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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든 돌봄이든 결국 사람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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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든 돌봄이든 결국 사람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발로 뛰는 동네의사, 야옹선생의 지역사회 의료일지] 돌봄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여전히 대전지역 곳곳을 누비며 거동이 불편하고 아픈 분들을 만나고 있는 동네의사 야옹선생입니다.

방문 진료를 하다 보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돌보는 분들과도 인연이 생기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져 자연히 저도 돌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풋내기 시절에는 돌봄은 의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레지던트 수련 때 환자가 물 한 모금을 요청하거나 불편한 옷매무새를 가다듬어달라고 하면 으레 간호사나 간병인, 보호자에게 요청을 전달했을 뿐 제가 직접 해드린다는 생각을 못 했던 까칠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제 환자 중에 홀로 사시지만 철따라 모자를 바꿔 쓰시는 멋쟁이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올해로 94세가 되신 할머니는 뇌경색으로 몸이 매우 불편한 상태이시지만 정신도 또렷하시고 우스갯소리도 잘 하십니다. 젊어서 미용사로 일하셨던 어르신은 저만 보시면 "얼굴은 이쁜데 왜 화장을 안 해요? 젊을 때 화장도 하고 이쁘게 하고 다녀요." 이러십니다.

ⓒ박지영

할머니는 작년에 넘어진 후 척추 압박골절과 팔목 골절이 생겼는데, 이후 또 낙상사고가 있어 상태를 확인하러 왕진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몸 이곳저곳에 멍은 들었지만 골절이나 큰 상처는 없으나 평소 깔끔하신 분이 손발톱이 지저분하게 깁니다. 조심스레 여쭤보니 "요새 눈이 자꾸 어둡고, 손은 어줍고. 요양사한테 말하기는 부끄럽고" 하시며 라임을 맞춰 얘기하십니다.

마침 여유가 있어 손톱깎이를 빌려 깎아 드렸더니 그 후로 저만 보면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꿈에도 제 얼굴이 보이고 매일 제 생각하면서 기도를 하신다니 쑥스럽기까지 합니다. 지금은 재택의료센터 대상자로 명실상부한 ‘제 환자’가 되셨지요.

나이 들어가시는 어르신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실 많지가 않습니다. 이 약을 넣었다, 저 약을 뺐다, 주사를 드렸다 하지만 그런 걸로 그분들의 삶이 나아지지는 않더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크게 아프고 불편한 것을 나아지게 만들어 신뢰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인정해드릴 때, 눈을 맞추고 등을 토닥여드릴 때, 같이 한숨짓고 눈물 흘려 드릴 때 관계가 가까워집니다. 이런 것이 의사인 제가 그나마 할 수 있는 돌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돌봄에 관심을 갖고 보니 여러 제도들이 보입니다. 노인장기요양에 의한 방문요양, 방문간호, 방문 목욕사업들, 등급 외 어르신들을 위한 생활지원, 가사간병서비스, 독거 어르신들을 위한 도시락이나 반찬배달,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등 제도가 많습니다.

이런 제도를 통해 만난 분들과 돌봄 제공자들이 어떻게 잘 조화를 이루며 지내는지 살펴보는 것도 참 흥미롭습니다.

노부부만 사시는 곳에 할머니가 아프셔서 왕진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거동을 못하고 누워만 계시고 할아버지가 아픈 할머니를 돌보고 계셨는데, 필요한 검사와 조치를 하고 할아버지께 결과가 나오면 연락드릴 자녀가 있는지 여쭤보니 요양보호사님에게 연락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이 우리 자식이나 다름없어요. 우린 그 사람 아니면 못 살아요."

말씀을 들으니 멀리 사는 아들과 딸이 있지만 각자 삶이 바빠 자주 오지 못한다고 하시며 괜히 연락하지 말라고 하시기에 그래도 무슨 일 있으면 어떡하시냐 했더니 요양보호사님이 수시로 와서 어르신들의 상태를 살피시고, 바쁘지 않으면 주말에도 오신다고 합니다. 원래 방문 요양보호사의 역할은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끝나지만 관계는 그렇지 않은가봅니다.

장애인을 돌보는 활동지원사 분들에게도 많이 배웁니다. 매일 콜라 1.5L를 마시는 심한 복부 비만, 간기능 이상, 이상지질혈증이 있는 정신장애인 분이 계셔서 저와 방문팀이 콜라를 줄이게 하려고 이런저런 방법을 써봤지만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활동지원사 분이 오시면서 백팔십도 바뀌게 됩니다.

의료든 돌봄이든 결국은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조금 깨닫습니다. 좋은 의사가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하지만 전통적인 의료는 돌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등한시 해왔습니다. 저도 외래 진료만 했을 때는 돌봄의 역할을 무시하고 돌봄 제공자들을 중요한 협력자들로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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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수료했다. 현재 대전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가정의학과 원장 및 지역사회의료센터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엄마의사 야옹선생의 초록처방전>, <아이를 위한 면역학 수업 : 감염병, 항생제, 백신>, <야옹의사의 몸튼튼 비법노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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