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한 부대의 불 꺼진 내무반, 반합 뚜껑에 담긴 투명한 술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짙고 풍성한 향과, 혀와 목구명과 위장을 차례로 쥐어짠 짜릿한 감각은 잊히질 않는다. 영외에서 지내던 소대원이 당시 매우 귀한 신상이었을 '조옥화 안동소주'(*현재 명칭은 '민속주 안동소주'인데, 곧 '문화재·명인 조옥화 안동소주'로 변경된다고 한다. 본문에서는 주로 조옥화 안동소주로 표기했다)를 몰래 들여온 것이다. 30년 지난 일을 지금 털어놓는다고 영창에 가진 않겠지?
이 술은 이렇게 나의 첫 전통주가 되었다. 지금은 민속주 안동소주라 부르지만 흔히 '조옥화 안동소주', 안동 친구들은 조옥화 할머니 소주라고 부르던 이 술은 아마도 나만이 아니라 많은 기성세대들이 전통주 하면 첫 번째로 떠올리는 술일 게다.
이 귀한 술을 되살려 우리에게 선물하신 조옥화 할머니는 한 세기를 누리시고 2020년 우리 곁을 떠나셨다. 할머니의 무형문화재 자격은 며느리 배경화 문화재보유자가, 대한민국 식품명인 자격은 외아들 김연박 명인이 각각 이어 받았다. 손자 김윤근 팀장도 무형문화재 전수장학생으로 이 술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
조옥화 할머니 이후 2대, 3대의 조옥화 안동소주는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우리 술의 새로운 전성기가 눈앞에 다가왔다고들 하는데, 예스럽고 단단한 도자기에 담겨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조옥화 안동소주는 이 커다란 변화를 어떻게 맞을까? 변하지 않을 것은 무엇이고 변화할 것은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을 담은 우리의 취재 요청에, 김연박 명인과 배경화 보유자는 단정한 한복 차림을 갖추고 술 빚는 일을 재현해주셨고, 김윤근 팀장까지 세 분과의 긴 인터뷰는 사무실에서 시작하여 향토음식과 조옥화 안동소주를 곁들인 향기 짙은 밤으로 깊어갔다.
<문화재·명인 조옥화 안동소주>에 대해 알아둘 사실들
오직 45도 한 가지 술만을 생산한다. 호리병과 전통 탈 모양의 도자기에 담겨 판매되다가 최근 180ml 유리병 제품이 출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원재료 : 멥쌀(국내산), 직접 디딘 우리밀 누룩, 물. 꼭 필요한 것 외엔 아무 것도 더 넣지 않는다.
제조법 : 모든 과정을 직접 해낸다. 어떤 소주, 증류주도 이 보다 단순할 수는 없다.
- 누룩 딛기 : 통밀을 갈아 반죽하여 누룩 틀에 넣고 발로 밟아 성형하여 20일을 띄운다. 기계를 도입하지 않고 임직원들이 직접 디딘다.
- 전술 빚기 : 고두밥, 누룩, 물만으로 빚어 20일 발효하는 단양주 누룩은 분쇄하여 물에 풀어 쓴다. 쌀, 누룩, 물 비율은 40 : 8 : 70.
(*전술: 증류를 위해 준비된 술이라는 의미의 전(前)술. 제품으로 가공하기 전의 원액으로서, 이를 맑게 뜨면 청주(약주), 탁하게 담으면 탁주 혹은 막걸리, 가열하여 증류하면 소주가 된다.)
(*단양주: 한 번에 빚고 재료를 추가하지 않은 술. 여기에 덧술을 하면 이양주, 삼양주 등이 된다. 여러 차례 덧술을 하면 알콜 도수가 높아진다. 덧술을 더 할수록 보통은 더 고급스런 술로 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한 번의 붓질로 그린 그림이 복잡하게 그린 그림보다 반드시 못한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 소주 내리기 : 전술 전체를 한 번에 증류한다. 감압하거나 여러 번(다단) 증류하지 않고 옛 방식을 고수한다. 알콜도수 약 70도에서 시작하여 45도 되면 멈춘다.
(*감압: 증류기 내의 기압을 자연 상태(상압)보다 낮춰 낮은 온도에서 알콜을 추출하는 증류법을 말한다. 상압 증류는 원료 고유의 향을 살리는 데 비해, 감압 증류는 긍정적인 향과 부정적인 향을 모두 줄여 단순하고 깔끔한 술을 만든다)
즐기는 법
- 음식과 함께 : 안동소주는 오랜 전통과 품격을 자랑하는 안동 음식문화의 일부이므로 다양한 찬이 나오는 한식 반주로 잘 어울린다. 안주로는 육회, 갈비찜, 수육, 해물찜, 문어숙회, 생선회와 특히 잘 어울린다.
- 냉장하기보다 상온으로 향을 즐기길 권한다. 한 여름에는 냉장해서 마셔도 좋고, 상온의 술에 얼음을 넣어 흔들어 마시는 것도 좋다. 따뜻한 밥공기 뚜껑에 술을 담아 올라오는 향과 맛을 즐기는 경험은 매우 특별하다. 놋그릇을 사고 싶어진다.
단순함의 예술 - 소주의 원형이 궁금하다면 조옥화 안동소주
"누룩을 사서 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은은한 맛과 향을 살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요."
"숙성을 더해 은근하고 부드러운 술을 만듭니다."
조옥화 안동소주의 원료는 가장 예스럽고 단순하다. 우리 땅에서 난 쌀이 주원료가 되고, 통밀을 갈아 누룩을 디딘다. 거기에 깨끗한 물이면 끝이다. 입국, 효모, 다양한 발효제, 수많은 감미료 등등, 옛 것 이외의 재료는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누룩은 술의 개성을 빚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양조장들이 누룩을 사서 쓴다. 내 개성에 맞는 누룩을 골라 쓸 수 있다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현재 누룩을 전문적으로 제조해 파는 곳은 전국에 두 곳 뿐이다. 조선 말에는 셀 수 없는 자가 누룩은 물론, 수만 곳의 누룩 제조․판매자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 술 문화는 여전히 피폐하여 회복되지 못한 상태다. 양조용 쌀, 누룩, 술의 종류, 용기와 잔, 즐기는 법 대부분이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누룩을 전혀 쓰지 않고 술을 빚는 양조장도 많다.
조옥화 안동소주는 '옛 방식 그대로' 우리밀 누룩을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누룩을 기계로 눌러 성형하는 곳도 많지만, 여기서는 경험과 감각으로 디딘다. 남이 만든 누룩을 쓰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직접 디딘 누룩에 이 공간 고유의 미생물들이 자리 잡아 조옥화 안동소주의 맛과 향을 만든다.
소주의 원료가 되는 전술은 쌀과 누룩과 물만으로 한 번에 가장 단순하게 빚는다. 빚어진 전술을 상압에서 한 번 증류하여 소주를 내린다. 한 번에 빚고 한 번에 내리는 단순함이 소주의 풍미를 최대로 살려준다.
단순하다는 말에 오해가 없기를. 가장 단순한 제조법이 가장 풍부하고 예술적인 결과물을 만든다. 술을 단순하게 빚는다는 것은 복잡한 재료, 기술, 공정에 의존하는 대신 자연과 사람의 힘을 예술적으로 조화시켜 결과물을 빚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소주를 내리려면 전술의 맑은 부분, 그러니까 청주를 떠서 그것으로 증류를 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조옥화 안동소주는 전술을 통째로 증류한다. 이 또한 재료의 풍미를 살리는 데 기여한다. 불필요하다고 거르고 깎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다 살려서 조화시키는 것, 거기에도 우리 술의 매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의 사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쌀을 당화, 발효한 술이지만, 여러 성분을 가진 쌀의 바깥 부분을 최대한 깎아 맛의 깔끔함, 단순함을 추구하고, 선별된 곰팡이와 효모만으로 효율적으로 빚는다. 자연이 제공하는 복잡한 맛과 향을 피하고 통제 가능성을 높인다. 우리 술은 단순하게 빚어 자연의 복잡함을 살리고 일본의 양조는 복잡하게 빚어 술의 단순함을 추구한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떤 것이 더 좋다고 말하긴 어렵다.
술을 빚는데 필요한 최소의 재료와 방식을 고수하는 조옥화 안동소주가 더하는 것은 딱 하나, '시간'이다. 증류하여 만들어진 소주를 최소 1년, 보통 1년 6개월을 숙성한다. 가장 단순한 제조법으로 살리고 빚어낸 다채로운 맛과 향기가 처음엔 홧홧하게 각자 제 기운을 뽐내다가 숙성의 시간을 통해 은근한 조화를 이루고 부드러워진다. 갓 내린 상압식 소주를 마셔보면 수많은 향들이 제각기 날뛰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매력은 있지만 편히 오래 즐기긴 어렵다. 사람의 솜씨로 빚은 술을 자연의 시간이 완성한다.
소주가 궁금하다면, 쌀로 빚은 우리 소주의 원형을 맛보고 싶다면, 조옥화 할머니가 우리에게 선물하시고 김연박, 배경화 2대가 빚고 김윤근 3대가 이어가는 조옥화 안동소주의 풍부한 맛과 향을 체험해볼 일이다.
내가 최고라는 게 아니다. 지켜야 할 맛이 있을 뿐
오랜 것은 낡은 것인가? 살아남기 위해 다들 변화해야 하는가? '전통주'의 범주에 새롭고 젊은 술들이 쏟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시도들도 많다. 그러다보니 도리어 오랜 술 조옥화 안동소주에게 '너는 뭐니?' 하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단양주가 아니라 이양주, 삼양주로 빚은 술이 더 고급스럽지 않은가? 왜 전통누룩만을 고집하는가? 상압 증류보다 감압 증류가 깔끔해서 현대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가? 알콜 도수를 낮추는 게 대세인데 왜 45도만을 고집하는가?
대답은 단순했다.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 안동소주의 은은한 향과 감칠맛을 살릴 수 없더라고요." 다만,
"우리 술이 더 좋고 다른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졌을 뿐이지요. 저희가 물려받은 우리 술, 그 맛과 향을 지키고 이어가려 할 뿐입니다. 저희는 국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긍심, 겸손함, 고집스러움이 모두 묻어나오는 답변들이었다.
알콜 도수를 낮춰보라는 압력이 특히 많다.
"3000번은 들은 것 같아요. 저도주를 만들어보라고. 어려울 것 없고 내일이라도 가능하지요. 그러나 아무리 실험해 봐도 우리 술의 향과 맛을 살리는 것은 45도가 맞아요. 뒤끝도 더 깨끗하고요. 고집스럽다 고루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수가 없네요."
나는 도수가 낮은 조옥화 안동소주를 내놓으라는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런 술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은 이미 많고 그 중에 좋은 술들도 있다. 명주는 명주의 가치를 지키고, 다만 소통과 만남의 방법을 발전시킨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 분 말씀을 들어보니, 조옥화 안동소주의 제조법, 맛과 향의 본질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술이 크게 부활하고 매우 다채로워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 모든 변화 속에서 원점을 단단히 지키는 술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며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면 2대, 3대, 우리 세대의 역할은 무엇일까? 조상께서 하던 일을 답습 반복하면 될 뿐일까?
조옥화 여사의 며느리로 함께 술을 빚었고 고인의 무형문화재 자격을 계승한 배경화 선생은 석사논문으로 안동소주의 역사적 전승 과정을 밝히고, 박사논문으로 안동소주 누룩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큰 역할을 해냈다.
대부분의 전통주 양조자들은 여전히 어떤 미생물들이 누룩에 번식하여 어떻게 술의 맛과 품질에 작용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우연에 크게 의존하는 셈이다. 그 가운데 배경화 선생의 연구는 조옥화 안동소주 누룩의 미생물들을 특정하고 그 역할을 규명해냈고, 그 결과 조옥화 안동소주 누룩은 특허를 받게 되었다.
건축계에 26년을 종사하다 어머니의 대한민국 식품명인 자격을 이은 김연박 명인은 지역연계 산업으로서 조옥화 안동소주의 발전방안을 연구하여 역시 박사학위를 받았다. 생산자이자 경영자로서, 김연박 명인은 이 술의 문화적 가치를 탐구하고 앞길을 열어가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두 분은 안동소주를 계승하되 과학화하고 발전시키는 사명에 집중했고, 주변에서 쏟아지는 많은 이야기들에는 담담한 편이었다. 3세 김윤근 팀장은 부모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변해야 할 것은 술과 사람이 만나는 방법
법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무형문화재 3대 전수생이 된 김 팀장은 세계의 다양한 술을 가리지 않고 즐기면서 더 넓은 술의 세계에서 조옥화 안동소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최근 주류박람회 같은 행사의 다수가 된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술맛을 제대로 보기 위해 전용 시음잔을 들고 다니는 젊은이들, 자기가 좋아하는 좋은 술을 식당에 들고 가 즐기는 새로운 세대를 조옥화 안동소주는 어떻게 만나야 할까?
사실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조옥화 안동소주가 운영하는 '안동소주 전통음식 박물관'에는 어느새 30대 안팎 여성들의 방문이 크게 늘어났다. 온라인 매출이 절반까지 늘어날 정도로 소비자들과의 소통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몇 년 전 도입된 180미리 유리병 안동소주의 반응도 상당히 좋다.
조옥화 안동소주는 김 팀장의 주도로 375ml 유리병 제품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 750ml 유리병도 검토 중이다. 현재의 호리병과 전통 탈 모양의 도자기는 일상에서 즐기는 술의 용기로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도자기 대신 유리병에 담는다는 건 외형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즘 술 즐기는 사람들은 식당에 있는 술로 만족하지 못해 좋아하는 위스키나 와인을 들고 가서 콜키지를 내고 즐긴다. 바로 그런 자리, 명절 상차림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술을 즐기는 다양한 자리에 조옥화 안동소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용기의 변화, 잔의 변화, 즐기는 방법의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로고를 한글화하는 등 디자인 작업도 막바지에 있다. 현재의 안동소주 한자 로고는 배경화 선생의 서예 작품인데 단정하고 품격 있어 이 술에 잘 어울린다. 하지만 분명 한글 디자인도 필요하다. 이렇게 하나씩 필요한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 팀장은 "플라시보 효과 같은 건지 몰라도 유리병과 유리잔에 마시면 느낌이 확 다르다. 시음 시켰을 때의 반응도 다르고 향도 세련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파리 국제식품박람회(SIAL Paris)에 참여했을 때 김 팀장은 이런 경험을 했다. 김 팀장 스스로 이 술의 향이 '올드'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그곳 사람들로부터 향이 세련되고 젊은 세대들이 즐길 만하다는 평을 받아 본인의 편견이 깨졌다고 한다.
오래된 옷을 입히고 낡았다고 할 것이 아니다. 김 팀장은 조옥화 안동소주에 새로운 옷을 입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할 것이다. 이 술을 지켜온 두 분 부모도 이런 변화에 힘을 보태는 모습이다.
변화해야 할 것은 이 술을 만나고 즐기는 방법이다. 우리의 생활양식과 미감에 맞는 용기와 디자인, 새롭게 제안되는 다양한 음주법 등등. 이런 것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전통주는 정말 명절에만 즐기는 술이 될지도 모른다.
소주가 이 정도는 돼야지
이대로 원고를 마감하기는 아쉬웠다. 마지막 문단을 남긴 점심식사, 따끈한 도자기 밥그릇 뚜껑에 안동소주를 따랐다. 얇게 데워진 술에서 그리움처럼 풍성한 향이 올라온다.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키자 다가오는 봄처럼 포근한 기운이 온몸에 퍼진다.
"그래 소주가 이 정도는 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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