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사과를 하란 말인가?" 일본의 침략과 억압, 그에 따른 전쟁범죄를 둘러싼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이미 충분히 사과를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더 이상 사과할 필요 없다는 말들을 한다. 일본의 우파들뿐 아니라 <반일 종족주의>로 대표되는 한국의 '신친일파'들도 그렇게 말한다. 관련 자료를 뒤져보면, 사과를 했다는 것만은 틀린 얘기는 아니다. 일본이 지난날 저질렀던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희생에 대한 사과를 꼽아보면 아래와 같다.
△히로히토(裕仁) 일왕: 1984년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1984년 9월6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 '일본군의 관여 아래,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냈다'며 '위안부' 관련 전쟁범죄를 사실로 인정하는 담화(1993년 8월4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총리: 1993년 경주를 방문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창씨개명과 '위안부', 징용 등의 여러 형태로 괴로움과 슬픔을 당한 것에 대해 가해자로서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1993년 11월6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 패전 50주년을 맞아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더불어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는 '무라야마 담화' 발표(1995년 8월15일).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총리: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일본이 식민지 지배로 한국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고 밝힌 '김대중-오부치 선언'(1998년 10월8일).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痛切な反省と心からのおわびの氣持)을 나타낸 담화 발표(2010년 8월10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다시 한 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한일 외무장관 사이의 '위안부' 합의 뒤 박근혜 대통령과의 통화. 2015.12.28).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 "일본이 용서받을 때까지 피해자에 거듭 사죄해야 한다. 사과는 피해자가 좋다고 할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총리 퇴임 뒤인 '2019 서울 원아시아 컨벤션'에서의 발언. 2019년 8월5일).
사과 발언을 한 일본 총리들의 면면을 보면, 자민당 소속은 오부치, 아베 두 사람이고 나머지는 비(非)자민당이다. 호소카와는 일본신당, 무라야마는 사회당, 간은 입헌민주당. 하토야마는 민주당 출신이다. 정치적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재임 기간이 짧았던 비자민당 총리들의 사과가 많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오랜 자민당 독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있을 때의 일본 정치권이 전쟁범죄를 사과하는 '열린' 자세를 더 보였음을 알 수 있다.
1993년 오랜만에 비자민 연립내각을 이끈 호소카와 총리는 에도 막부(幕府) 때에 구마모토 번(蕃) 영주의 직계 후손이자 귀족 출신임에도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는 등 그의 발언은 일본 극우의 분노를 불렀고, 1994년 5월 도쿄 플라자호텔에서 총에 맞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8개월 남짓 짧은 총리 재임 중 호소카와의 사과 발언을 거스르는 각료들의 망언이 세 차례쯤 있었다. 이를 어떻게 봐야할까. 일본의 문예평론가 카토오 노리히로(메이지학원대 교수)의 분석을 참고삼아 옮겨본다.
[일본의 언론은 (각료의 망언이 나올 때마다) '기껏 호소카와 총리가 한 걸음 진전된 사과를 했는데 어째서 그걸 도로아미타불로 만드는 실언이 계속되는가'하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실은 이러한 일련의 망언은 호소카와의 사죄발언에도 불구하고 나온 것이 아니다. 호소카와의 사죄발언 때문에 나온 것이다. '과거의 악'을 받아들인 다음의 사죄 논리가 돼있지 못하기에, 그럴듯한 사죄가 나오면 그에 대한 반동으로 망언이 나오게 되는, 한 쌍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카토오 노리히로,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전후 일본의 해부>, 창작과비평사, 1998, 11-12쪽).
9개월 남짓 단명 총리였던 하토야마도 한국인들로선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2009년 야당 민주당 소속으로 일본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자민당까지 낀 연립내각이 아닌) 단일 정당으로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뤘던 인물이다. 그는 퇴임 뒤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들을 만나는 등 한국을 자주 찾아왔다. 2015년 8월 서울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방문해 그곳에서 숨진 순국선열 165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일본이 피해자가 그만두라 할 때까지 거듭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양심적인 정치인이다.
문제는 일본의 다른 많은 정치인들이 위의 사과보다 훨씬 많은 망언(妄言)들을 내뱉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피해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일만한 배상 절차를 밟지 않았기에, 사과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는다. 한쪽에선 사과를 하고, 다른 한 쪽에선 망언을 하면서, '사과와 망언의 불협화음'을 연출해온 것이 '일본식 사과'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키마리몽쿠'(決まり文句)나 다름없는 사과
'사과'라는 말을 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다'(표준국어대사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 따위를) 스스로 인정하고 용서를 빌다(고려대 한국어대사전)로 나온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사과'는 잘못을 딱 잡아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래 된 우리말에 '말만 잘 하면 천냥 빚도 갚는다'는 구절은 사과의 진정성이 지닌 힘을 나타낸다. 안타깝게도 일본의 사과엔 진정성이 빠졌다.
일본어로 '키마리몽쿠'(決まり文句)는 우리말로 '하나마나한 얘기' '뻔한 상투적인 얘기'라는 뜻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조차 일본 정치인들의 사과를 '키마리몽쿠나 다름 없는 사과'라고 여긴다. 그 까닭은 진정성이 담겨 있지 않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해야 하고, 뒤에서 다른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총리가 사과를 하면 각료가 엉뚱한 망언을 내뱉어 불협화음을 내는 것은 사과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
'아시아의 지도급 인물'로 평가받는 리콴유(李光耀, 1923-2015)는 일찍이 일본의 사과 방식이 지닌 '불협화음'의 문제점을 꿰뚫어 봤다. 1994년11월 패전 50년을 맞아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한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리콴유는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를 보도한 <아사히신문> 기사(1994년 11월22일) 내용을 줄여 옮겨본다.
[리콴유는 일본 총리들의 잇단 사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국가들의 일본에 대한 오해가 풀리지 않는 것은 '독일의 솔직함'과는 대조적으로 '일본 우파 정치인들의 발언이 불안을 돋우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그러한 불협화음이 그치면 신뢰관계를 쌓기 쉬어진다"고 말했다](오카미야 요시부미, <일본정치의 아시아관>, 동아일보사, 1996, 23-24쪽에서 재인용).
아베 신조, "전후 세대가 사죄 계속할 수 없다"
일본의 극우파들은 한술 더 떠 난징학살(1937)이나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의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며, 일본의 미래 세대에게 죄의식을 물려줄 필요 없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는 20세기 아시아를 침략전쟁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숱한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역사적 사실을 (진정성 있는 사죄와 그에 걸맞는 합당한 배상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하루빨리 털어내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조급함에서 비롯된다.
지난 해 7월8일 유세장에서 총에 맞아 죽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2022)도 9년에 걸친 총리 재임 시절에 그런 조급한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2015년 8월14일 일본 종전 70주년을 맞아 아베가 발표했던 담화의 한 구절은 이렇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진심의 사죄를 되풀이했다. 그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구 8할을 넘긴 전후세대에게 '사죄의 계속'이라는 숙명을 남길 수 없다" 이를 두고 이창위(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국제법)교수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다.
[아베 총리는 두 번에 걸친 재임 중 공식적으로 20회 정도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정치인의 사과는 마무리됐다. 그들은 수십 년간 말로 할 수 있는 사과는 다했다. 이제는 통절한 반성과 진심의 사죄'라는 상투적인 표현의 사과를 더 받는다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이창위, <토착왜구와 죽창부대 사이에서>, 박영사, 2023, 175-176쪽).
과연 그럴까. '말로 할 수 있는 사과를 다했다'면 그걸로 '사과는 마무리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이 시각에도 일본 전쟁범죄의 희생자와 유족들이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떠올리면, 위의 말대로 사과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사과에 따른 후속조치를 피해자들이 수긍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과라 말할 수 있다.
결국 핵심은 사과의 질(質)이다. 사과에 진성성이 담겨 있어야 제대로 된 사과인데, 그렇질 못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흔히 말로만 하고 진정성 빠진 것을 '립 서비스'라 한다.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는 많은 경우 '립 서비스'에 머물러 왔다. 게다가 아베만 해도 사과 뒤 곧 자신의 말을 뒤집는 발언들을 일삼지 않았던가(이 부분은 다음 주 글에서 좀 더 살펴본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배상이다. 희생자들이 납득할만한 절차를 거쳐 많든 적든 금전적 배상을 하는 자세를 보여야 진정성이 의심을 받지 않는다. 입으로만 사과할뿐더러 딴소리로 사과를 뭉갠다면 사과는 하나마나다. 일본이 그동안 해온 말이나 보인 태도를 인공지능(AI) 로봇에 물어본다면, 진정성 0%인 '립 서비스'라고 대답할 것이 틀림없다.
부시 대통령, "돈과 사과로도 고통의 기억 못 지워"
외국은 어떠한가. 같은 전쟁범죄 국가인 독일은 일본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사죄와 배상을 해왔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에 갔을 때 그곳 국민들은 싸늘한 눈길로 바라봤었다. 두 차례(제1,2차 세계대전)의 전쟁 때마다 독일의 침공을 받아 고통을 겪은 집단적 기억 때문이었다. 하지만 브란트가 유대인 추모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 뒤부터 달라졌다. 사죄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브란트가 걸어간 길은 추모 기념비 앞에서의 돌발행동이 정치적 쇼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독일의 사죄는 말이나 겉치레로 끝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방식으로 사과를 하고 적지 않은 금액의 배상을 거듭 해왔다. 나치의 주요 희생자인 유대인은 물론이고 독일 이웃 사람들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했고, 앞으로도 추가 배상을 하겠다는 방침이다. 2022년까지 나치 전쟁범죄 희생자들에게 지금까지 지불한 액수는 800억 유로(112조 원)에 이른다. 독일뿐 아니다. 미국이나 캐나다도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했다.
1990년 미국 조지 H.부시 대통령(조지 W. 부시의 아버지)도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억류했던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사죄의 편지와 더불어 2만 달러의 수표를 보냈다. 그 편지엔 "아무리 돈과 (사과의) 말을 더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을 수 없고, 고통에 가득 찬 기억을 없앨 수 없다"고 했다. 19세기 캐나다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죽음에 내몰았던 캐나다 정부는 지금도 거듭 사죄와 배상을 해오고 있다(독일과 미국 등의 과거사 배상을 통한 사죄·화해 노력은 본 연재에서 곧 살펴볼 예정임).
미국 대통령은 사죄 편지를 보냈지만 일본 총리는 그러질 않았다. 2016년 10월 아베 신조 총리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 편지를 쓸 것인가에 대한 질의를 받자,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외국의 사례에 견주어 보면, 일본은 희생자들의 아픔을 '나와 상관 없는 타인의 고통'쯤으로 여기는 모습이다. 지난날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집단 기억을 잊고자 애쓴 나머지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소홀히 한다는 지적을 받아 마땅하다.
게다가 '전쟁범죄는 없었다'느니,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이라느니 하며 이어지는 망언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전쟁범죄를 왜곡·축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인·망각하고자 하는 일본의 '집단적 기억 상실증'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겉으론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말하면서도 그들의 역사인식이 몰윤리적이며 반지성적으로 뒤틀렸음을 드러내준다.
망언의 여섯 가지 종류
일본 정치인들이 뱉어내는 망언은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정확히 선을 그어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범죄로 얼룩진 일본의 과거사를 왜곡·축소·부정한다는 이른바 '역사수정주의'의 입장에서 어떤 망언을 한 자는 또 다른 망언들을 내뱉기 마련이다. 망언의 맥락이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인을 얕잡아 보는 망언이다. 일본인이 우월하다는 편견 아래 한국인을 비하하는 망언은 한둘 아니다. 1951년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일본 국적을 주지 않겠다는 원칙을 밝히면서 재일 한국인들을 '뱃속의 벌레'에 비유했다(다음 주 글에서 다시 살펴봄).
1963년 12월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 무렵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1890-1964) 자민당 부총재의 망언도 인상적이다. 오노는 취임식 경축 사절로 서울로 떠나기 앞서 이렇게 입을 가벼이 놀렸다. "박정희와는 서로 부자지간이라 인정할 정도로 친한 사이다.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일은 무엇보다 즐겁다." 박정희보다 27살 연상이라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를 가리켜 '아들'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어이없는 망언이 알려지자, 한일 사이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은 '역시 일본과 한국 사이는 부모와 자식 관계'라며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고 알려진다.
후쿠자와,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한국을 업신여기는 일본인의 원조를 꼽자면, 19세기 일본의 선각자, 계몽사상가로 일컬어지는 (또한 한국의 '신친일파'도 숭배해 마지않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도 빠질 수 없다. 한국에는 후쿠자와가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와 가까이 지낸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김옥균 등을 만나기 전부터 조선을 '소야만국'이라며 멸시하는 눈길로 바라봤다. 1875년 일본의 한 신문에 실렸던 그의 글을 옮겨본다.
"조선이 어떤 나라냐고 묻는다면, 아시아의 일개 작은 야만국으로서, 문명의 양상은 우리 일본을 따르기엔 아직 멀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보잘 것 없고 병력은 겁낼 것이 없다. 설사 그들이 자청해 우리의 속국이 된다 해도 기뻐할 일이 못 된다"(다카사키 소지, <일본 망언의 계보>, 한울, 2010, 14쪽).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그가 지지했던 김옥균 등이 대역죄로 몰려 어려운 처지에 빠지자, 조선을 바라보는 후쿠자와의 눈길은 더욱 싸늘해졌다. 1894년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동학농민군을 못 마땅히 여기면서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고 비난했다. 1875년 위에 옮긴 글을 쓸 때만 해도 조선을 정벌하자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반대했지만, 1880년대의 후쿠자와는 "무력으로써 (서양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근대문명이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 덕에 아시아가 유럽 식민지에서 독립했다"
둘째, 역사왜곡과 관련해 1910년 한일병합이 합법적으로 원만하게 이뤄졌다는 망언이다. 이 망언의 발설자들은 한둘 아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한일병합조약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법적'으로 조약이 맺어졌다면, '침략'이니 '강탈'이니 하는 용어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1986년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 문부상은 <분게이슈주>(文藝春秋) 10월호에 "한일병합이 없었더라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할 보증이 있겠느냐"는 글을 썼다. 이어 그는 "한일병합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한국을 대표하던 고종 간의 담판과 합의에 따라 이뤄졌다"고 망언을 늘어놓았다.
후지오 장관의 글은 기본적으로 잘못됐다. 독자 분들도 아시듯, 이토는 한일병합 전인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의사에게 죽었다. 병합조약(1910년 8월22일 조인, 8월29일 발효)은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통감과 이완용 사이에 체결됐고, 이토와 고종의 담판(사실은, 위협과 공갈) 끝에 체결된 것은 1905년의 을사늑약이다. 후지오의 글은 한 나라의 교육정책을 맡은 인물이 자기네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셋째,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전쟁 자체를 정당화하는 망언이다. 일본은 자위(自衛)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백인 제국주의자들과 전쟁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백인 제국주의자들에 점령당해 있던 베트남, 버마,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을 해방시켰다는 이른바 '아시아 해방사관'이다(언젠가 베트남에 갔을 때 이 얘길 꺼냈더니, 현지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1995년 사쿠라이 신(桜井新) 환경청장관은 "일본이 침략전쟁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만이 나쁘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져선 안 된다. 일본 덕에 아시아는 유럽지배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였고 교육도 널리 보급됐다"는 망언을 했다. 이럴 경우 식민지가 아니었던 중국을 침략한 것에 대한 설명이 옹색해지지만, 그에 대해선 못들은 척한다(사쿠라이의 망언에 대해 중국과 한국정부가 강력한 항의하자, 망언 이틀 뒤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전쟁은 침략 아니며, 난징 대학살은 날조다"
넷째, 침략전쟁에서 벌어졌던 학살이나 강제동원 등 전쟁범죄 자체를 부인하는 망언이다.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난징 학살(1937) 날조론을 펼치고, '위안부' 성노예를 비롯한 강제동원을 부인한다. 1994년 5월 일본 법무장관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는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며, 중국전쟁 중 남경에서 일본군의 중국군 대학살이라는 것도 날조"라고 주장했다(다음 주 글에서 나가노 망언의 파장과 당시 한양대 신방과 교수로 있던 리영희의 비판을 살펴보려 한다).
일본 극우들은 전쟁범죄를 부인하면서 '위안부' 성노예도 사실이 아니라 우긴다. 일본의 공문서에 위안부 강제동원을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없고,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믿을만한 증인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베 신조 전 총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증명할 증인이나 증거는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잇단 자료 발굴로 아베 신조의 케케묵은 주장은 이미 무너졌다. 아베와 그의 정치적 기반인 극우세력은 말을 바꾸었다. '좁은 의미의 강제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밤중에 집안으로 밀고 들어와 잡아가는 따위의 폭력적인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우기면서, '자발적인 계약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본 하버드대 교수 램지어의 망언이 대표적인 보기다.
"일본 통치는 조선에도 좋은 일이었다"
다섯째, 일제의 식민통치를 미화하는 망언. 한국전쟁이 멈춘 바로 뒤인 1953년 10월에 열렸던 한·일회담 때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는 "철도를 부설했다든지, 논을 개간했다든지, 일본의 36년 한국 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하였다"고 했다. 역사학자 다카사키 소지(쓰다주크대교수, 한일근대사)는 그의 책 <일본 망언의 계보>, 한울, 2010)에서 '구보다 망언'이 현대 일본 정치인들이 내뱉는 망원의 원형이라 본다('구보다 망언'은 다음 주에 좀 더 살펴본다).
구보다처럼 "일본 통치는 조선에도 좋은 일이었다"는 투의 망언을 내뱉은 정치인들은 한둘이 아니다. 일본의 통치 덕에 조선에 근대적인 교육제도와 행정조직이 들어섰고, 8.15 뒤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영훈(이승만학당 교장)을 비롯한 <반일 종족주의>의 필자들이 신앙의 경지로 떠받드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총리도 중의원에 출석한 자리에서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에 대한 평점을 후하게 매겼다.
"과거 일본과 조선의 합방시대가 길었다. 하지만 그 후 한국이나 그밖의 나라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면, 긴 합방의 세월동안 지금도 그 민족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은 일본이 김 양식법을 가르쳐 주었고, 나아가 일본의 교육제도, 특히 의무교육제도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훌륭한 것이라고 했다"(<제72회 국회중의원 회의록> 제10호(1974), 다카사키 소지, 14쪽에서 재인용).
일본이 김 양식법을 가르쳤고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했다는 다나카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한반도에서의 의무교육은 1895년 7월 반포된 소학교령이 출발점이다. 소학교는 수업연한 5~6년이었고, 학령은 만8세부터 15세까지였다. 1896년 학부가 지정한 개성·강화·인천·부산·원산·제주 등 전국의 주요 지역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될 무렵, 서울에 관립 10개교, 지방에 공립 50개교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엔 무상교육이 아니라 수업료를 받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학교를 갈 수 없었기에 문맹률이 70%를 넘었다. 본격적인 의무교육은 8.15 뒤부터였다. 끝으로, 김 양식의 역사는 한국이 일본보다 길다는 것이 정설이다.
리영희, "일본인들이 함부로 말하는 까닭이 있다"
한국 정부는 항의를 했고, 일본 정부도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리영희(당시 한양대 신방과 교수)는 월간지 <세대>(1974년 5월호)에 「다나카 망언을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의 것을 열등한 것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라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리영희는 '같은 정도의 잘못이 한국인에게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위에서 짧게 살펴본 '법무장관 나가노의 망언'(1994) 때도 월간지 <말>(1994년 8월호)에「일본인 망언 규탄 전에 국민 총반성이 필요하다」는 글을 실었다. 여기서 리영희는 친일 부역자들을 제대로 정리 못하고, 일본 망언을 비판하면 '빨갱이'로 모는 현실을 비판했다(다음주 '나가노 망언'의 파장을 짚으면서 다시 살펴보려 한다).
여섯째,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며 일본 영토라 우기는 막무가내형 망언이다. 1905년 일본이 한국에 알리지도 않고 몰래 일방적으로 자국 영토로 편입시킨 데 따른 문제점은 이미 짚어본 바 있다. 하지만 일본은 물론 한국의 '신친일파'는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한다(본 연재 17 참조).
아마존 재팬에서 '다케시마'를 치면 관련 책들이 엄청나게 많다. 문제의 책 <반일 종족주의>(2019)에서 이영훈은 "독도에서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하고 ('독도는 우리땅'이란 주장을 멈추고) 길게 침묵해야 한다"는 망언을 늘어놓았다. 이런 친일 발언을 일본어 번역판으로 읽는 일본 열도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지금껏 일본의 망언들을 종류별로 나눠 모두 6가지를 살펴봤다. 다음 주 토요일엔 일본의 주요 정치인들이 한국을 겨냥해 내뱉는 망언들이 지닌 문제점, 전쟁범죄와 관련된 망언들이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되풀이되는 근본적인 이유 등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