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수많은 국가가 우리나라에 도움을 주지 않았느냐."(윤석열 대통령, 20일 국민의힘 지도부와 만찬에서)
굳이 따지자면 6.25 때 우크라이나(구소련)는 북한의 편에 선 적국이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북한을 위해 싸운 우크라이나 전쟁에 개입하는 걸 6.25 때 국제 원조와 유엔군 참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군사 지원을 시사한 윤 대통령의 발언을 '한미 동맹' 공고화를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분석하려는 접근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해석 자체가 무리수라는 걸 윤 대통령과 용산은 연이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민의힘 지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왔다는 윤 대통령의 6.25 언급은 그가 전쟁을 이상주의와 낭만주의로 접근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자유'와 '자유 세계의 연대' 같은 무형의 '가치'를 취임 때부터 강조해 온 윤 대통령은 국제 관계를 '정의'와 '의리'로 이뤄진 가상의 세계로 설정한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실이 향후 우리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이 "러시아의 행동에 달렸다"고 말한 것도 전쟁 불개입 조건을 상대의 '선의'에 걸어버린 셈인데, '물컵 나머지 반잔'으로 상징된 대일 외교에서 우리가 목격한 바대로 나이브함, 그 연장선 위 어디쯤에 윤 대통령의 인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점은 러시아가 '물컵 나머지 반잔'을 채우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만약 외교적 실리주의를 택했다면, 굳이 대통령이 외신 인터뷰에서 '군사 지원 시사'를 전 세계에 공표할 필요가 없다. 군사 지원과 관련된 '용산의 고민'은 미국의 기밀 문건 유출로 이미 세상에 알려졌고, 실제 미국에 포탄을 빌려주고 폴란드에 포탄을 수출하고 있는 정황도 드러난 바 있다. 대통령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지금 한국은 미국의 의도를 읽고 또 반응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굳이 '말'을 꺼내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4강 중 2강(중국, 러시아) 관계에서 불필요한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한 30년 북방외교의 일관성과 원칙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이런 건 선전포고를 앞둔 국가 지도자의 행동이지, 7000킬로미터 떨어진 타국의 전장과 관련해 강대국들의 이익이 얽힌 냉엄한 '외교판'에서 취할 행동이 아니다.
듣기 평가에 이어 읽기 평가도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 러시아가 발끈하자 대통령실은 19일 밤 언론 공지를 통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의 언급은 가정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며 "윤 대통령의 로이터 인터뷰 내용을 정확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고 했다. 설마 읽을 줄 몰라서, 인터뷰 내용을 해석하지 못해 발끈했을까. 대통령실은 러시아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언급하자 "러시아 당국이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해서 한국 입장에 대해 코멘트를 했다"고 말했다. 전쟁에 개입할 것이냐 말 것이냐 갈림길 앞에서 말장난을 하고 있다. 북한에서 '남조선이 도발하면 핵으로 응수하겠다'고 하면 그때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코멘트 하지 않겠다'고 할 것인가?
용산의 반응과 정부의 반응에 온도차가 확연히 느껴지는 것도, 로이터 발언이 대통령의 '호기'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 준다. 윤 대통령의 발언 이후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한발 더 나아가 "앞으로 한국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러시아에 달렸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국방부는 "(우리 정부의 기존 입장과)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제 대통령실에서도 (살상 무기 지원은 없다는 지난 1년간의) 정부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설명드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용산이 상황 변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국방부는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위(용산) 아래(부처) 손 발이 잘 안 맞는다.
민간인 대량 살상은 앞으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말인가? 이미 민간인 사망자가 2만 명을 넘어섰다. 그래놓고 "러시아 당국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코멘트한다고 대꾸했다. '민간인 대량 살상'은 몇 명 수준인지, '전제 조건' 자체도 모호한데 "정확히 읽어보라"고 한다. 이러니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말(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이 나오는 것이다.
대통령의 주변엔 직언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19일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후 "이미 민간인 대량학살은 벌어졌다"는 지적이 나왔는데도, 20일 여당 지도부를 만나 "우크라이나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면, 방어용 무기 지원에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정부 내에서는 러시아의 제재 우려에 대해 "약소국 러시아가 강대국 한국을 제재하나"(김현욱 국립외교원 미주연구부장)라는 말도 나왔다. 대통령은 과연 국제 사회와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물컵 반잔'을 기다리는 외교에서, 이젠 '선제 도발' 외교로 가고 있다. 일단 내지르고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외교는 대일 외교에서 충분히 봤다. 그런데 이게 가장 우려하는 형태로 또 다시 등장한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사고'를 쳤는데 아무도 '사고'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안감은 더 커진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우리 군 전력의 북한 집중을 흩트러 놓을 수도 있는 문제다. 당장 국방부는 2019년 있었던 러시아 군용기의 동해 카디즈(방공식별구역) 침범같은 사태에 대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이상의 도발에도 대비해야 한다.
결국 윤 대통령은 우리 '안보 전략'의 입지를 줄이고 있다. 말 한 마디가 '국민 안전'이라는 포괄적 안보 개념을 좁혀 놓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4강 중에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자극하는데 정부 말대로라면 아직 우리는 "나토 이상의" 방어 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 '나토식 핵공유' 프로그램을 제공할지 여부도 결론나지 않았다. 현재 한반도 안보 상황은 변한 게 없는데, 대통령이 입을 열자 실익 없는 일들이 연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외교적 발언은 치밀한 내부 조율을 거쳐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없는 외교적 발언은 '도발'이거나 '허세'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 가능성을 언급하기 전, 국민적 이해를 구한 적이 없다. 이 역시 '대일 외교'에서 본 바대로다.
1600년대 초 돈 키호테가 활약하던 시절 기사도는 우리로 치면 6.25 전쟁이나 일제 시기 독립 투쟁의 유물 같은 것이다. 전장에 총과 포탄이 등장하며 기사들이 칼 차고 말 타고 수행하던 전쟁의 시절이 지나가던 때, 기사도 문학에 빠진 돈 키호테는 칼 차고 말 타고 세상에 튀어 나온다. 앙상한 말 한마리에 올라 우스꽝스런 농부 산초를 종으로, 동네 여성을 '공주'로 술집을 '성'으로 여긴 채 위대한 모험을 떠난다. 철 지난 대의와 로망의 과대 망상에 빠져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돈 키호테는 말년에 이성을 찾고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세상이 난폭해지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은 '돈 키호테'가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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