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박지현입니다."
대중 앞에 선 정치인이 첫 인사에 당명과 이름을 함께 말하는 것. 정치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발화자가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라면 그 인사를 한 번은 곱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같은 당 소속 의원들로부터는 왕따에 가까운 외면을, 당원들로부터는 무수한 문자 폭탄과 탈당 압박을 받고도 '더불어민주당'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9일 서울 영등포구 모처에서 자신의 책 <이상한 나라의 박지현> 출판기념회를 연 박 전 비대위원장의 자기소개는 그래서 조금 새삼스러웠다. "더불어민주당 박지현입니다"라는 인사말은 누가 뭐라든 기어이 버티고 버텨 민주당에 남겠다는, 민주당에서 정치를 할 거라는 일종의 각오 혹은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2시간 넘게 진행된 행사를 압축한 결론이기도 했다.
이 생경함은 책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그는 책 뒷표지에 아주 큼지막하게 "더불어민주당 박지현입니다"라고 썼다. 앞표지엔 민주당을 상징하는 파란색으로 칠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넣으며 당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작 책 본문엔 민주당에 대한 질책, 원망, 험담에 가까운 폭로로 가득 채웠다.
"내가 말할 때 듣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휴대전화를 만지거나 자기들끼리 떠들기 바빴다. (중략) 온갖 '그러는데'를 들먹이며 내 의견을 무시했다(63쪽)"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며 사건을 아예 없는 일로 치부하려는 그(박완주 무소속 의원. 직원 성추행 사건으로 민주당에서 제명됐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소름이 끼쳤다. 이런 사람에게 내가 '의원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저기, 아저씨. 지금 뭐 하세요?(90쪽)"
"확실한 행동으로 성폭력에 대응하겠다고 약속했던 그 이재명 후보가 맞나 의심스러웠다. 위기 대응에 대한 리더의 전략에 점수를 매긴다면 두 번의 빵점을 주고 싶은 사건이었다. (중략) 선거가 끝나자 후보가 약속한 내용들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모두 사라졌다. 그는 내 입을 막기 바빴다.(85쪽)"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윤호중 전 비대위원장)이라 내가 먼저 사과를 했는데, '나도 미안하다'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정치에는 '인간'은 없고 '정치인'만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다.(116쪽)"
270쪽 내내 과연 이 당을 '고쳐 쓰는 게 맞나(위근우 칼럼니스트)' 싶은 신랄한 비판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칭찬이라곤 웃음기를 조금 보태 조응천 의원이 '아재 개그'를 잘했다는 정도. 82일이라는 짧은 지도부 시절 동안 연이은 파격 행보로 놀라움을 선사했던 그가 쓴 책다운 파격적인 내용과 구성이다.
82일의 교훈 "586의 험지 출마, 폭력적 팬덤과 결별해야"
박 전 위원장이 보기에 여의도는 '이상한 나라'였다. 그는 이날 출판기념회에서는 이 이상한 나라를 "5060 남성들의 천국"이라고도 표현했다. 박 전 원장 자신은 이상한 나라 가운데 민주당이라는 토끼굴에 초대된 엘리스였다. 기대와 달리, 그곳에서는 동화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엘리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시와 비난이었다. 엘리스가 토끼굴에 처음 입성했을 때 느낀 설렘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박 전 위원장은 "솔직한 마음으로 민주당에 정이 안 떨어졌다면 그건 거짓말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감사하게도 요 근래에 민주당 내 많은 청년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함께하는 동료들의 힘을 느끼고 있어서, 이들이 민주당원이고 앞으로 민주당을 이끌어나갈 청년이라면 희망이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박 전 위원장은 민주당이 딱 두 가지를 고쳐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에 있으면서 고칠 게 정말 많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고칠 것을 두 개로 정리할 수 있겠더라고요. 586(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정치인의 험지 출마, 그리고 폭력적 팬덤을 끊어내는 것. 이 두 가지만 바꾸면 민주당이 분명히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만 바꾸면 민주당이 (집권 여당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두 가지를 바꾸기 위해서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간다면 민주당이 다음 집권을 해내고 국민을 지키는 일도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비대위원장 시절 주장했던 이른바 '586 용퇴론' 이야기다.
"제 책에 586 용퇴론을 꺼낸 배경이 나오는데,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정치권 한 판 크게 물갈이를 해야 합니다. 너무 낡았습니다. 개개인의 힘으로 586을 몰아내기엔 역부족입니다. 수도권 양지에서 3, 4선 하신 분들이 험지로 가셔야 합니다. 험지에 출마해 떨어지더라도 지방선거에서 시·도지사에 도전해야 합니다."
박 전 위원장은 이날 출판기념회를 찾아온 같은 당 김영진·김한규·이원욱·조응천 의원을 향해 "동의하시냐"고 물었다. 의원들은 박수로 호응했다.
책에서는 정치 이야기에 밀려 많이 언급하지 못한 정책적 포부도 출판기념회에서 밝혔다. 그는 지방 소멸 문제 해결, 기후 위기 대응, 복지 사각지대 해소, 장애인 탈시설 및 이동권 보장, 특히 디지털기본법 수립을 통해 온라인 범죄 행위를 막아내고 싶다고 밝혔다.
박 전 위원장은 이 대목에서 출마 의지를 밝혔다.
"그런 거 하려면 출마해야 하는 거 아니야? 국회의원 돼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물을 텐데) 네, 저도 출마해서 국회의원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속도보다 제구력이 중요하듯 제가 생각하는 정치도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조금 늦더라도 좋은 정치를 할 준비를 착실히 해보려고 합니다."
"박지현이 쪼아대고 우리가 노력해서 줄탁동기하면 바뀔 것"
박 전 위원장이 쓰라렸던 첫 모험의 기억을 떨치고 이상한 나라를 바꿀 수 있을까. 정치에는 사람이 필요한데, 일단 이날 박 전 위원장은 우군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300석 가까운 객석을 거의 가득 메운 청중들과 민주당 소속 네 명의 의원,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이날 그의 정치적 동지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원욱 의원은 "제가 반명계의 대표 주자, 이렇게 됐는데 그 단초가 사실 박지현 위원장"이라면서 "저도 386이긴 한데 어른 정치인이 청년에 희망을 주고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지지 인사를 했다.
원조 친명 의원으로 알려진 김영진 의원은 "제가 당 사무총장을 했는데, 중앙당 10층에 박지현 위원장 방을 만들어드렸고 커피도 준비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서로의 공과 과를 보듬어주고 미래를 같이 만들어가면 좋겠다"고 했다.
이 의원과 더불어 또 다른 비주류로 꼽히는 조응천 의원은 "당이 대선·지선을 지고도 이렇게 떳떳한 모습, 경이롭게 보고 있고, 언제까지 이렇게 갈 수 있을까 솔직히 두렵다"면서 "밖에서 박지현이 쪼아대고 우리도 안에서 노력해서 줄탁동기(啐啄同機) 하면 (민주당이) 사랑받는 모습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박 전 위원장으로부터 공천장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김한규 의원은 "다음에 또 (당 대표 선언) 비슷한 상황이 되면 기자회견장은 구해드리겠다"면서 "박지현 위원장이 추구하려 했던 가치를 같이하면서 저도 빚을 갚겠다"고 했다.
장혜영 의원은 "다른 당에 있지만 굉장히 많은 사회적인 개혁을 해나갈 수 있는 동년배, 같은 세대 정치인으로서 너무 반갑다"면서 "적대적 공생 정치를 끝내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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