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인상은 여성노동자에게 더 절박한 문제다. 여성이라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이어서 저임금을 받고, 저임금 일자리는 생계보조자라 여겨지는 여성에게 돌아가는, 악순환의 성별분업 구조 속에서 최저임금은 성별임금격차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 등 노동약자들에겐 최저임금이 곧 생계의 마지노선이다. 노동시장 내 성별불평등 구조는 여성을 끝없이 노동약자 계층으로 밀어 넣는다. 다시 말하면 최저임금은 여성노동자들의 생계 마지노선이다. 마트, 콜센터, 청소 현장 등에서 일하는 '10년 이상 경력의 최저임금 여성노동자'들이 대통령실 앞에 선 이유다.
8일 오전 '모두를 위한 최저임금 1만 2천 원 운동본부' 소속 여성노동자들은 서울 용산구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저임금 인상은 여성노동자의 임금 수준을 올리고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확실한 방법"이라며 "빽 없고 가난한 여성노동자들에게 기댈 곳은 최저임금 뿐"이라고 호소했다.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선 내년 적용될 최저임금 수준을 논의하기 위한 최저임금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가 열렸다. 현재 최임위 내에선 최저임금 인상 폭과 지역·업종별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둘러싸고 노사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경영계는 경영부담을 이유로 내년도 최저임금 동결 혹은 인하와 차등적용을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실 앞에 모인 여성노동자들은 특히 경영계의 최저임금 차등적용 주장이 노동약자 계층에 집중돼 있는 여성노동자들에게 '직격타'가 될 것이라 우려를 표했다. 미용업, 편의점 등 "사용자들이 더 낮은 최저임금을 지급하겠다는 저임금 업종들은 주로 여성들이 일하고 있는 곳으로, 차등적용 문제는 여성노동자에게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약자의 생계를 보전하기 위한 최저임금 제도가 오히려 노동약자에 대한 차별을 심화하는 꼴이다.
실제로 OECD 통계상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27년째 OECD 내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성노동자의 절반인 49.7%가 비정규직이며, 이들의 평균임금은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155만 원에 불과하다. 경력단절, 성별분업, 채용 및 승진 차별 등 노동시장 내 오랜 성별불평등 구조의 결과물이다.
특히 이날 현장을 찾은 마트, 콜센터 등 저임금 노동현장 속 여성노동자들은 대부분 10년 이상의 오랜 경력을 쌓았음에도 최저임금 혹은 그 이하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박상순 마트노조 이마트지부 부위원장은 2009년 입사해 1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았지만 여전히 세후 180만 원 초반대의 임금을 받고 있다. 주변엔 온 가족의 생활을 걸고 일하는 동료들이 대다수지만, 회사는 그들을 "반찬값을 벌러나온 마트아줌마"로 대우한다.
발언에 나선 박 부위원장은 "육아와 가사일로 경력단절되었던 우리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다"라며 "여성이어서 받는 차별도 억울한데 (이제는) 최저임금을 업종별, 지역별로 차등적용하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고 토로했다.
청소노동자로 10년 넘게 일하고 있는 윤미순 전국여성노조 서울지부 서강대분회 사무장도 처지가 비슷했다. "경력단절 이후 처음 직장을 가졌을 때만해도 부푼 꿈이 있었"지만 "새벽에 집을 나와 오후 늦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히 일해도 해를 거듭할수록 웬일인지 점점 더 생활이 피질 않"는다. 물가상승률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최저임금 때문이다.
윤 사무장은 "우리가 지금 명품백이나 보석을 사기 위해 최저임금 만이천 원을 달라고 여기 이 땡볕에 나온 게 아니다"라며 "최저임금 인상 요구는 믿을 곳도 기댈 곳도 없는 빽없는 가난한 여성노동자들의,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산다는 노동자들의 절절한 호소"라고 강조했다.
18년째 고용상담센터 전화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는 유은정 전국여성노조 고용노동부지부 안양고객상담센터 분회장은 "저처럼 고용노동부 산하 콜센터 일을 하는 노동자의 98%가 여성노동자고, 모두가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일 한다"고 토로했다. 그나마도 지난 2021년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개편된 후로는 "월급 빼고 받던 밥값 마저 날아가 버려" 190만 원도 되지 않는 최저임금을 "최고임금인 양 대우 받고 있다." 올해 들어 센터에는 식당을 가는 대신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여성들이 특히 늘었다.
유 분회장은 "18년을 일했는데 아직도 최저임금 테두리 안에 있는 내처지가 속상하다"면서도 "그래도 최저임금이 올라야 그나마의 임금도 오를 것 아닌가, 제발 월급통장에 200만 원이라도 찍힐 수 있게 도와 달라" 호소했다.
지난 1988년 이래로 2019년까지 단 한 명의 여성도 관리직으로 올리지 않은 사실이 밝혀지며 국내 대표적인 성차별 노동현장으로 알려진 반도체생산공정 KEC에서는 도통 바뀌지 않는 성차별 구조에 맞서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싸우고 있다.
김진아 민주노총 금속노조 KEC지회 수석부지회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철저히 배제 당했고, 남녀간의 임금격차는 근속이 오래 될수록 더 커졌다. 교대근무를 하는 생산직 여성과 남성의 연봉격차는 심지어 두배 가까이 차이가 나기도 한다"라며 지난 세월을 돌이켰다. KEC 노동자들은 지난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을 제기했지만, 인권위의 권고 이후에도 'S등급'으로 승진하는 여성들은 매년 1~2명에 불과했다.
김 부지회장은 "저와 저의 동료들은 20년, 30년 넘게 일했지만 여전치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 국가의 최저임금이 저희가 받는 월급의 기준"이라며 "저소득층의 다수가 여성노동자들이고 그들의 대다수가 최저임금을 받는다. 미친 듯이 뛰는 물가에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해 주시고 남녀 차별하는 사업주들을 모조리 처벌해 주시길 바란다"고 토로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에 따르면 2023년 1047명의 여성노동자가 응답한 설문조사에서 최저임금 이상을 받고 있다고 응답한 여성노동자는 10.6%에 불과했다. 응답자들은 평균 19.8년의 노동격력을 갖고 있었지만 이 기간 중 반 이상은 최저임금이나 최저임금 미달의 임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자들은 자신의 임금 인상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묻는 질문에 '호봉'이나 '승진'이 아닌 '최저임금 인상'을 가장 많은 답으로 내놓았다.
여성이 저임금, 비정규직 등 노동시장 내의 '차별지대'로 계속 흘러들어가고 진입한 현장 내에서도 승진, 채용, 임금차별 등에 노출되는 현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여성노동자들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성차별 완화 카드인 셈이다.
밍갱(활동명) 한국여성노동자회 미디어기획국장은 "(현 상황에서) 최저임금은 여성노동자의 실질적인 임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며 최저임금 인상은 이토록 극명하게 드러나는 성별임금격차를 해소할 가장 중요한 방안"이라며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핑계 삼아 최저임금을 동결하려는 것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여성노동자들의 목줄을 쥐고 생계를 위협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2024년 최저임금으로 시급 1만 2천 원을 주장하고 있는 노동계는 △올해 최임위가 발표한 비혼 단신 가구의 최소 생계비(241만 원) △전년대비 상승한 물가의 지나친 상승폭(주거수도광열비 22.3%, 음식 숙박비 14.8%, 교통비 8.8%, 지난해 물가상승률 5.1%) 등을 들어 "1만 2천 원의 최저임금은 현실의 물가상승률에 비해 결코 지나친 요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2023년 현재 최저임금 수준 월급은 최소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201만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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