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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 가다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대구 가창골 민간인 학살사건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골로 가다(1)

-대구 가창골 민간인 학살사건

그날 밤 대구 형무소 철망을 뚫고

독립운동가 유쾌동 선생을 호명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한다(2)

수감 중이던 그의 장남 유병화 씨는 철망 안에서

아버지의 흰 옷자락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뿐이라 한다

몽둥이로 흠씬 맞고 트럭 짐칸에 실린

아버지는 마침내 가창골로 갔다

미군정에 항의하다 총격당했고

시위 주동자로 체포당했고

가창골 수직갱에 생매장당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아들 유병화 씨는

아버지를 찾아 가창골로 갔다

나무꾼도 비켜 가는 비릿한 냄새

아들은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참았다

비에 씻긴 시신들을 흙으로 덮고 또 덮어도

장마철 계곡을 따라 인골들이 떠내려왔다

비슷비슷한 모두의 아버지들

70년이나 씻기고 씻긴 유골은 땅속 깊은 어디쯤

서로의 이마를 맞대며 위로하고 있을까

댐을 만들 때 열여덟 가마의 유골을 파내

건너편 산에 묻었다지만

아직도 어두운 진창에 갇혀 담수의 낙차로 매일 아픈 유골들

쑥물같이 쓰디쓴 그들의 긴 이야기가 진초록 물이 되어 고여있는 곳

오천여 명 유골이 족히 묻혔다는 가창 골짜기에

붉은 장미 한 송이가 천변의 안전 철망을 흔든다

아들을 뒤돌아보지 못하고 골에 묻힌 유쾌동 씨는 이제야

평생 피 토하는 유병화 씨의 늦은 절을 받는다

위령탑의 왼쪽 날개 세 번째 줄 세 번째 열에

발가락뼈인 양 마디 분질러가며 박힌

유쾌동, 짧은 이름 석 자만이

영원히 잊지 못할 슬픈 무덤이다(3) 

(1) 골로 가다 양민들을 골짜기로 끌고 가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골(골짜기)로 끌려가는 것은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2) 2014년 10월 10일 영남일보 유병화 씨 인터뷰 기사 인용

(3) 현재 가창면에 살고 있는 70대 노인이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슬픈 무덤이여'라고 적힌 목비를 봤다고 증언했다

▲ 가창댐낙수지점-대구 가창댐을 건설할 때 가창골 학살 사건으로 인한 유골 열여덟 가마를 파내 건너편 산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나 담수의 낙수 지점에 아직 유골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학살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가창댐을 건설했다는 주장도 있다. ⓒ천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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