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대법원 배상판결 이행을 위해 윤석열 정부가 피고인 일본 기업은 참여하지 않는 방안을 내놓은 뒤 일본과 경제·안보 협력을 가속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현 국면이 을사늑약이 있었던 1905년 당시의 국제정세와 유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13일 정의당 강은미 국회의원과 무소속 김홍걸 국회의원,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이 '강제동원 정부해법, 검증한다'를 주제로 주관한 토론회에서 발표를 맡은 남기정 서울대학교 교수는 "일본에서 '극동 1905년 체제'론이 제기됐다"며 현 국면이 이 체제를 유지·강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남 교수는 일본에서 거론되는 1905년 체제에 대해 "러일전쟁 결과 한반도와 대만이 일본과 함께 힘으로 유지되는 하나의 진영에 묶여 동아시아 세력균형 체제를 이뤘고, 일본의 패배로 이 체제가 흔들렸는데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극동 1905년 체제'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 사실상 하나의 제도로 작동하는 실체"라며 "여기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사실은 불가피했던 일로 처리되는 것"이라며 이 논리가 식민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론으로 귀결된다고 해석했다.
남 교수는 한미 연합 군사 훈련과 그에 대응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데, 이같은 상황적 요인 역시 체제론이 힘을 얻게 되는 이유라고 밝혔다.
이러한 가운데 남 교수는 지난 6일 윤석열 정부가 강제동원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하면서 "과거사를 봉인하고 경제협력을 매개로 한일관계를 안정화하여 한미일 안보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작동시키는 구조가 복원됐다"며 1905년 체제로 돌아가는 전기가 마련된 부분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일본이 설정한 '국제법 위반'론을 수용함으로써, 1910년에 이르는 모든 조약과 협정들이 '원천' 무효라는, 즉 식민지배가 불법이었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과 그 논리적 귀결로 내려진 대법원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 교수는 지난해 9월 27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한덕수 국무총리가 기자간담회 당시 강제동원 판결에 대해 "국제법적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이해되지 어려운 일이 일어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현 정부가 일본의 이러한 인식을 수용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한국이 한미일 군사 협력을 강화한다면, 이는 국가 간 동등한 위치에서의 협력이 아니라 미일 동맹의 하부구조로 한국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김준형 한동대학교 교수는 "한국은 3각 동맹에서 평등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하부구조로 편입되어 군사전략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전위대 또는 돌격대의 역할을 하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교수는 "지난 30년 간 대륙으로 진출해서 황금의 시대를 열었고 보수·진보정권 할 것 없이 동맹 외교를 근간으로 하되, 다자외교의 지향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방형 통상 국가로 발전해 왔는데 윤석열 정부는 본격적인 진영 및 블록외교를 하고 있다"며 "우리의 직접적 위협은 북한인데 이것을 중국과 러시아로 확대하는 것이 과연 우리 안보를 위한 것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그는 "중국이 아니라 단지 북한을 상대하는 목적이라면 한미 연합군의 전력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친다는 게 객관적 수치로도 입증된 것"이라며 한일 관계 개선과 그에 따른 안보 협력은 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의 구상에 따른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내놨다.
피해자 보유 채권은 '위자료'...제3자 변제 허용 어려워
윤석열 정부는 지난 6일 입장문을 통해 원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대법원의 판결로 받은 채권인 배상금을 피고인 일본 기업이 아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대신 변제하는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해마루 김세은 변호사는 이날 토론회에서 "피해자들이 피고 기업에 대하여 가지는 채권은 그 역사적인 의미를 차치하고도 '위자료'라는 자체만으로 단순한 금전채권과는 성질을 달리하는 측면이 있다"며 제3자 변제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정신적 손해를 회복하기 위한 위자료의 성질이나 기능 등에 비추어보면, 피해자들에 대한 피고 기업의 채무는 급부자의 인적 요소에 중점을 두고 있는 채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며 채무 이행을 제3자가 아닌 피고기업이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언급했다.
그는 "가해자는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채무의 이행을 거절하고, 피해자는 제3자의 변제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상황에서, 이해관계 없는 제3자가 억지로 피해자 앞으로 돈을 공탁하고 이로써 피해자가 위자료를 받은 것으로 보겠다는 것은,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와 함께 채무자인 일본 기업이 대법원 판결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제3자가 이러한 의사에 반해 채무를 대신 변제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 변호사는 "이해관계 없는 제3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할 수 없는데, 채무자의 반대의사는 제3자가 변제할 당시의 객관적인 제반 사정에 비추어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함부로 채무자의 반대의사를 추정함으로써 제3자의 변제 효과를 무효화시키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판례"라고 소개했다.
그는 "피고 기업은 대법원 판결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재단의 채무 변제가 채무자의 의사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다만 소송 실무에서는 채무자가 제3자 변제를 반대하는 의사를 가졌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 없는 한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재단에서 1965년 청구권 협정을 통해 이득을 본 기업들을 대상으로 기부금을 모집한다면 이 자체가 불법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김창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포스코 등 한국 기업들이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에 따른 손해배상 채무를 대신 변제하게 하기 위해 출연을 하는 것은 배임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피고인 일본 기업은 재단에 기부금을 내면 배임이 되어 낼 수 없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대법원은 정부가 주장하는 '외교 교섭'이 종결되었으므로 매각명령에 관한 재항고 사건에 대해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 판결이 집행되게 함으로써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라며 대법원 판결에 따른 강제집행이 신속히 이행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이 공동으로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미래청년기금'과 관련, 2010~12년에 피고인 일본 기업 측에서 제시했던 방안으로 이미 거부당한 바 있다는 진술이 나왔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미쓰비시 중공업과 2010년 2회, 2011년 8회, 2012년 4회 등 총 16차례의 협상을 진행했었는데 2011년 7월 4일 도쿄에서 열린 7회 협상에서 미쓰비시 측이 이와 유사한 지원을 언급했다고 전했다.
당시 미쓰비시 측은 "당사(미쓰비시)는 원고 할머니들의 뜻이 다음 세대에 이어질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시책을 강구할 방향을 고려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검토 중에 있으나, 예를 들어 원고들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미래에 전하기 위해 한국의 젊은 세대를 위한 학술 교육지원 등의 형태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피해 할머니들을 지원했던 지원단은 "학술 교육 지원을 함으로써 할머니들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 놀랍다. 매우 유감이다"라는 입장을 보였으나 미쓰비시 측은 2012년 14회, 16회차 협상에서도 계속 이같은 주장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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