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종전선언이네 하는 상대방 선의에 의한 그런 평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1일 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상대방 선의에 의한 평화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가짜 평화”였다고 이같이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을 앞세워 ‘가짜 평화’를 추구했다면, 본인은 ‘힘에 의한 안보’를 앞세워 '진짜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취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을 선호한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문재인 정부 역시 ‘힘에 의한 평화’를 강력히 추구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잡힐 듯 했던 종전선언은 결국 무산되었다. 2018년에는 종전선언의 또 다른 당사자인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약속을 뒤집었고 그 이후에는 북한이 흥미를 잃은 탓이 컸다. 반면 문재인 정부 5년간 한국은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을 이뤄냈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세계 12위로 평가받았던 군사력은 2021년과 2022년에는 6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북핵 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안보 상황이 악화된 것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만약 한미가 북한에 약속했던 것처럼 2018년에 종전선언을 이뤄내고 이를 발판삼아 평화체제와 비핵화 협상을 동시적·병행적으로 진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트럼프 행정부가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문재인 정부가 단계적 군축을 추진키로 한 합의를 이행하려고 노력했다면?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고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의 상황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북한의 변심과 핵무력 강화를 향한 폭주는 위와 같은 상황 전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윤석열 정부는 전임 정부의 성과는 걷어차고 한계는 더 강하게 계승하고 있다. 안보 위기의 책임을 전임 정부에 돌리고 대북 강경 자세를 드높이면서 지지율 상승이라는 정치적 효과에 고무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마저 든다.
설상가상으로 오늘날 남북관계는 적개심과 경쟁심, 그리고 전쟁불사론으로 도배되고 있다. 서로를 ‘주적'으로 규정하면서 막말을 주고받는 적개심, 군비경쟁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경쟁심, 나를 건들면 백배·천배로 보복하겠다는 전쟁불사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그 위험성은 윤 대통령이 11일자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 즉 “어떤 오판이 심각한 전쟁상태로 가는 것을 역사상 많이 봐왔다”는 발언에 잘 담겨 있다.
하여 윤 대통령에게 묻게 된다. 전임 정부의 대북정책을 ‘굴종 외교’로 비난하면서 한국형 3축 체계 박차, 한미동맹 및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 등 군사일변도의 접근만 고집하면서 과연 오판을 방지할 수 있느냐고? 군사력을 신봉하는 접근이야말로 오판을 야기해 심각한 전쟁상태로 이어진 것을 역사상 많이 보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