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 국회 앞에 모인 인권·시민단체들이 "법무부가 발의한 난민법 개정안이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있다"라며 개정안의 폐기를 촉구했다. 국내 난민 당사자들도 직접 목소리를 전했다.
난민인권네트워크, 대한변호사협회 등 80여개 인권·시민단체들은 이날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난민혐오를 막고 제도를 발전시켜 가야할 정부가 앞장서서 혐오를 선동, 이용하여 (악법)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라며 "정부는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난민법 개악안을 즉시 폐기하라"고 주장했다.
앞서 법무부가 지난 2021년 12월 발의한 난민법 일부개정법률안에는 난민불인정 결정을 받았거나 난민인정 결정이 취소된 이들이 난민인정 '재신청'을 하려할 때 21일 이내에 '난민인정재심사적격여부 심사'를 먼저 받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로 담겨 있다.
이때 재심사 적격 여부는 해당 재신청자에게 '중대한 사정변경이 있는지'로 판단된다. 난민 당사자 입장에선 한 번 불인정 판정을 받으면 "제대로 된 심사를 받지 못한 경우에도" 재심사 청구가 어려워지는 셈이다.
당시 법무부는 해당 조항(난민인정재심사적격여부 심사)의 이유를 "난민신청자의 난민제도 남용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난민법 개정안은 졸속 추진 … 법무부가 거짓, 오류 자료로 개정안 정당화"
이날 단체들은 "난민 인정률이 극도로 낮은 " 한국사회에서 법무부의 현 정책은 "99%의 난민신청자를 남용적 신청자로 취급하며 난민의 심사 기회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조치라 반박했다.
실제로 현재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매년 1%를 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저수준이다.
대한변협 난민이주외국인특별위 소속 이상현 변호사는 특히 "지금의 난민법 개정안은 법무부가 잘못된 통계해석과 오류 있는 해외 법제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며 개정안의 법률상 오류를 지적했다.
가령 개정안 발의 당시 법무부는 "한국 내 난민신청자 중 다수는 박해 우려가 낮은 국가(러시아, 중국 등) 출신"이라며 국내 난민신청 건수 중 다수가 '남용적 난민신청'으로 우려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러시아, 중국 등에서도 △성적지향 △야당활동 △강제동원(러시아) △소수민족(중국) 등으로 인한 박해를 이유로 "난민신청자 수가 몇 년 전부터 국제적으로 급증하고 있다"는 게 이 변호사의 설명이다.
2019년 기준 러시아 출신 난민신청자들에 대한 난민인정률은 미국이 41.3%, 네덜란드는 47.6%에 달했다. 같은 해 기준 중국 출신 난민신청자들에 대한 난민인정률도 미국은 32.2%, 프랑스는 47.4%였다. 반면 한국의 난민인정률은 양국 출신 모두에 있어 0%다.
이 변호사는 또한 "법무부가 해외제도에 대한 잘못된 해석자료를 국회에 전달했고, 국회에서도 이것을 바로잡지 않은 채 법안을 심사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법무부는 개정안에 담긴 '난민신청 취하간주제도'가 독일 난민법 제33조 제3항에도 담겨있다고 국회에 보고했는데, 실제 독일법 원문에는 "난민신청이라는 단어도 취하라는 단어도 없다"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국회와 법무부가 법개정을 졸속 추진하고 있는 것"이라며 "난민법이 우리 법체계에 부합하면서 정책적으로도 타당하게 개정되려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개정안 일찍 통과됐으면, 우리도 추방됐을 것" … 난민인정 당사자들의 호소
이날 현장엔 수년 동안 난민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재신청 등 절차를 통해 난민지위를 인정 받은 국내 난민 당사자들이 참여해 난민법 개정안 폐기를 직접 촉구하기도 했다.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의 난민불인정 판정 취소 판결로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파키스탄 출신 난민 야쿱 샤자드 씨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자국으로 돌아갈 경우 목숨이나 자유를 잃고 가족과 찢어지며 부당한 처벌을 당하고 미래를 상실할 난민들이 수많은 위험을 맞이할 것"이라며 "아시아 최초의 난민법 제정국가임을 자랑했던 한국 국회의 현명한 판단을 요청한다"고 호소했다.
자국 내 테러행위를 피해 한국에 온 야쿱 씨는 지난 8년 동안 난민신청, 재신청, 행정소송 등의 절차를 밟은 끝에 가까스로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그의 딸은 본국에서의 테러로 청각적 장해를 입기도 했지만 한국 출입국 당국은 8년간 야쿱 씨가 제시한 "수많은 증거들"을 받아들이지 않아왔다. '재신청 절차를 막아버리는' 개정안이 몇 년 만 더 일찍 통과됐으면 당장 아내와 딸과 함께 본국으로 추방됐을 가능성이 높은 사례다.
2016년 자국의 종교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신청을 했지만, '종교적 관념이 있다고 하기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난민불인정 판정을 받은 이란 출신 난민 김민혁 씨도 비슷한 사례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 씨는 한국 교회에서 개종한 후 교회 동료들의 권유로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바꿨지만, 그가 '종교의 자유'를 난민인정사유로 인정받기까지는 만 3년이 소요됐다.
이날 현장을 찾은 김 씨는 "저 또한 난민 재신청 제도가 없었더라면 현재 한국에 있지 못하고 본국에서의 박해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난민 재신청 제도를 막는다면 제대로 된 심사 자체를 진행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김 씨는 '주변에도 부조리해 보이는 난민심사 사례가 있었는가' 묻는 <프레시안>의 질문에 "저희 아버지만 해도 그렇다. 아버지의 경우 저보다 더 활발한 (교회) 활동을 하셨지만, 저보다 늦은 2021년에야 소송 끝에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라며 "난민신청자들에게는 익숙한 경험"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국제사회는 한국 난민보호에 '우려' 표시 … "국제인권규약 지켜야"
2023년은 국내 난민법 시행(2013)으로부터 10주년이다. 정부는 지난 2012년 난민법이 최초로 제정될 당시 해당 법이 "아시아 최초의 독립된 난민협약의 이행법률"임을 강조한 바 있다. 법이 시행된 2013년엔 법무부도 "인권국가로서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체들은 이날 "법무부는 더 이상 대한민국을 '인권국가'라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물으며 정부의 모순적 법안 추진을 비판했다.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소속 김진 변호사는 "전 세계 평균 난민인정률이 약 35%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난민인정률(1%)은 심각한 상황"이라며 "법무부의 부실심사 지시, 난민전담공무원의 난민면접 조작 사건 등 난민심사과정에서의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었고, 대부분의 난민신청자는 신청과정에서 어떠한 법률 조력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면접을 위한 통역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지난달 진행된 제4차 국가별 인권상황 정례검토(UPR)에선 98개 유엔 회원국이 한국에 '난민인정률이 너무 낮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99%의 난민신청자를 남용적 신청자로 취급하며 난민의 심사 기회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법무부 개악안은 절대로 통과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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