌락의 구조를 크게 변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구조와 국가의 지배형태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구조 중 가장 핵심적 특징은 무엇일까? 미야지마는 '민중의 균질화'라고 한다. 이것은 특정 지역에서 배타적 권력을 행사하는 신분제계급의 완전한 퇴조를 의미한다. 균질화를 전제로 주자학의 '일군만민'(一君萬民)이 주창된다. 군주 아래 모든 이가 동등하다는 일군만민은 민중의 균질화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하기 어렵다. 균질화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완비된다. 관료와 관료예비군인 양반을 주자학으로 포섭해냄으로써 체제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의 경우 이 모습이 매우 명징하게 드러난다. 김용옥은 어디에선가 주자학을 공무원인 양반관료를 위한 '윤리교육'이라 정의내린 적이 있다. 정치적 권력을 가진 집단의 내적 규율을 위해 수양이 필요하다. 노동당의 권력이 강고한 북한에 품성론이 등장한 것과 흡사하다.
저자가 묘사하는 탈성장 코뮤니즘사회와 조선은 생태주의·환경파괴 없는 성장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정치 시스템에서는 달라 보인다. 민중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고진, 촘스키, 네그리 등의 사상가들은 권력의 집중을 우려한다. 이들은 권력 행사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민주적이고 적으면 적을수록 반민주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상식 수준의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균질적인 조선 사회가 왜 그토록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사회 전체를 조율하고 주도하는 권력의 중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권력을 정의롭고 유능하게 행사하는 핵심세력이 없이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 사회를 상상하는 일에 있어 '권력' 개념을 좀 더 세심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피하고 없애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자원배분과 갈등해결은 오히려 요원해질 수 있다. 실질 GDP 2만 달러의 쿠바와 갱단 천하의 아이티의 차이는 유능하고 정통성 있는 권력의 존재유무에 있는 것은 아닐까? 탈성장은 필연적으로 성장둔화를 초래할 것이다. 파이의 축소는 파이를 향한 갈등을 더욱 격화시킬지도 모른다. 탈성장 코뮤니즘 사회에서는 권력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 사회의 설계에 있어서 권력에 대한 우리의 편견부터 버리고 새로운 권력이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권력 개념을 한국 출신의 탁월한 철학자 한병철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이 핵심을 가지지 않고 분산될수록 바람직하다는 지식인들과 달리 한병철은 <권력이란 무엇인가> (한병철 지음 김남시 옮김, 문학과 지성사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권력의 시대로부터 급속하게 멀어지고 있다. 권력은 단 하나의 목소리에 절대적 타당성을 부여할 때 가장 빛난다."
필자는 탈성장 코뮤니즘이 설렁설렁 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환경재앙, 자본주의의 위기가 맞물려 미증유의 혼란이 도래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시스템을 포함한 상부구조 전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상부구조 개혁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 권력의 개념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권력이 출현해야만 저자가 말하는 탈성장코뮤니즘에 연착륙할 수 있을 것이라 필자는 판단한다. 환경문제는 결국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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