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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천황' 위한 거룩한 죽음? 개죽음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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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이 '천황' 위한 거룩한 죽음? 개죽음 아니고?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9] 일본 군국주의의 심장부 야스쿠니 신사 (上)  

한국에는 국립현충원이 있고, 미국엔 알링턴 국립묘지가 있다. 정치인들이 가도 전혀 논란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의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는 다르다. 국립묘지가 아니다(일본엔 국립묘지가 없다).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과 불편한 관계를 빚게 되는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가 야스쿠니 신사다.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에 나설 때마다 동아시아 하늘엔 먹구름이 낀다. 특히 민감하게 눈 여겨 보는 것이 일본 총리를 비롯한 주요 우익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다.

그들은 말한다. ‘개인 자격’으로 참배하는 것이라고. 그들이 속한 정파가 내거는 극우적인 정책, 그리고 그들의 신사 참배로 비롯된 파장을 생각하면 꼭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은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해서 행동 하나마다 조심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정치지형에서 ‘극우 집단’에 속하는 자들이 야스쿠니를 들락거리는 것은 선거에서의 득표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큰 우익 조직인 '일본회의'는 '일본유족회' 등 야스쿠니를 성지로 여기는 사람들을 소중한 정치적 자산으로 여긴다. 이로 미뤄, ‘일본회의’ 소속 정치인들에게 지지표를 던지는 일본의 다수 유권자들이 어느 수준의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침략전쟁으로 얼룩진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균형 잡힌 생각을 지닌 유권자라면 그들을 지지하지 않을 테고, 야스쿠니를 기웃거리지도 않을 테니까.

▲ 1942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나오는 히로히토(맨앞).

"천황의 성전(聖戰)에 죽은 자는 신이 된다"

오늘의 일본 정치권이 지닌 심각한 문제는 군국주의 침략으로 비롯된 숱한 가해(加害)의 기록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자성 사관’이 아니라, 오히려 지난날의 군국주의를 미화하고 복원하려는 ‘야스쿠니 사관’을 지닌 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들은 군국주의와 국수주의 냄새를 풍기는 야스쿠니 사관이란 용어를 쓰기보다는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내세워) “우리는 자유주의 사관을 지녔어”라고 목청을 높인다. 전세계적으로 21세기의 극우 정치인들이 ‘자유’라는 듣기 좋은 단어를 특히 즐겨 쓰는 흐름인데,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의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는 사설 종교시설이고, 종교의 이름은 신도(神道)다. 여기서 받드는 신은 ‘천황의 조상신’이다. 결국은 ‘천황’이 숭배 대상이다. ‘살아있는 신’인 ‘천황’이 곧 국가의 중심이기에, ‘천황’의 명령을 받아 싸우는 ‘성스러운 전쟁’ 즉 성전(聖戰)에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결국 전쟁터에서의 죽음이 (야스쿠니 비판론자들이 지적하듯 ‘개죽음’이 아니라) ‘황국’(皇國)을 지키기 위한 영예로운 죽음이라는 신념이 신도의 핵심 교리이고, 야스쿠니는 그런 교리를 퍼뜨리는 심장부다.

여기에 또 믿기 어려운 마법이 끼어든다. 침략군이자 가해자였던 일본군 병사가 ‘천황의 성전’을 벌이다가 죽는 순간, 그는 ‘호국영령’이 된다. 곧 이어 야스쿠니의 전몰자 명단인 영새부(靈璽簿)에 이름이 오르면서 ‘신’이 된다. 다름 아닌 야스쿠니의 제신(祭神)이 된다는 뜻이다. 죽어서 야스쿠니에 이름이 오르면 침략자, 가해자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호국영령이자 신이 된다니! 참으로 신묘한 마법이고 역사의 왜곡이다.

"죽으면 신으로 대접받으니 군대 갈 만하다"

태평양전쟁 무렵 야스쿠니에선 몇천 명, 또는 몇만 명 단위로 전몰자를 합사하는 행사가 열리곤 했다. 히로히토가 와서 함께하는 이 행사엔 일본 각지에서 유족들이 초대를 받아, ‘천황’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는 ‘영광’을 누렸다. 이 과정에서 전쟁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우리 가족의 죽음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느냐,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은 묻혀 버렸다. 야스쿠니 문제를 깊이 있게 다뤄온 한 연구자의 분석을 옮겨본다.

“일본의 전쟁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살아있는 신 천황’이 참배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천황을 내세워 전사자를 신으로 떠받드는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모든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신적 지주였다”(남상구,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식민지 피해-야스쿠니 문제> 동북아역사재단, 2020, 22쪽)

야스쿠니 제사에 참석한 뒤 유족들은 히로히토 왕궁과 우에노 동물원 등 도쿄의 명소들을 구경하고 선물 보따리와 함께 고향집에 돌아갔다. ‘명예로운 유족’이란 감정을 지닌 채로 말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골 사람들은 “전쟁만 없었다면 이 구석진 시골에선 평생 누려보지 못할 호강을 ‘천황’의 은총 덕에 누리고 왔다”고 여겼다. 전쟁 중 야스쿠니 행사가 되풀이되면서 “죽으면 신으로 대접받으니 군대 갈 만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아울러 전쟁을 반대하고 징병 영장을 불사르는 소수의 평화주의자들은 겁쟁이에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게 됐다.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 정신적 통합과 국민총동원에 야스쿠니를 철저히 이용했다. 1944년 개정된 일본 교과서엔 “일본인으로 태어나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는 것은 더 이상 없는 명예로운 일이다”라는 내용이 새로 들어갔다(남상구, 42쪽).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선생들은 “조선인도 히로히토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야스쿠니에 합사돼 진정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지원병으로 나가라고 학생들의 등을 떠밀었다.

▲ 야스쿠니 신사. 일제는 전쟁터에서 죽으면 야스쿠니의 신이 된다며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을 침략전쟁에 내몰았다. ⒸKakidai

침략전쟁의 역사와 맞물린 야스쿠니

야스쿠니 신사는 출발 지점을 보더라도 피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다. 19세기 후반 일본이 막부 정치에서 ‘천황’ 중심의 정치로 옮겨가는 정치적 변혁기에 터졌던 내전이 출발점이다. 근왕(勤王)의 깃발을 내건 조슈번과 사쓰마번을 중심으로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나, 도쿠가와 이예야스 이래로 봉건 일본을 지배해왔던 막부(幕府)에 맞섰다. 그 막부 체제를 무너뜨렸던 내전(보신전쟁, 1866~1868년)이 끝난 뒤, 1869년 황군(신정부군) 쪽 전사자들을 기리려 세운 사당인 도쿄 초혼사(招魂社)가 야스쿠니의 처음 이름이다.

‘천황’을 따랐던 정부군 전몰자는 초혼사에서 제사 지내면서도, 반정부군 쪽 전몰자는 죽어서도 버림받았다. 유족들이 시신을 거두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려, 들짐승과 새들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보기엔 황당하기 그지없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던 사이코 다카모리 일파의 반란(세이난전쟁)이 진압된 뒤인 1879년, 일본 군부의 요청으로 초혼사는 야스쿠니 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5년까지 야스쿠니는 사실상 일본 군부가 관리 아래 놓여 있었다.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은 위령(慰靈)하고 현창(顯彰, 높이 떠받듦)할 전몰자 명단을 만들어, ‘천황’에게 이들의 야스쿠니 합사를 추천하는 권한을 가졌다.

150년에 이르는 야스쿠니의 역사는 일제가 벌였던 잇단 침략전쟁의 역사와 맞물린다. 여기엔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거쳐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전쟁의 전몰자 246만 명이 등록돼 있다. 머릿수로 보면, 청일전쟁(1894년) 1만3619명, 러일전쟁(1904년) 8만8429명, 만주사변(1931년) 1만7176명, 중일전쟁(1937년) 19만1250명 태평양전쟁(1941년) 213만3915명이다. 절대다수의 전몰자는 중일전쟁(7.75%)과 태평양전쟁(86.52%)으로 생겼다(다카하시 데쓰야,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역사비평사, 2005, 78쪽).

일본 극우의 성지

야스쿠니가 일본 군국주의와 대동아공영을 꿈꾸는 일본 극우의 성지로 여겨지는 데는 야스쿠니 신사와 맞붙은 특이한 시설물과도 관련 있다. 다름 아닌 ‘야스쿠니 전쟁박물관’(유슈관)이다. 우리말에는 없는 ‘유슈’(遊就)라는 단어는 ‘고결한 인물을 본받는다’는 뜻이라 한다. 지난날 일본 군국주의에 몸담았던 자들을 추앙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유슈관(전쟁박물관)은 초혼사가 야스쿠니신사로 바뀔 무렵 일본군의 무기 전시장으로 출범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는 시점부터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침략전쟁의 선전장으로 그 비중이 커졌다.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이 직접 관리에 나섰고, 여러 기획 전시전이 열렸다. ‘지나사변 대전람회’, ‘대전차 전람회’, ‘메이지유신 이후 무비(武備)변천 전람회’ 등을 통해 일본 국민들에게 침략전쟁의 성격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포장하면서 국민들의 충성도를 높이려 했다. 전시 때마다 피 묻은 일장기가 내걸려 애국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1945년 패전으로 야스쿠니는 활기를 잃었다. 유슈관은 문을 닫았다. 일본 군부도 손을 떼게 됐다. 맥아더의 미 군정이 ‘신도지령’(神道指令)이란 특별조치를 내려, 야스쿠니를 사설 종교법인으로 바꾸었다. 참배객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무렵의 상황을 사학자 아카자와 시로(리쓰메이칸 법대교수)는 이렇게 풀이한다. 패전 전까지는 야스쿠니가 전쟁의 승리와 ‘천황제 국가’의 발전을 기원하고 보장하는 신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오갔지만, 패전이라는 사태는 전쟁 승리라는 야스쿠니의 약속을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에 참배객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아카자와 시로, <야스쿠니 신사> 소명출판, 2008, 48쪽).

아카자와 교수의 분석을 좀 더 거칠게 표현한다면, 야스쿠니 신사의 ‘신통력’ 약발이 떨어져 전쟁에 패했다는 생각들이 퍼졌기에 실망한 사람들이 발걸음을 끊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패전 7년 뒤 야스쿠니는 부활의 기회를 맞이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미군정이 끝나면서 야스쿠니와 유슈관은 다시 숨통을 텄다. 히로히토는 그해 10월 야스쿠니를 참배하면서 그의 조상에게 주권회복의 기쁨을 알렸다.

▲ 전쟁박물관 앞에 서있는 카미가제 특공대원 동상.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간 식민지 조선청년의 30%가 자살특공대로 차출됐다. ⒸOren Rozen

카미카제 동상에 절하며 무엇을 배우는가

유슈관은 1986년에 다시 문을 열었고 2002년 새로이 다듬었다. 태평양전쟁 때 썼던 제로센 전투기 등 각종 무기나 전리품, 전사자 유품을 상설 전시하면서, 옛일본군을 영웅시하고 전투적인 애국심을 북돋우는 나름의 역할을 꾸준히 이어왔다. 일본의 경제력과 대외 발언권이 날로 커지고 정치권에서 ‘일본회의’를 비롯해 극우 세력이 힘을 키우면서 야스쿠니와 유슈관을 찾는 발걸음들도 잦아졌다. 8.15와 같은 특정일엔 욱일기를 든 방문객들로 붐빈다.

유슈관을 가보면, 카미카제 자살특공대원의 동상부터가 인상적이다. 필자가 그곳에 다녀온 지는 오래 전이지만, 지금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기억 하나. 일본 중학생들이 자살특공대원의 동상 주변을 반원 그리듯 둘러싸고는 깍듯이 허리 굽혀 절을 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국왕 히로히토에게 하듯이 예의를 차려 절 하던 그 학생들은 홋카이도에서 수학여행을 왔다고 했다.

‘카미카제의 아버지’란 별명을 지녔던 자살특공대 총지휘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한 다음날 할복자살했다. 옆에서 누군가가 목을 쳐주는 도움을 받질 않았기에, 15시간 동안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때 오니시가 썼던 칼도 이곳에 보관돼 있다. ‘역사 공부’라는 이름으로 일본 전국에서 떼 지어 몰려드는 학생들이 그 동상이나 칼을 본다면 무엇을 배우고 갈 것인가.

자료에 따르면, 약 3800명이 자살특공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었다. 말이 지원이니 사실상 강제였던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간 식민지 조선 청년의 30%가 자살특공대로 차출됐다. 죽음의 출격을 강요당했던 꽃다운 젊음들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오일환, <죽어서도 쉬이 못 오는 귀향> 동북아역사재단, 2021, 61쪽). ‘개죽음’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피할 수 없었던 전쟁이었다"며 침략 부인

유슈관 안팎에는 청일전쟁, 노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비롯해 일본이 지난날 벌여온 여러 전쟁에 관련된 전시품들이 널려 있다. 적에게 빼앗은 전리품과 전사자 유품, 전투 현장의 모습 따위를 그럴 듯하게 꾸며 놓았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전리품과 유품들을 보여주는 의도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천황’ 중심의 일본 군국주의 부활이다. 오늘날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면서 노골적으로 전체주의와 국수주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유슈관을 포함한 야스쿠니 신사의 노림수다.

야스쿠니는 일본이 지난날 벌였던 전쟁들을 ‘침략전쟁’이라고 설명하고 있을까. 아니다. 유슈관을 소개하는 안내 책자엔 “우리나라(일본)의 자존 자위를 위해, 더 나아가 세계사적으로 보면 피부색과 관계없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달성하기 위해 피할 수 없었던 전쟁이었다”고 쓰여 있다(야스쿠니 신사 총책임자인 궁사의 인사말).

이 말을 뜯어보면, 지난날 일본이 벌였던 전쟁들을 침략전쟁이라고 반성하기는커녕, 외적으로부터 일본을 지키려는 ‘조국 방어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도쿄 전범재판정에서 도조 히데키가 “침략이 아니라 자위 차원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야스쿠니에 등록된 전몰자들은 ‘천황’을 우두머리로 한 ‘황국’을 지키려고 ‘성스러운 전쟁’에 참여한 ‘호국 영령’들이다. 일본 극우들은 전쟁박물관과 야스쿠니 신사를 돌아보면서 지난날 못다 이뤘던 대일본제국의 영광스런 꿈을 환상처럼 좇는다.

▲ 야스쿠니 경내에서 욱일기를 매고 행진하는 일본 극우들. Ⓒ一貫斎

살아선 히로히토에 충성 강요, 죽어선 포로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바라는 극우파들과 동아시아 사람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도쿄재판에서 전쟁 지도부에 해당하는 이른바 A급 전범자들이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것도 불편한 관계를 더 한 요인이다. 처형된 지 30년 만에 ‘쇼와 순난자’(昭和殉難者)란 이름으로 야스쿠니에 합사된 전범자는 모두 14명. 1948년 12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교수형으로 처형됐던 7명, 재판 도중에 병으로 죽은 2명, 유죄판결 뒤 감옥에서 지내다가 병으로 죽은 5명 등이다.

이들 14명의 A급 전범들뿐 아니다. BC급 전쟁범죄로서 유죄를 선고받아 처형된 948명을 포함, 약 1000명의 전범들이 똑같이 ‘쇼와순난자’ 이름으로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다. (여기서 ‘합사’란 유골을 가져와 보관한다는 뜻이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의 전몰자 명단인 ‘영새부’에 이름을 추가로 적어 넣는다는 뜻이다).

야스쿠니가 지닌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대만 출신 전몰자 2만8000여 명과 함께 조선인 출신 전몰자가 2만1000여 명이 합사돼 있다는 사실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이들의 명단을 넘긴 쪽은 일본 후생성(한국으로 치면 복지부)이었다. 1959년부터 1975년 사이에 후생성은 여러 차례에 나누어 조선인 전몰자 명단을 야스쿠니에 넘겼다. 연도별로는 1959년 1만9650명으로 제일 많았고, 1964년 82명, 1972년 66명, 1973년 385명, 1975년 509명이다(남상구, 50쪽).

전몰자 명단을 야스쿠니신사에 넘기는 과정에서 유족들에게 알리거나 동의를 구한 적이 없다는 것이 비판을 받는 대목이다. 일본정부는 합사자 선정은 어디까지나 비정부 종교기관인 야스쿠니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며 책임을 떠넘긴다. 하지만 야스쿠니 쪽 설명은 다르다. 일본 정부가 전몰자들을 ‘공무사’(公務死, 공무 중 사망)로 인정했기에 합사를 했다는 얘기다. 조선인 전몰자의 경우는 “예전에 동포로서 함께 전지에 나가 전몰한 분들에 대한 위령과 경모(敬慕)의 뜻에서 합사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 속에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일본 후생성 간부들과 야스쿠니가 머리를 맞대고 짜고 모의했다는 점이다. 가족이 볼모로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유족들이 “당신들의 위령과 경모따윈 필요 없다”며 합사에서 이름을 빼달라고 나섰지만, 야스쿠니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요지부동이다.

"살아있을 땐 일본 사람이었다"

"천황의 뜻으로 모셔진 것을 백성의 뜻으로 빼낼 수는 없다" "지금은 한국 사람일지 모르지만 살아 있을 때는 일본 사람이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오면 그 영혼은 하나가 되어서 그 일부를 떼어낼 수가 없다" "유족은 빼내기를 바랄지 모르나, 본인은 그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 (서승, <우리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무엇인가> 내일을 여는 역사 2006년 여름호)

위에 옮긴 글은 한국인 유족들이 뒤늦게 알고 빼달라도 소송에 나서자 이에 맞선 야스쿠니가 늘어놓는 궤변들이다. 듣는 이의 분통을 터트리려고 작정하고 하는 말 같기도 하다. 허황되고 근거가 없다는 뜻을 지닌 4자성어 ‘황당무계’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것일까 싶다. 죽어서도 이들의 넋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히로히토의 포로로 잡혀 있는 모습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됐다가 죽은 식민지 청년의 혼령이 야스쿠니 쪽 궤변을 듣는다면 어떨까. 지하에서 그는 이렇게 분노를 터뜨릴 것이 틀림없다. “나는 너희들의 위령과 경모를 눈꼽만큼도 바라지 않아. 내가, 우리 가족이 일제 침략전쟁의 희생자인데 호국영령? 제신? 내 죽음이 ‘천황’을 위한 영예롭고 거룩한 죽음이라고? 개죽음이 아니고?”

야스쿠니의 궤변은 그곳에 갇힌 한국인 혼령과 유가족들에겐 2차 가해나 다름없다. 1차 가해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원하지 않는 전쟁에 강제로 끌고 가 죽음으로 이끈 것이고, 2차 가해는 원하지 않는 곳에 혼령을 가둬두고 빼달라는 요구를 묵살하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일본의 헌법에도 보장된 인권의 기본 사항인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야스쿠니의 태도는 무엇을 닮았는가. 지난날 식민지 조선인들의 인권엔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았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거만한 모습과 판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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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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