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로마법의 대원칙으로 현대 법체계의 근간이 되는 원칙이다.
그런데 계약의 기초가 되었던 객관적인 사정이 계약 성립 이후 현저히 변경되었고 그러한 사정의 변경이 당사자가 예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생긴 경우에, 계약 내용대로 구속력을 인정한다면 신의성실의 원칙에 현저히 반하는 결과가 생기고 나아가 변경된 사정을 고려하여 계약의 내용을 변경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거나 일방에게 기대할 수 없게 된 경우라면, 다른 일방은 계약준수 원칙의 예외로서 신의성실의 원칙에 의하여 계약을 장래를 향하여 해지하거나 계약내용의 변경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사정은 계약의 기초가 되었던 객관적인 사정으로서 일방당사자의 주관적 또는 개인적인 사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정변경에 대한 예견가능성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인 사안에서 계약의 유형과 내용, 당사자의 지위, 거래경험과 인식가능성, 사정변경의 위험이 크고 구체적인지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이때 합리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당사자들이 사정변경을 예견했다면 계약을 체결하지 않거나 다른 내용으로 체결했을 것이라고 기대되는 경우 예견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사자 사이에 임대차의 약정을 하면서 차임불증액의 특약이 있었더라도 그 약정 후 그 특약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고 인정될 정도의 사정변경이 있다고 보여지는 경우에는 형평의 원칙상 임대인에게 차임증액 청구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체결된 계약은 지켜져야 하고, 계약 실현에 대한 당사자들의 신뢰 역시 보호되어야 한다는 틀에 갇혀 있지 말아야 한다. 법질서 전체를 관통하는 일반 원칙으로서 법이나 계약을 형식적이고 엄격하게 적용할 때 생길 수 있는 부당한 결과를 막고 구체적 타당성을 실현하는 작용을 하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사적 자치나 계약자유도 제한될 수 있어야 정의(正義)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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