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대법원 배상판결 이행에 대해 피고인 일본기업은 참여하지 않는 방안을 마련한 가운데, 피해자인 원고 측 대리인단과 지원단체는 정부의 방안이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에 아무런 효력을 줄 수 없다면서 정부안에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들을 법률적으로 끝까지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6일 원고측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해마루의 임재성 변호사는 서울 용산에 위치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정부의 입장 발표는 (원고 측이 피고인 일본 기업의 한국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고 밝혔다.
정부는 앞서 이날 오전 행정안전부 산하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 재단(이하 재단)'이 기업들로부터 자발적인 기금을 받고, 대법원 판결에 따른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는 방식을 골자로 하는 해법안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면서 정부는 만약 원고인 피해자가 끝까지 판결금을 받지 않는다면 공탁을 통해 피해자가 가지고 있는 채권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법리적으로는 (원고가) 끝까지 변제를 수령하지 않는 경우 공탁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다"며 국내 유수 전문가들의 검토 및 자문을 거쳤다고 밝혔다.
하지만 임 변호사는 "(정부) 해법에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에 대해 한국 정부가 공탁을 통해 일방적으로 채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면서 "만약 재단이 일방적으로 피해자 의사에 반해 공탁을 하고 집행 사건의 공탁서를 제출할 경우 집행 과정에서 무효를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세은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역시 이날 기자회견에서 "민법 469조 2항에 따르면 이해관계 없는 제3자는 채무자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고 돼있는데 재단은 이해관계 없는 제3자"라며 "당사자 의사에 반하는 변제방식과 공탁은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한국 정부가 당사자 의사에 반해 공탁을 검토한다는 것은 새로운 가해행위"라며 "피해자가 (대법원으로부터 판결받은) 위자료의 의미는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때 그것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돈으로나마 위로한다는 의미다. 이를 누구나 돈을 줘도 괜찮은 채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원고 측이 피고인 일본 기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채권은 어디 가지 않는 권리다. 10년에 한 번씩 소멸시효 극복 위한 간이한 소송만 하면 계속 이어진다. 단단하고 오래갈 수 있는 권리"라며 "외교부 측과 만날 때도 (대법원의) 확정 판결 받은 것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다. 피고 기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 판결에 대한 피해자들 권리는 여전히 가지고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굶어 죽어도 이런 돈 안 받아"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오전 정부의 방안을 설명하면서 "많은 유족분들께서 우리 정부의 구상에 대해서 이해를 표해주셨고, 또 상당수의 유족분들은 이 문제가 조속히 종결되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주셨다"고 밝혔다. 하지만 피해자 중에서는 이를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보이고 있어 향후 법적 분쟁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쓰비시 중공업으로부터 배상 판결을 받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는 이날 오후 광주 5·18민주광장에서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광주전남역사정의평화행동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억울해서 지금 죽지도 못한다"며 "굶어 죽어도 이런 식으로 안 받겠다"고 명확한 반대 의사를 표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역시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제철을 상대로 승리한 이춘식 할아버지의 가족분들과 통화했는데 이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분들에게 떳떳한 결과를 바란다면서 정부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며 당장 고령의 피해자들이 정부 안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대리인단 및 지원단체는 상당수 피해자와 유족들이 정부 안에 호응하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확정판결 받은 분들이 원고 기준 14명, 피해자 기준 15명인데 지금 정부안에 대해, 즉 일본의 사과와 (기금) 출연 없이 한국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정도에 대해 긍정적 의사를 말씀하신 분은 절반 이하"라고 전했다.
그는 "생존 중인 고령 피해자 3명은 모두 한국 정부안에 대해 명확한 반대 의사를 보였다"며 "따라서 고령의 피해자를 위해 조속한 해결이 필요했다는 정부의 설명은 정부가 발간한 자료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세은 변호사는 "저희가 담당하고 있는 소송에 서울과 광주지역 총 15명인데 광주 쪽 담당 변호사와 통화했을 때는 그 지역에는 명확하게 정부 안에 대해 찬성의사를 밝히신 분 없다고 했다"며 "서울에서는 9명 중 4명이 정부안에 찬성 및 긍정적 평가를 했다"며 정부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피해자 또는 유족은 절반이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박진 장관이 이야기한 대로 피해자 상당수가 빠른 해결을 바라는 것은 맞다. 그런데 이는 정부에 동의할 수 있는 안을 가져와서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해달라고 말한 분도 많다"며 "한국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언급 없이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빠른 해법을 원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전달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임 변호사는 외교부가 피해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한국 정부가 노력해왔고 어려운 상황이며 앞으로도 일본 기업으로부터 사죄 및 배상을 받도록 노력하겠다. 하지만 안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되고 다시 설명드리겠다"라고 말했다며 정부가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일본 기업의 이야기를 했다는 점을 확인하기도 했다.
대리인단은 피해자인 원고가 정부 해법에 동의하는 경우 정부 및 재단과 협의하여 이후 채권소멸(포기)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면서, 외교부 및 재단은 대리인과 협의하여 해당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리인단은 피해자가 정부의 안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이전과 같이 한국 내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리인단에 따르면 현재 확정판결사건의 집행절차는 3건 가운데 2건에 대해서 대법원 재항고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들은 채권자가 다른 방식으로 채권 만족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하에 대법원이 판단을 미뤄왔다면, 이제는 그러한 가능성이 있는 외교적 교섭이 종료됐기 때문에 채권자가 집행절차를 통해 채권 만족을 희망한다는 의견을 밝힐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대리인단은 한국 내 일본 피고 기업 자산에 대해 신속한 매각 결정 확정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대리인단은 이날 미쓰비시 중공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추가적 집행 절차도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소송(대법원 2013다67587호 확정 사건) 원고 중 일부(피해자 기준 3명)는 2021년 9월 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미쓰비시중공업이 엠에이치파워시스템즈코리아 주식회사(이하 '엠에이치파워시스템즈코리아')에 대하여 가지는 채권에 대하여 압류 및 추심명령을 신청한 바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그해 9월 10일 위 채권에 대한 압류 및 추심결정을 했고 15일에는 이 결정이 해당 회사에 송달되어 효력이 발생했다. 압류 및 추심명령을 받은 채권은 해당 회사가 미쓰비시중공업과 글로벌 IT 시스템지원 및 사용과 관련하여 IT 서비스 용역계약 등을 체결하고 지급하는 지급수수료 약 7000만 원이다.
대리인단은 "피해자들은 그동안 한일 정부 간 외교적 협의 상황 등을 지켜봤고, 그 최종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는 피해자들의 경우 위와 같이 기존의 집행 절차를 신속히 진행하고 새로운 압류 및 추심명령에 따른 추심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피고 기업으로부터 배상을 받고자 한다"며 정부의 이날 결정이 이러한 피해자들의 권리 실현을 방해할 효력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편 지원단체와 대리인단은 이날 한국 정부의 결정에 대해 "'잘못한 자가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너무도 당연한 피해자들의 요구는 '돌아가시기 전에 아무 돈이나 받으시라'라는 모욕적인 답변으로 돌아왔다"며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또다시 희생을 강요하며 피해자들의 인권과 존엄을 짓밟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일본의 선의에 기대어 '성의 있는 호응', '기여'라는 표현을 고집하며 숙제검사를 받는 학생처럼 일본 정부에게 저자세로 일관하여 일본의 사과도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의 그 어떤 재정적 부담도 없는 오늘의 굴욕적인 해법에 이르렀다"고 규탄했다.
이들은 "지금도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가 25년 전 과거 총리의 담화를 또다시 되풀이한다고 어느 누가 그것을 진정한 사죄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일본조차 그것을 사죄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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