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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의 각성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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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동일의 각성 과정

[탈춤과 나] 민족문화의 재평가와 재창조 긴요

다음은 지난 6월 29일 민족미학연구소 주최로 부산대에서 열린 '1970, 80년대 민속극 부흥운동의 전개 양상과 사회문화적 배경, 그리고 생성미학적 접근'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의 탈춤 부흥과 관련한 회고담이다.

서울대 불문과 학생이었던 조 교수는 3학년 때인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민족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이후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특히 1963년 11월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개최된 <향토의식 초혼굿>에서 조동일이 쓰고 제작, 기획한 <원귀 마당쇠>가 공연됐는데, 이에 대해 그의 사상적 동지였던 김지하 시인은 "<원귀 마당쇠>야말로 민족문화운동의 원조이자 남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다음 해인 1964년 5월 20일 한일협정 반대를 위한 서울대 시위('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김지하 시인은 조사(弔辭)를 썼고, <원귀 마당쇠>가 다시 공연됐다.

조동일 교수는 오늘날의 사상적 혼란에서 벗어나 민족적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철학을 확립하고 세계적 시야에서 탈춤 등 민족문화의 핵심적 중요성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편집자

1.

1958년 대학 진학할 때 불문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문학창작을 잘하려면 불문학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문학 공부는 그림을 그리는 데도 많이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다. 불어를 익혀 작품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날개가 생겨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영어와 독어 독서도 곁들여 더욱 자랑스러웠다.

1960년 4.19가 일어날 때 3학년이었다. 시위대 선두에 서서 경무대까지 갔다. 내 하숙방에서 모의가 있었다고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거사 당일 아침에 강의를 듣고 있다가, 연락이 오자 일어나서 학생들에게 함께 나가자고 했다.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발포할 때 총에 맞아서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땅에 엎드렸다가 가까스로 물러났다. 시청 앞까지 오니 시위 군중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한 광경이 벌어졌다. 아침에 나설 때는 생각하지 못한 결과였다.

거사가 성공해, 역사의 대전환이 진행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미래를 바람직하게 창조해야 하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때의 과제를 안고 지금도 분투한다.

2.

4.19는 농촌운동으로 이어졌다. 대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노력 봉사를 해서 어려움을 덜어주면서 농민의 처지를 이해해 공감을 다지고, 농민이 각성해 항거를 일으키도록 하려고 했다. 5.16 이후에는 학교에서 인정하는 공식 기구 향토개척단을 만들어 농촌운동을 지속시키면서, 온건 노선을 표방해 충돌을 줄이고 기반을 넓혀갔다.

1963년 11월 19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정에서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이 주최한 '鄕土意識 招魂굿(행토의식 초혼굿)'이 열렸다. 내가 제안해서 하게 된 행사이다. 풍물치고 굿을 하면서 탈춤을 추는 최초의 대학 축제를 만들어, 농촌운동이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도록 촉구하고자 했다.

행사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첫 순서로 농촌을 걱정하는 교수들의 강연을 들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창작한 "신판 광대놀이" <원귀 마당쇠>를 공연했다. 연극이 끝난 뒤에 모두 밖으로 나가 "나가자 역사야"라는 구호를 내걸고 한바탕 놀이를 벌였다. 1 향토의식 소생굿, 2 사대주의 살풀이, 3 난장판 민속놀이, 4 조국발전 다짐굿을 했다. 풍물을 치고 뛰놀면서 격문을 읽고 구호를 외쳤다.

<원귀 마당쇠>는 내가 직접 등사판에 긁어서 찍어냈다. 고맙게도 그것을 아직까지 간직한 분이 있어 복사본을 받을 수 있었다. 컴퓨터에 입력한 것도 함께 보내주었다.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누구나 볼 수 있게 한 다음, <탈춤의 원리 신명풀이>(2006)에 수록하고, <조동일 창작집>(2009)에 다시 내놓았다.

3.

<원귀 마당쇠>는 탈을 쓰고 춤을 추면서 공연하는 연극이었다. 새로운

탈춤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김천흥 선생에게 탈춤 동작을 배웠다. 탈은 탈춤에서 쓰는 것들을 본떠서 내가 만들었다. 탈춤의 원리를 이어받아, 등장인물이 관중과 대화를 나누도록 했다.

마당극은 아니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당의 실내 무대에서 공연했다. 막이 열리면 무덤이 몇 개 있고, 무덤을 열고서 원귀 마당쇠가, 이어서 변학도가 나타나도록 했다. 얼마 뒤에 팔뚝이·찔둑이·꺽달이라는 원귀도 나타났다. 마당극으로 공연하면 분위기가 너무 산만해 관심을 모을 수 없고, 원귀가 갑자기 출현하는 극적 장면을 만들기 어렵다고 판단해 실내로 들어갔다. 현대극과 탈춤을 합친 방식이 되었다.

<흥부전>을 개작해 만든 두 번째 작품은 지금 문예진흥원 건물인 서울대학교 본관 앞에서 공연하고 계단을 이용했다. 그것이 최초의 마당극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연을 맡았던 이영윤이 그것을 다시 공연하다가 화를 입기까지 했다. <원귀 마당쇠>의 한 대목을 보자.

변학도 : (무덤 B의 뚜껑을 활짝 열고 튀어나와서) 네 이놈! (벼락같이 호령을 한다) 네 이놈! 천하에 이렇게 무엄한 놈이 어디에 있느냐! 이놈을 그저! 이 죽일 놈아! 네 모가지가 열 개라도 너는 살지 못할 것이다! 이놈을 그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린다.) 이 개돼지 보다 못한 놈아! 눈이 있거든 내가 누군지 똑똑히 보아라!

마당쇠 : (변학도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허허! 이런 일도 있어!

변학도 : (씩씩거리며) 이놈아! 내가 너희 고을 부사 변학도란 말이다. 이 무엄한 놈아! 네가 아무리 상놈이라고 하더라도 나를 못 알아보다니!

마당쇠 : 못 알아볼 리가 있어. 너를 지금까지 찾아 다녔는데! (좋아서) 바로 여기 있었구나. 몇 천 년 몇 만 년 살 것 같더니. 너도 결국 죽고 말았구먼. 헤헤, 나와 꼭 같은 신세가 되었단 말이여. 헤헤.

변학도 : (더욱 화가 나서) 무엇이 어째고 어째!

마당쇠 : 하여간 잘 만난 거여!

마당쇠의 항변을 변학도는 막아내지 못했다. 그 대목에서 탈춤과 민요에서 가져온 많은 자료를 활용했다. 팔뚝이·찔뚝이·꺽달이까지 가세해 더욱 불리하게 되자, 변학도는 마침내 자기 잘못을 시인했다. 벌로 곤장 백만 대를 맞아야 한다고 하고, 자손이 뉘우쳐서 이제는 잘못하지 않으면 감형을 한다고 했다.

초혼굿이니 귀신을 불러내서 하지 못하고 있던 말을 하게 해야 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단숨에 써내려갔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몇 가지 원리가 있다. 시대 설정에서 과거와 현재, 수법에서 탈춤과 현대극, 내용에서 환상과 현실, 인간관계에서 싸움과 화합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할 수 있다. 한풀이가 신명풀이인 원리를 그런 방식으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전개하고 있는 생극론과 같은 생각을 일찍부터 간직하고 있었다.

4.

불문과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국문학과로 옮기기로 했다. 대학원 국문과로 전과할 수 있는지, 입학할 수 있는지 알아보니, 둘 다 불가하다고 했다. 국문과 3학년에 학사편입을 하는 것은 가능해 1964년에 그렇게 하고, 1966년에 졸업했다.

1966년 국문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고, 1968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1968년에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1971년에 수료했으며, 197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부터 1968년까지 10년간 서울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기간이 1971년까지는 13년, 1976년까지는 18년이다. 국내 유학을 오래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왜 불문학에서 국문학으로 갔는가? 이에 대해 한 마디로 대답하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4.19에 주동자로 참여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서구를 따르려고 불문학을 공부하는 시대는 가고, 국문학에서 지침을 얻어 우리 역사를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이 옳다고 거듭 확인한다. 서구중심주의 극복의 세계사적 과제 해결에 동아시아문명의 핵심을 민족문화에서 재창조해온 우리가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학문을 하고 있다. 문학 창작을 하려고 불문과에 갔다가, 창작을 잘하려면 비평의 안목이 있어야 하고, 비평은 연구를 근거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불문학을 활용하는 비평은 빗나가고, 불문학 연구를 뜻한 대로 하는 것은 유학을 해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문학을 연구해 비평의 원리를 찾고, 창작의 지침을 얻어야 한다. 국문학을 연구하면서 이런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해야 한다. 문학 연구에서 철학 전통 재창조로 나아가 더 큰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다짐하고 분투해 왔다.

5.

불문과 대학원을 더 다니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겨 휴학하고, 서울대학 도서관에서 날마다 책을 읽었다. 학문 분야나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서 끝없이 헤매고 다녔다. 경성제대 시절에 구입해놓고 아무도 보지 않아, 책장이 붙어 있는 수많은 불어책을 처음 열어 보았다. 그 가운데 프랑스 공산당에서 낸 공산주의 서적 총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열람 불가가 4.19를 계기로 몇 년 동안 풀렸다.

그쪽을 종착점으로 여기지 않고 탐색을 계속하다가, 송석하의 <한국민속고>를 발견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거기 수록되어 있는 봉산탈춤 대본을 읽고 놀라운 발견을 했다. 마침 그 무렵에 봉산탈춤을 되살리는 공연을 해서 현장의 감격까지 누릴 수 있었다. "국문과에 가서 이런 것을 공부하자!" 결단을 내렸다.

탈춤 공연만 보고 있지 않고, 민요 현지조사를 하려고 나섰다. 성능이 미흡한 녹음기를 가까스로 구해, 몇몇 벗과 함께 방을 빌려 밥을 해서 먹으면서 방랑자가 되었다. 충북 보은에서 강원도 영월까지 가면서 민요가 무엇인지 체험했다. 그 다음에는 경북 영양으로 가서 오래 잊고 있던 고향의 소리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상징주의를 거쳐 초현실주의를 기웃거리던 불문학 공부를 멈추고 대전환을 하겠다는 결심을 현지에서 굳혔다. "공부하려고 고향을 떠났는데, 공부란 다름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한 힘든 과정이다." 그때의 각성을 이런 말로 나타낸 적이 있다.

6.

그때는 졸업논문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대단한 논문을 쓰겠다고 작정하고, <탈춤 발생고>를 200자 원고지 1,000매 정도의 분량으로 완성했다. 다른 논문 둘과 대응되는 관계를 가지고 넘어서려고 했다. 하나는 나의 불문과 졸업논문 <현대시의 존재론적 모험>이다. 또 하나는 김동욱 선생의 <판소리 발생고>이다.

그 두 논문은 방황의 산물이지만, <탈춤 발생고>는 각성의 결과라고 여겼다. 현대시의 존재론적 모험을 밝히려는 모험은 엉성하게 진행되어 타당성이 의심스러웠다. 멀리 있어 알기 어려운 유럽의 현대시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우리 탈춤으로 방향을 돌려, 이용 가능한 모든 자료를 동원해 확실한 결과를 얻었다고 여겼다. 논문의 분량을 갑절로 늘인 것도 알리고 싶은 사실이다. 두 논문 다 계명대학 도서관 동일문고에 보관되어 있다. 찾아내 비교고찰을 하는 호사가가 있기를 기대한다.

판소리의 발생을 밝히려는 논문은 광대의 행적에 관한 문헌기록을 찾다가 자료 열거에 그쳤다고 마음속으로 나무랐다. 탈춤 발생은 문헌이 아닌 민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고, 농악대가 풍년이 되도록 하는 굿, 풍농굿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 기원이라고 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연극에서 잘 밝혀진 세계 공통의 사실이다. 차이점은 탈춤이 희극으로 성장한 데 있다. 이에 관한 논의를 <가면극의 희극적 갈등>이라는 석사논문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탈춤 연구를 그 뒤에 다각도로 더 하고 <탈춤의 원리, 신명풀이>에서 집성했다.

▲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의 유튜브 채널 <조동일문화대학> 화면 갈무리.

7.

<탈춤의 역사와 원리>(1975) 머리말에서 말했다.

탈춤은 역사를 잃어버렸기에 찾아내야 한다. 과거의 추론을 따르지 말고 뒤집어 보면서 새로운 발견을 해야 한다. 발견해야 할 것은 탈춤은 민중과 함께 성장하고 민중의식을 특히 잘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쉽게 해온 말을 작품 내외의 증거를 들어 입증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그래야 탈춤이 소중하다고 하는 주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탈춤의 민중의식은 갈등구조를 갖추어 구현되어 있다. 특성 있는 갈등구조를 극 내부에서 갖추는 데 그치지 않고 극과 관중과의 관계에서도 주목할 만한 원리가 있다. 그런 점을 제대로 밝혀내야 탈춤이 오늘날 다시 살아나야 할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해명하고, 바람직한 계승 방향을 말할 수 있다.

8.

<카타르시스·라사·신명풀이>(1997) 서장에서 말했다. 1970년대 이후 20여 년 동안, 대학에서 탈춤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학생들이 탈춤을 배워 공연하고, 탈춤을 새롭게 만든 마당극을 공연하는 데 대단한 열의를 가져, 대학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탈춤의 재생을 위해 크게 다행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잊히고 짓밟힌 민중예술을 되찾아 계승해서 문화제국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제3세계문화운동의 모범사례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운동이 거센 만큼 이룬 성과도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탈춤에 대한 애착을 행동으로 나타내면서 군사 통치에 대해 정치적인 불만을 터뜨리는 데 그쳤으며, 문화 창조의 방향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탈춤에 열을 올린 그 많은 대학생 가운데 탈춤의 원리와 그 계승 방향에 대해서 깊이 있는 연구를 계속한 사람은 없다. 그 때문에 탈춤의 원리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지 못하고, 탈춤을 오늘날의 연극으로 계승하는 방향이 올바르게 설정될 수 없다. 마당극 운동이 제대로 될 수 없었던 이유도 거기 있다. 마당극은 정치적인 억압에 대해서 항거하는 민중운동으로서는 커다란 의의가 있지만, 예술운동으로서 평가할 만한 성과는 이룩하지 못했다. 예술로 형상화되지 않은 직설법을 남용해서 탈춤에 대한 오해나 불신을 자아내게 하는 역기능을 수행하기까지 했다.

탈춤이나 판소리를 제대로 이어받기 위해서 노력한 경우에도, 현장의 작업은 몸으로 때우면 된다고 믿고 예술적인 원리를 탐구하는 이론 정립은 경시해서 차질을 빚어냈다. 그래서 기존의 학계와 연극계는 타격을 받지 않았다. 마당극운동을 해서 군사 통치를 무너뜨리는 데는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문화를 혁신하고, 사고를 개조하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지금은 대학가를 뒤흔들던 마당극의 열기가 퇴조되면서, 탈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이유가 달라지고 있다. 우리 사회 안에서 군사 통치냐 민주화냐 하고 싸우던 시기의 과업은 거의 끝나고, 국제화라는 이름의 개방의 시대를 맞이해서 밖으로부터 도전이 거세져 새로운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영화전쟁이 양요(洋擾)처럼 닥쳐오는 데 굴복하지 않으려면 영화를 살려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 영화를 살리는 지혜를 탈춤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탈춤마저 위협받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유령처럼 다가와 학문하는 사고를 혼란시키는 책동을 갖가지로 자행하더니, 마침내 탈춤을 무력화하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위기를 절감하고, 떨쳐나서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위기에 대처해서 탈춤을 옹호하고 민족문화를 재평가하는 작업은 누가 하든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방향과 방법이 문제이다. 싸움에 이기는 최상의 길은, 화해를 부정하고 싸움을 일으킨 상대방의 도발이 원천적으로 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론을 세계적인 범위에서 정립해서 세계사의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 침략주의의 논거를 무력화하고, 인류 공동의 이상을 재확인할 수 있다. 탈춤을 떠나 다른 영역의 연구를 하는 동안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철학인 생극론을 마련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이제 탈춤을 둘러싼 논란에 관해서도 그전보다 훨씬 확대된 시야에서 더욱 진전된 작업을 할 수 있다.

남들의 철학을 함부로 가져와서 겁을 주면서 자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횡포와 맞서기 위해서 나는 내 철학을 가져야 하고, 철학의 복권을 이룩해야 한다. 위에서 승패를 뒤집어놓는 대신에 승패가 있을 수 없다는 데 이르는 싸움의 방식에 관해서 말하고, 변증법을 받아들여 넘어서는 길이 거기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생극론의 핵심 내용이다.

싸움거리가 있으면 어떻게 싸워야 하고, 싸움의 결과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누구든지 철학을 한다. 변증법은 싸움의 본질과 해결방식에 대해서 지금까지 나온 어떤 철학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대답을 마련해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런데 나는 변증법은 맞으면서 또한 틀렸다고 하면서, 변증법의 발전형태이면서 또한 변증법에 대한 대안인 생극론을 내놓는다.

변증법은 싸움은 싸움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맞고, 싸움이 화합이고 화합이 싸움인 줄 모르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틀렸다. 싸움과 화합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고,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생성과 극복 또한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바로 그 점을 풀어 밝히는 철학을 마련해서 연극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며, 연극의 문제를 다루어 그 철학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한다.

9.

<국문학의 자각 확대>(2022)에서 말했다.

'카타르시스'·'라사'·'신명풀이'가 연극의 세 가지 원리라고 나는 말해왔다. 이 셋을 비교해 고찰하는 작업을 <카타르시스·라사·신명풀이>(1997)라는 책에서 하고, 그 전문을 재수록 한 <탈춤의 원리 신명풀이>(2006)에서 더 많은 논의를 했다. 여기서 기존의 성과를 간추리면서 새로운 견해를 보탠다. 생극론 탐구가 더욱 진전되고, 대등론과 창조주권론이 추가되면서 연극에 관한 논의에서도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한국 연극의 주류를 이루는 탈춤은 '카타르시스' 연극과 아주 거리가 멀다. '카타르시스' 연극을 연극의 전범이라고 여기고, 탈춤은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나무라는 것은 잘못이다. '라사' 연극과 비교를 한다면 수준 미달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 또한 빗나간 견해이다. 탈춤은 '카타르시스' 연극이나 '라사' 연극과 다른 또 하나의 연극이다.

'카타르시스'나 '라사'와 구별되는 탈춤의 원리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하고, 탈춤의 원리는 '신명풀이'라고 하는 해답을 말했다. 이것은 어떤 이론의 도움을 받지 않고, 탈춤에서 직접 발견한 사실이다. 탈춤 공연은 '신명풀이'이고, 탈춤은 '신명풀이'를 원리로 하는 연극이라고 하는 증거를 탈춤이 제공한다.

'신명풀이'에는 혼자서 하는 것도 있고, 여럿이 함께 하는 것도 있다. 여럿이 함께 '신명풀이'를 하는 것을 대동놀이 또는 대방놀이라고 한다. 대동놀이는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고, 대방놀이는 탈춤 대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이다. 대방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논의를 진행한다.

탈춤은 대방놀이다. 대방놀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하는 앞놀이와 나중에 하는 뒷놀이에서는, 구경꾼과 공연자가 구별 없이 같은 자격으로 신명풀이를 하면서 어울려 논다. 중간에 하는 탈놀이에서는 공연자와 구경꾼이 구별되기도 하고, 공연자가 구경꾼이며 구경꾼이 공연자이기도 하다.

'카타르시스' 연극은 상극, '라사' 연극은 상생에 치우쳐 있다. '신명풀이' 연극은 상극이 상생이고 상생이 상극이라고 하는 생극의 연극이다. 상극·상생·생극을 각기 구현하고 있어, '카타르시스'·'라사'·'신명풀이'가 연극의 세 가지 기본 원리를 이룬다.

(탈춤이 어떤 연극인지 간략하게 말해보자.) 모든 사람이 누구나 대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대동놀이를 진행하면서, 등장인물들이 탈을 쓰고 등장해 다투는 탈놀이를 이따금 한다. 극중 장소를 따로 설정하지 않고 공연 장소가 극중 장소여서, 연극이 현실과 직결되어 있다. 탈놀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관중이 된 대동놀이 참여자들이 탈놀이에 직접 개입한다. 대등창작의 원리가 이런 방식으로 구현된다.

대등창작은 누구나 자기의 신명을 풀고 창조주권을 발현하도록 해서 즐겁다고 하고 말 것은 아니다. 차등을 제거하고 대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인 것을 또한 높이 평가해야 한다. 노장-목중 과장에서 관념의 차등을, 양반-말뚝이 과장에서 신분의 차등을, 영감-할미 과장에서 남녀의 차등을 공격해 뒤집어엎는 것이 대등창작의 원리를 알뜰하게 실현하면서 이루어졌다.

지금은 이런 대등창작을 밀어내고 차등창작이 득세했다. 극작·연출·공연·관람이 담당자나 작업 순서에서 엄격하게 구분되고, 앞의 것이 뒤의 것 위에서 군림하는 차등창작이 세계를 휩쓸어 예술사의 위기가 조성되었다. 기이한 재주를 자랑하는 전문가가 횡포를 자행하고, 최하위의 관람자 신세로 전락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창조주권이 유린된다. 극작·연출·공연·관람이 하나인 대등창작의 원리를 재현하는 투쟁을 일제히 일으켜야 한다.

마당놀이니 마당극이니 하는 것들이 탈춤을 이어받는다고 하는데 많이 모자란다. 소재주의나 국수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과도한 자부심을 가진다. 대등창작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이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알지 못하고, 차등창작의 관습에 편승해 시류를 따르는 주장을 전달하려고 한다. 나라 안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근시안적인 관심을 넘어서서 세계예술사를 바로 잡기 위해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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