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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또는 협박'이 없어도 강간은 강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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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또는 협박'이 없어도 강간은 강간이다

[인권의 바람] 미룰 수 없는 비동의 강간죄로의 개정

3.8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열린 제38회 한국여성대회에 '비동의 강간죄'를 내 건 부스가 여러 곳 있었다. 각 단체들이 연 부스는 고질적인 가부장제 문제부터 따끈따끈한 최신 여성 이슈들을 다루었는데 특히 형법 297조 강간죄 개정 관련 안내나 프로그램이 많았다. 그만큼 여성계가 이를 시급한 사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비동의 강간죄 개정 운동의 목표는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동의가 없이 성관계를 했다면 강간임을 인정하고 이를 법제화하자는 것이다. 현행 형법 297조는 '폭행이나 협박'을 강간죄 구성요건으로 하고 있어 폭행·협박이 없는 강간의 처벌 공백이 존재한다. 현행법은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이 없이도 일어나는 강간, 위계관계나 피해자의 취약성을 이용하여 일어나는 강간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은 법과 현실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시도이다.

비동의 강간죄 이슈는 이미 최근 사회적으로 환기되었다. 지난 1월 26일 여성가족부는 형법 297조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여부'로 개정하는 안의 검토 계획이 포함된 제3차 양성평등기본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법무부는 "개정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냈고, 여가부는 발표 9시간 만에 입장을 철회하였다.

강간죄의 현주소

현행 형법은 70년 전 제정되었다. 강간죄 구성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은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여야 성립되고 있다. 이는 강간죄를 피해자의 저항유무를 심문하는 죄로 만들었다.

1990년대부터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 2018년 미투운동의 흐름에서 특히 안희정 사건을 계기로 논의가 활발해졌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20대 국회에서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하는 형법 개정안 10개가 발의됐으나, 국회 회기 만료로 조용히 폐기되었다. 21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은 여러 개 발의되었다. 지난 2월 8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건설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비동의 강간죄의 과제를 끝없는 논의로만 남겨두었다. 그렇게 비동의 강간죄는 법사위에 아직 계류 중이며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폭행 또는 협박'이 없어도 강간은 강간이다

그간 국제인권기구는 꾸준히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할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2011년 제7차, 2018년 제8차 최종견해에서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 여부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하기를 권고했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국가인권위원회 송두환 위원장은 "최근 여성가족부가 형법 상 강간죄와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과 관련한 개정 계획을 제3차 양성평등기본계획에 넣어 발표했으나 법무부의 신중 검토 의견에 후퇴하는 조짐"을 보인다고 지적하는 성명을 내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의 조사(2019)에 따르면,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전국 성폭력상담소 66곳에 접수된 강간 사례 1030건 중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었던 사례는 71.4%(735건)였다. 현행법이 강간으로 인정하는 직접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던 경우는 28.6%(295건)에 불과했다.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을 겪은 피해자들의 경험을 심층면접으로 분석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2020)에 따르면, 대다수의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관계에서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가해자에게 맞춰주어야 하는 맥락이 있는 경우, 종교 지도자-신도 관계 등 가해자가 권력의 위치에 있는 경우, 금전적인 이유 등으로 가해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대다수 강간 피해가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이 일어남이 현실이다. 강간을 협소하게 정의한 법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 비동의 강간을 인정하는 법이 있다면, 신고조차 하지 못했던 70%의 피해자에게 강간이 강간임을 알려주고 가해자 처벌을 당연하게 요구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또한 취약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Yes' means Yes 'No' means No

"동의 여부를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습니까?"

비동의 강간죄 관련 어느 기사에 달린 댓글이 아닌,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 논평에서 나온 문장이다. 비동의 강간죄에 반대하는 이들은 어떻게 피해자의 주관적 의사만을 범죄 성립의 구성요건으로 할 수 있느냐, 어떻게 동의 여부를 입증할 것이냐 꼬투리를 잡는다.

우리는 역으로 묻는다. 동의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억지로 했다면 그것이 성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외면한 채 가해자의 처지에만 공감하는 사법제도의 문제를 직시할 때가 아닌지 물어야 한다.

"'Yes' means Yes 'No' means No"라는 말은 성폭력 사건에서 중요하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이는 강간죄 구성요건이 되어야 한다.

비동의 강간죄를 반대하는 이들이 처벌에 방점을 두고 비난한다. 사회가 가해자 중심 문화이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가해자 중심 문화와 언어 속에서 강간 피해 사실을 피해자가 자기 검열해 신고도 못 하는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No"라고 말하지도 못 하는 위계관계에서 강제된 성폭력을 분명히 강간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은 사회의 강간‧성폭력 개념과 인식을 바꾸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이제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잠깐 별똥별처럼 지나가는 정치 이슈 혹은 정쟁의 도구가 아니라 현실화할 때다. 비동의 강간죄 법제화는 강간 피해를 당했으나 신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을 피해자나 재판 중에 부당한 질문에 시달린 피해자에게 정의를 돌려 줄 것이다. 피해자가 아닌 성폭력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길을 열 것이다.

▲지난해 9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페미사이드 규탄 집회에 참여한 한 시민이 들고 있는 피켓. ⓒ프레시안(한예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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