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중등 교사 시절에 시험 철이 되면 참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많다. 초임 교사 시절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시절이었다. 흔히 말하는 ‘가리방(がり版)’이라고 해서 등사판이라는 것이 있었다. 기름종이에 철필로 써서 기름 종이를 하나하나 손으로 밀어 찍어내는 방식으로 시험지를 인쇄했었다. 그러다가 옵세트 인쇄기가 나와서 손으로 쓴 것을 복사해서 활용하였고, 그 후 한참 지나서 컴퓨터(물론 이전에는 워드프로세서라는 것이 있었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로 문제를 만들게 되었다. 그때 많은 교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로 시험 문제를 출제하면서 점독(글자와 구두점까지 읽는 것)을 하면서 문제를 확인해야 하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교사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한 과목을 여러 사람이 가르치다 보면 답에 대한 의견이 다를 때도 있다. 필자도 아주 사소한 일로 문제를 출제하다가 다툰 적이 있다. 바로 “답을 ( ) 안에 쓰시오.”라고 해야 하는지 “답을 ( ) 속에 쓰시오.”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 충돌이 일어났다. 얼핏 보기에는 둘 중의 하나를 써도 좋을 것 같은데, 생각하기에 따라 ‘안’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시 보면 ‘속’도 틀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이럴 경우에는 서로 반대말을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안' <=> '밖'
♧'속' <=> '겉'
이렇게 상대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안’과 ‘속’을 동의어로 보는 사전도 많이 있다. 그래서 ‘안’을 찾아보면 “1. 속(물체의 안쪽 중심부분), 2. 내부(물건이나 공간의 안쪽 부분), 3. 가운데(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한 복판)”이라고 나타나 있다. 그래서 “팔은 안으로 굽더라고 역시 내심으로는 서희를 위해 걱정되는 모양이라 생각하고 길상은 속으로 미소한다.(박경리, <토지> 중에서)”와 같이 쓸 수 있다. 이 예문을 보면 ‘안으로 굽는다’와 ‘속으로 미소한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안’과 ‘속’의 구분을 쉽게 할 수 있다.
우선 ‘안’은 1,2차원적 선으로 추상화할 수 있는 사물의 한 부분은 가리킨다. 그냥 평면적인 선을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면 '터널 안, 10년 안, 네모 안, 울타리 안'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예문을 하나 더 보자.
태호는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포장마차 안에는 퇴근길에 간단하게 소주 한 잔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와 같이 쓸 수 있다. 한편 속은 ‘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면서 좀더 폭 넓게 사용된다. ‘속’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물체의 안쪽의 중심”이라고 나타나 있다. 또한 “어떤 현상이나 상황의 안이나 가운데, 어떤 이야기나 영화의 내용”이라고 나타나 있다. 예문으로는
주머니 속에는 전세계약금이 들어 있다.
속 빈 강정이란 말이 있더니 네놈이 그렇구나.
멀미가 심해 속이 올각올각한다.
와 같이 쓴다.
'속'은 입체적인 3차원의 것에 어울린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사과 속. 머릿속, 바다 속, 땅속, 물속' 등과 같다. 사람들은 뭔가 힘든 일을 당하면 ‘속상하다’고 표현한다. 이런 경우 ‘안이 상하다’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속은 꽉 차야 어울린다. 배추 속, 머릿속 등은 꽉 차 있어야 한다. ‘머릿속이 빈 사람’은 세상에서 대우받지 못한다. 이런 사람을 보고 ‘머리 안이 비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한편 '안'은 평면적인 공간이면서 비어 있어도 됩니다. '버스 안, 집 안, 방 안' 등은 비어 있어도 상관없다.(김경원, <국어실력이 밥먹여준다>에서 발췌)
어떤 단어가 있을 때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제일 좋은 방법은 사전을 찾는 것이고, 그것도 귀찮을 때는 반대말을 알아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질 때가 있다. 단어의 의미는 상대어, 유사어, 반의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면 명확해진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