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혼자 작업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 씨 사망 사건과 관련해, 재판부는 1심과 똑같이 무죄를 선고했을 뿐 아니라 원·하청 책임자들의 형량을 대폭 감형했다. 김 씨 어머니 김미숙 씨는 "이렇게 재판해서 산업재해를 줄일 수 있겠냐"며 절규했다. 노동계는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전지법 형사항소2부(재판장 최형철 부장판사)는 9일 오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김병숙 전 서부발전 대표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권유환 전 태안발전본부장에게도 원심(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의 판단으로 핵심 책임자들이 모두 책임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징역 1년 6월·집행유예 2년을 받았던 하청업체 대표 백남호 전 한국발전기술 사장도 금고 1년·집행유예 2년으로 감형했다. 서부발전 법인 역시 1심의 벌금 1천만원에서 무죄로 선고됐다. 이근천 당시 태안사업소장도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에서 징역 1년2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형량이 4개월 줄었다.
원·하청 책임자 모두 원심보다 감형되거나, 무죄를 선고받게 된 것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누구 하나의 결정적인 과오에 기인한 것으로 보기 어렵고, 개개인의 과실 정도가 매우 중하다고 볼 수 없다"며 "한국서부발전은 안전보건관리 계획 수립과 작업 환경 개선에 관한 사항을 발전본부에 위임했고, 태안발전본부 내 설비와 작업환경까지 점검할 주의 의무가 없다"고 봤다.
특히 원청인 한국서부발전과 숨진 김용균 노동자가 실질적인 고용관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1심의 판단 역시 항소심에서도 유지됐다. 재판부는 "채용 및 근무에 관해 서부발전이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항은 없고, 서부발전 측의 요청이나 지시·감독 행위가 있긴 했지만 이는 계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또 용역 업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이뤄진 것이지 피해자가 종속돼 근로를 제공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선고 직후 김용균씨의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재판부를 향해 "이렇게 재판해서 산업 재해를 줄일 수 있겠느냐"면서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재판 결과다. 재판장이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편, 김 씨의 사망사고 책임자들에게 무죄·감형 선고가 내려진 날 한국중부발전 보령화력발전소에서 50대 비정규직 노동자가 석탄 하역 작업 도중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같은 날 12시 57분 경 충남 보령발전본부 1부두 하역기에서 낙탄 청소 작업을 하던 협력업체 소속 52세 이 모씨가 15미터 높이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비정규직 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은 10일 성명을 내고 "비정규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원청에게 면죄부를 준 재판부를 규탄한다"며 "재판부는 사회의 염원을 짓밟고 초심보다도 후퇴하여 실무자들에게만 책임을 물었을 뿐,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한국서부발전 김병숙 대표이사는 물론 법인, 태안발전 본부장에게도 무죄 판결로 원청에게 면죄부를 주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절박한 현실을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외면한 것인지, 생명과 안전은 안중에도 없이 돈과 가진 자의 편에선 선고가 내려질 때, 고 김용균이 일하던 인근의 화력발전소에서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어 나갔다"며 "모든 권한을 행사하면서 이윤을 독식하는 실질적인 책임자 원청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밥 벌러 나갔다가 일터에서 죽어 나가는 노동자가 한해 2400명이 넘는 처참한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지켜야 할 법 정신은 외면한 채, 핑계와 변명으로 가득 찬 이번 판결은 차별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죽음과 위험의 외주화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다"며 "시민사회의 뜻과 바람을 거스른 이번 판결이 바로 잡히지 않는다면 사법부 저울이 이윤의 도구이자 권력의 면죄부임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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