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삐삐선을 풀어다오
충남 아산시 배방면 공수리
내 고향 성재산 방공호에서
72년 전 나를 다시 보는구나
도민증을 발급해준다고 해서 모인 우리는
곡물창고에 갇힌 다음 날 무참히 학살되었지
이유는 인민군 점령 당시 부역을 했다는 것
난을 피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살았을 뿐인데
경찰과 치안대는 우리가 인민군을 도왔다며
자신들과 다르다는 앙심 가득한 손으로
에이원과 카빈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지
그리고 이 방공호에 마구 던져졌지
무릎조차 펴지 못하고 버틴 72년이구나
이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먼저 이 손목의 삐삐선을 풀어다오
자꾸만 골을 파고드는 녹슨 탄피도 치워다오
가족이 모두 몰살당해 돌보는 이 없을
저 안쓰러운 유골들도 보살펴다오
그래 이제는 부디
가슴에 묶인 통한의 세월을 풀어다오
비참하게 버려진 800여 명을 호명하며
잔악한 총검 앞에 원통하게 새겨진
우리 모두의 상처와 고통도 보듬어다오
나를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
우리 자손들을 위하여,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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