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복지국가를 향하고 있고, 복지국가가 되기 위한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실행하고 있다. 필자 또한 복지국가를 이루기 위해서 지역단위에서 다양한 실천을 하고 있고,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역 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론적 단위에서 복지국가를 논하는 것, 혹은 정책이나 제도를 만드는 수준에서 복지국가를 논하는 것과 복지현장 속에서, 즉 실천단위에서 '복지국가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그 논의축이 다르다. 이론적 논의나 제도나 정책을 만드는 논의를 하는 것에 더해, 삶의 현장단위에서까지 복지국가를 생각해야만 복지국가담론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최근엔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일이 있다. 이 글에선 사회복지현장에서 만난 약자와 그에 대한 태도와 인식,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현장의 환경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복지국가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혹은 지향하는) 국가'로 정의할 수 있다. 복지국가에 대한 생각과 지향점은 사회에 따라,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제기되고 주창된다. 공통적인 부분은 국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복지국가의 철학은 분배와 정의 등 추상적인 논의와 함께 의료, 교육, 주거 등에 대한 요구 등 구체적인 논의를 포괄한다. 복지국가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국가'라고 한다면, 국가의 제도와 정책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인간다운 삶'에 대한 검토와 깊은 성찰도 필요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인간다운 삶에 대한 논의는 주로 물질적인 조건에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중 사회보장에서 공공부조에 속하는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부분을 통해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성찰해볼 수 있다. 즉 누가 수급자이고, 어떤 조건에 처할 때 수급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결국 인간다운 삶에 대한 답 중 하나를 구성하는 시사점이 될 수 있다.
국민들은 세금을 납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빈곤하거나 위태로울 경우, 알코올, 우울증, 조현병 등의 병이 있어 근로가 힘든 경우 등등 스스로 기본적인 삶을 이룰 수 없을 경우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하게 된다. 다시 말해 수급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헤어나거나 극복할 수 없는 병이 있다는 것, 혹은 무능력하거나, 무기력하고, 자신을 도와주거나 함께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국가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 그 어려움을 물질 즉, 돈으로 환산하여 지원한다. 대한민국에서 복지국가로서 인간다운 삶의 최저 선을 보장하는 것은 결국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 생계급여, 주거급여, 의료급여, 교육급여 등으로 표현된다.
인간다운 삶은 물질적인 지원으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만나고 함께하는 사회적 약자는 요보호아동(부모와 함께 살지 못해 아동양육시설에서 사는 아동), 거주시설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 지원주택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 은둔형 외톨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한부모 가정, 학교밖 가정밖 청소년, 요양필요가 있는 어르신, 출소자 등이다.
최근에 수급자를 도울 일이 생겨, 우리 직원이 병원과 은행에 함께 가서 일을 보았다. 그런데 은행 직원과 병원 간호사의 행태가 충격적이었다. 다친 수급자가 외과적인 수술과 처치가 필요해 병원을 방문했는데, 주사를 놓고 처치를 해주는 간호사가 수급자에 대한 모멸적이고 비하적인 언어와 행동들을 하는 것을 보고 온 이야기를 직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은행에서도 마찬가지로 은행원이 수급자에게 모멸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가 수급자이라는 것이 전산에 뜨기 때문에, (그에 기초하여 의료급여로 의료비자부담을 면제해준다) 왜소한 젊은 알코올중독의 남성을 '수급자'로 확인했기에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그러한 멸시와 무시는 수급자라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날 때마다 반복된다.
내가 돌보고 있는 요보호아동들도 이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모멸'을 마찬가지로 겪고 있다. 자신들이 시설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혹은 시설을 자립하여 사회 속에서 살다가도 자신이 옛날 말로 '고아'라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모멸과 멸시와 무시는 반복된다.
사연 속 수급자는 다음날 또 병원에 가야했다. 동행요청에 이번에는 경험 많은 남자 직원을 보냈다. 수급자를 무시하면 강하게 항의하라고 했는데, 남자 직원과 같이 갔더니 간호사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
사회적 약자는 스스로의 힘이나 가족의 보호아래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이다. 사회적 약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급자는 수급을 받게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아픔을 증명하고 무기력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 지원 내용은 급여 등으로 표현되는 물질적인 부분이다. 결국 수급자가 된다는 건 물질적 수급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수급으로 인정받고 공공부조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멸시와 모멸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국가라고 했다. 인간다운 삶이 물질적인 지원으로만 해석된다면,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것이 당연해짐을 대가로 최소한의 물질적인 지원을 받게 하는 국가'를 복지국가로 말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원했던 복지국가가 그런 복지국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한국사회가 만들어가고 있는 복지국가는 분명 물질 중심의 복지국가이다.
공공부조로 지원하는 생계·의료·주거급여 등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다운 삶의 최저선을 보장한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부정수급으로 탈락하게 된다.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수급자들이 선택하는 합리적인 대안이다. 일을 해도 몰래하거나 수급에서 탈락하지 않을 정도로만 일을 해야 한다.
공무원들이 갖고 있는 규정과 원칙에 의해서 무능력, 무기력, 좌절을 강요받는다. 자신이 수급자라는 것이 공개되는 자리에서는 모멸과 멸시를 받는다. 이게 현재 우리나라가 만들어가는 복지국가의 모습이다.
인간다운 삶을 물질, 자본, 돈으로 환산하여 정의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를 논할 때마다, 많은 이들은 항상 세금을 많이 걷으면 복지국가가 된다고 결론짓는다. 저부담 저복지사회에서 고부담 고복지사회로 가는 것이 곧 복지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사회는 본질적으로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다.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더 많이 복지에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복지국가 담론이 돈에 매몰돼, 복지국가를 협소하게 바라보는 시각에만 머물러 있는 셈이다.
혹자는 차상위계층의 문제를 복지수급 대상 확장으로 해결하는 것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급자가 현재 160여만 명에서 300만 명이 되고, 우리가 복지비용을 더 많이 쓰게 되면, 복지국가로 더 많이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은 물질주의적인 것이 아니지만, 수급의 조건만을 보는 것은 결국 물질중심적 복지국가주의로 귀결된다.
돈돈돈, 돈으로 복지를 해결할 수 있을까?
돈으로 복지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1인당 GDP 3만5천 달러에서 5만 달러, 6만 달러가 되면, 혹은 10%대의 복지부담율을 30%대로 올리면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복지국가가 될 수 있을까? 그를 위해 삼성과 엘지, 에스케이가 더 큰 기업이 되고, 카카오나 네이버 같은 유니콘 기업이 많이 생기는 것을 희망하고 기다려야 할까? 그게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일까? 결국 경쟁과 성장이 더 극대화되는 사회가 되어, 한국사회를 빨리빨리 더 성장시켜야 복지국가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현재의 복지국가 담론은 아닐까?
복지국가를 꿈꾼다고 하지만, 현재와 같은 방향으로만 복지국가를 고민한다면, 재정적 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키이며, 이를 위해서 개인들은 극단적인 경쟁의 틀 안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이들에겐 '패배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부족 때문'이라는,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성공한 자도 실패한 자도 모두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성장담론, 그 성장담론에 기초한 물질중심 복지국가가 바로 우리나라가 만들어온 복지국가다. 이 비판에 동의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왔던 복지국가에 대해 성찰해야 할 때다.
수급자가 수급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규율하는 사회의 모습, 수급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 암묵적으로는 사회적 약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거나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복지국가여서는 안 된다. 사회적 약자는 불쌍한 사람, 비참한 사람, 무능력한 사람, 잉여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그것을 세금으로 부담하여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 되면 안 된다.
개인과 공동체에 대하여
흔히 저출산 고령화가 미래사회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사회가 되었고, 노인들의 삶도 고독사 문제가 보여주듯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앞으로 더 본격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노인문제만이 아니라 다문화문제, 청년문제, 청소년 문제 등 모든 것들이 현재 우리사회가 해결해야할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재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혹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노인의 문제도 한번 생각해보자. 나이가 들어 점점 쇠약해지고, 모아 둔 돈도 다 쓰고 나면 수급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독거노인으로 살아가는 경우,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경우 등 모두 당사자로서는 선택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노인 어르신들에게 인간다운 삶은 무엇일까? 국가재정이 충분하면 노인 어르신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을까? 건강하던 내가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리고 몸이 약해져 요양원이나 독거노인이 되는 순간 나도 모멸과 무시를 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지는 순간, 우리는 '물질적인 지원으로 환산되는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돈이므로 열등처우의 원칙에 따라 대우받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복지국가와 공동체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가 고부담 고복지의 복지국가가 된 것은 우리나라와 다른 무엇이 있어서라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북유럽처럼 고부담 고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많이 걷는다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과연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내 돈이 수급자에게 들어가는 것을 아까워하고, 그런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데.
그보다는, 모두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공감대의 형성이 먼저 아닐까?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제대로 된 복지국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제대로 된 복지국가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정의를 물질적인 부분에 한정하지 않는 사회다. 국가의 구성원 모두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속 말씀이 복지국가의 핵심개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젊을 때 열심히 일해서 세금 내는 국가의 건강한 구성원이었다가, 나이가 들거나 병들어 돌봄이 필요해지면 요양과 돌봄의 대상이 되는, 그래서 삶 자체가 비용의 문제로 환산되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후준비를 항상 재정적인 부분(월 300만 원 이상)으로만 바라보게 하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고민에서 커뮤니티 케어를 고민하게 된다. 커뮤니티는 지역사회와 공동체로 번역되는 말이다. 한국은 커뮤니티 케어를 지역사회통합돌봄으로 통일하여 쓰고 있다. 한국말로 쓰는 것이 좋지만, 지역사회라는 말을 공동체의 개념까지 포함하여 논의해야 커뮤니티 케어의 복지국가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급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무능력, 무기력의 부정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존엄한 사회구성원의 하나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요양급여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 무기력을 과장해야 하는 어르신, 활동지원을 더 받기 위해 혼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는 장애인, 부정수급에 걸리지 않게 몰래 일하는 수급자, 혹은 일하지 않는 수급자, 공황장애와 우울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한부모 가족 … 그들이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없게 설계된 사회제도에서, 그들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스스로 그것을 내면화하고 더더욱 무기력해진다. 수급이 세습된다는 말까지 나온다.
사회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잉여적 존재로, 없으면 좋을 존재로, 배제와 격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여긴다면, 어려움에 처해있으므로 당연히 돕고, 같이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노력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여긴다면, 수급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물질만이 아닌 가치로도 보장하는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