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은 현행범인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중 국회의 동의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한다."
우리나라 헌법 제44조 제1항입니다.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당시 제정된 제헌헌법 제49조에 명시된 이래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지난 12일 윤관석·이성만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됐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관련입니다. 여론은 싸늘합니다. 민주당은 방탄 대오니, 도덕 상실증이니, 내로남불이니 하는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불체포특권은 영국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1603년 의회 특권법(Privilege of Parliament Act)으로 가장 처음 법제화됐습니다. 당시는 전횡을 휘두르던 왕이 의원들을 불법 체포하는 일이 빈번하던 시기였습니다. 절대권력으로부터 의회를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1689년 권리장전 제9조에 “의회에서의 토론과 언론의 자유는 의회 이외의 기관 또는 법원에 의해 탄핵당하거나 문제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규정이 명시되었습니다. 삼권분립의 정신이 태동하던 때였습니다.
영국의 뒤를 이어 미국이 1787년 연방헌법을 제정하며 ‘의원은 회기 중에 체포되지 않는 특권이 있다’라는 내용을 성문화합니다. 불체포특권이 헌법상의 제도로 발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미국헌법 제1장 제6항 제1호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은 반역죄, 중죄 및 치안 방해죄를 제외한 어떠한 경우도 회의 출석 중에, 그리고 오가는 도중에 체포되지 않는 특권이 있다.
(They shall in all Cases, except Treason, Felony and Breach of the Peace, be privileged from Arrest during their Attendance at the Session of their respective Houses, and in going to and returning from the same.) "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영미법의 영향을 받은 세계 각국이 불체포특권을 법적인 제도로 도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네덜란드가 거의 유일한 예외일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보편적인 제도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불체포특권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의견은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알앤써치가 올해 초인 1월 2~3일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폐지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폐지해야 한다'는 60%, '유지해야 한다'는 27%로 집계됐습니다.
한국갤럽이 2월 24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도 비슷합니다.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에 대해 응답자의 57%가 '성역 없는 수사를 위해 폐지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정치적 탄압을 방어하기 위해 불체포특권을 유지해야 한다'라는 의견은 27%에 그쳤습니다.
이런 여론 지형이 형성된 배경에는 정치인에 대한 불신, 특권에 대한 거부감, 방탄 국회나 비리 의원 보호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 등이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정치의 부끄러운 모습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죠.
국회 개원 이후 현재까지 제출된 체포동의안은 총 70건입니다. 이 중 가결은 17건으로 24%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체포동의안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범죄 유형이 뇌물, 횡령, 정치자금법 위반 등 부패 범죄라고 합니다.
이 정도라면 우리 국회가 심각한 수준으로 제도를 오·남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닙니다.
나치즘을 겪은 독일의 불체포특권은 상대적으로 강력한 편이라고 합니다. 회기 중에만 보장하는 우리와 달리 임기 전체에 걸쳐 특권이 인정됩니다. 체포뿐만 아니라 기소의 경우에도 연방의회(Bundestag)의 동의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2021년 국회사무처 자료에 따르면 1990년 제12대부터 제18대 국회 마지막 해인 2017년까지 독일 연방의회에 제출된 총 101건의 체포동의안 중 93건이 가결되었습니다. 무려 92%의 비율입니다. 법이 보호하는 특권은 세 보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다른 관점도 살펴보겠습니다. 체포동의안을 제출하는 사법부는 정의롭기만 한 걸까요? 앞서 소개해드린 미국 연방헌법 제1조 중 '반역죄, 중죄 및 치안 방해죄를 제외한'이라는 문구에 주목해 봅시다.
'중죄(felony)'에 대한 해석을 놓고 사실상 미국의 국회의원은 대부분 범죄에 대해 언제든 체포될 수 있다고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미국 통념상 '중죄'를 '징역 1년 이상의 처벌이 가능한 범죄'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불체포특권의 예외 범위가 넓어 실효성이 적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현행범이 아닌 한 회기 중인 미국의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 시도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불구속수사 원칙이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형사소송법 제198조 제1항에서 불구속수사 원칙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규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망신주기식 압수수색 영장 발부, 기소 남발, 정치 언어로 쓰인 구속영장 등 검찰에 대한 시선도 곱지만은 않습니다. 검사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검찰공화국, 검찰통치라는 평가도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에게 저렇게 할 정도면 힘없는 일반인에게 사법 권력이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불체포특권이 이대로 유지되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가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의회 권력이 강화된 현대사회에서 그 필요성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고 봅니다. 정치권의 자정 노력을 통해 제도의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엊그제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재명 대표가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체포동의안은 당사자의 의사가 아니라 국회의 동의를 묻는 절차를 거치므로 개인적 포기가 불가하다는 게 헌법학의 통설이라고 합니다. 정치적 의지 표명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도적인 개선 방안으로 어떤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예외 규정을 두어야 합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 독일, 일본 등 여러 국가가 불체포특권이 적용되지 않는 범죄 유형을 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법은 사실상 무제한 특권 누리기가 가능한 규정입니다.
투표 방식을 현행 무기명에서 기명으로 바꾸는 방안도 있습니다. 미국 연방의회에는 무기명투표제도가 아예 없습니다. 독일 역시 연방의회 의사규칙 제48조에 따라 거수 등 기명투표 방식으로 표결합니다.
체포동의안 심사를 담당하는 기구나 위원회를 두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객관성과 공정성을 위해 외부 전문가로 구성하는 게 좋겠죠. 체포·구금 시도가 의정활동 방해 목적이나 의원 탄압 의도인지 아닌지 등을 살펴 표결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의견을 제시하는 겁니다. 국회의원 특권을 감시함과 동시에 검찰과 사법 권력에 대한 견제도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국회에만 맡겨놓는다면 특권 포기는 앞으로도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한 공허한 메시지, 또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공염불에 그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회가 의회의 독립과 자유로운 의정활동이라는 입법 취지에 맞게 이 제도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우리가 똑똑히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각자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여러 측면에서 제도를 살피다 보니 글이 꽤 길어졌네요. 제가 이번 체포동의안 부결사태를 지켜보며 칼럼의 주제로 삼을 때만 해도, 이렇게 면죄부로 기능할 바에야 차라리 폐지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여러 주장을 들어보고 역사를 되돌아보며 의견을 다듬는 과정에서 좀 변화가 있었습니다.
고민의 여정을 함께하고픈 여의도 아저씨의 열정을 널리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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