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치러진 대선 결과에 불복한 브라질 시위대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취임 일주일만에 브라질 의회·대통령궁·대법원을 습격해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룰라 대통령은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전 대통령을 배후로 지목하며 비난했다. 2년 전 미국 의사당 폭동과 꼭 닮은 이번 사태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이 뿌린 씨앗이 전세계 극우에 영감을 주며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로이터> 통신, <워싱턴포스트>(WP),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을 종합하면 8일(현지시각) 오후 2시30분께 대선 결과에 불복한 3000명 규모의 시위대가 수도 브라질리아에 위치한 대통령궁·의회·대법원에 침입을 시작해 약 4시간 동안 이 기관들을 점거했다. 경찰이 최루탄과 헬리콥터를 동원해 해산을 시도한 끝에 시위대는 오후 6시30분께 대부분 해산됐고 점거도 풀렸다. 브라질 경찰은 시위로 300명 가량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룰라 대통령은 이달 31일까지 브라질리아 지역에 연방 안보 개입을 선포했다.
지난 1일 룰라 대통령 취임식 뒤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이 사건은 주말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대거 브라질리아로 몰리면서 일어났다. <워싱턴포스트>는 수도로 오는 무료 교통편 및 무료 식사를 제공하겠다는 소셜미디어(SNS) 메시지에 이끌려 수도에 합류한 시위대가 지난 주말 이미 브라질리아에 있던 시위 지도부가 룰라 대통령의 취임을 막지 못했다며 분노한 상태였다고 전했다. 분노가 정점에 달하며 이날 침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가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선 직후부터 도로를 봉쇄하고 군이 개입해 선거 결과를 뒤바꿔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24일엔 브라질리아 공항 근처에서 폭발물을 터뜨리려 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자가 체포되기도 했다. 때문에 취임식도 보안 인력이 8000명 가량 동원된 삼엄한 경비 아래 치러졌다.
시위대, 건물 유리문 깨고 난입해 "군부 개입" 요구…룰라, 보우소나루에 "대량학살 조장자" 비난
선거가 조작됐다는 시위대의 믿음 뒤엔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퍼뜨린 음모론이 존재한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수 년 전부터 근거 없이 브라질의 전자 투표 기계의 조작 가능성 및 해킹 가능성을 제기해 왔다. 브라질에선 1996년부터 전자 투표를 시행 중이다. 대선 패배 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평화로운 권력 이양의 표시로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대통령 어깨띠를 넘겨주는 관례도 이행하지 않고 룰라 대통령 취임 이틀 전 미국 플로리다주로 떠나 그곳에 머물고 있다.
이날 군부가 개입해 민주적으로 치러진 선거 결과를 뒤집을 것을 요구하는 "개입" 구호를 외치고 해당 글귀가 적힌 펼침막을 내 건 시위대는 건물의 유리문을 깨는 등의 방법으로 건물에 진입했다. 일부 시위대는 그저 의회 바닥에 앉거나 누워 있기도 했지만 일부는 카펫에 불을 붙이거나 소방 호스를 이용해 물을 뿌리며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대통령궁 내부에서 가구를 던지고 유리창을 깨는 기물 파손 행위도 일어났다. 침입한 기관 내부 문서를 뒤적이는 모습도 공개됐다. <뉴욕타임스>는 지역 관리들이 당국이 이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정부 건물들의 창문을 파괴했으며 기자를 폭행했다는 보고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룰라 대통령은 홍수 피해를 입은 상파울루주 아라라콰라 지역을 방문 중이었고 회기 중이 아닌 의회에는 의원도 없었으며 대법원에도 판사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룰라 대통령은 시위대를 "파시스트", "광신적 나치"라 칭하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룰라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 파괴자들이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짓을 저질렀다"며 "이 일을 벌인 모든 이들을 찾아내 처벌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상파울루주 방문 중이던 룰라 대통령은 습격 소식에 급히 브라질리아로 돌아와 이날 밤 10시께 대통령궁을 둘러봤다.
룰라 대통령은 시위 배후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직접 지목해 비난했다. 그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지목해 "이 대량학살 조장자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폭동을) 독려했다"며 "모두가 이를 독려하는 전 대통령의 수 많은 연설이 있었음을 안다"고 말했다. 폭동이 일어난 뒤 6시간 가량 침묵을 지키던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브라질 현 행정부 수장이 근거 없이 제기한 혐의를 거부한다"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평화적 시위는 민주주의의 일부지만 오늘 벌어진 공공건물 침입과 약탈은 규칙을 어긴 것"이라고 시위대를 비판했다.
'1·6 기시감' 미 의원들 "익숙한 '트럼프 각본'"…WP "민주주의에 극우 전염병 퍼져"
이날 폭동에 대해 미국과 중남미 주변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브라질 민주주의와 평화로운 권력 이양에 대한 공격을 규탄한다"며 "룰라 정부와의 협력을 계속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UN) 사무총장도 소셜미디어에 이날 "브라질 민주주의 기관에 대한 공격을 규탄한다"고 했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성명을 내 "극단주의"와 "반민주적 폭력 행위"를 비난하며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지지자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남미 주변국인 칠레·콜롬비아·아르헨티나·멕시코·베네수엘라 등도 일제히 시위대를 비난하고 룰라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2021년 1월6일 대통령 선거에 불복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지지자들에 의한 미 의회의사당 난입과 놀랍도록 닮은 이번 사건에 미국에선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킴 제프리스 미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브라질 정부 심장부를 우파 극단주의자들이 폭력적으로 공격한 것은 슬프지만 익숙한 광경이다. 우리는 브라질인들과 브라질 민주주의와 함께 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현재 플로리다에 머물고 있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본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분출했다. 호아킨 카스트로 미 민주당 하원의원은 미 CNN 방송에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국내 테러리스트들에 영감을 줘 정부를 장악하려는 '트럼프 각본'을 이용했다. 이는 미국 1월6일 의사당 폭동과 닮아 있다"며 "미국은 브라질 국내 테러에 영감을 준 이 권위주의자를 위한 피난처가 돼선 안 된다. 그를 브라질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사건이 1월6일 미 의사당 난입을 떠올리게 한다며 "이는 선동적인 정치적 수사로 급진화된 강경파들이 선거 패배를 거부하고 근거 없는 선거 사기를 주장하며 법치를 훼손함에 따라 서구 민주주의에 극우의 전염병이 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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