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차가운 날 먼길 떠나셨네요. 오래동안 찾아 뵙지 못했는데 훌쩍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 가시니 너무 송구합니다. 못다하신 이승의 짐이랑 훌훌 모두 내려 놓으시고 부디 저 세상 새 희망 길에서 편히 잠드소서.
선생은 학현(學峴)이라는 아호를 가지셨는데 이는 배움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고조부께서 사시던 동네이름이 鶴峴이었는데 고이우성교수의 제안으로 '鶴'을 '學'으로 바꾸어 學峴으로 정했다고 한다. 학현이라는 호에는 당신의 뿌리를 찾으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뿌리찾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을 때까지 학문의 고개를 허우적허우적 올라가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아호 그대로 선생은 아흔 다섯으로 떠나실 때까지 쉼없이 배움의 고갯길을 오르며 세속의 출세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분배정의와 경제민주화의 가시밭길을 걸어 가셨다. 수많은 제자들을 두루 따뜻하게 품으셨고 일신의 편안함과 안위는 별로 돌보지 않으셨다.
선생이 열어 놓으신 배움의 언덕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어 함께 공부하며 묻고 답했다. 전두환 5공독재의 야수적 칼바람이 약간 유화되어 서울대에서 강제해직당했던 선생이 복직되고(1984년 9월) 학현연구실이 광화문시절에서 신림동 시절로 가면서 연구실 풍경과 성격도 크게 바뀌었다. 본격적 공부실로 거듭나 여러 개의 분과모임이 열렸는데 나도 멤버가 되어 열심히 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나아가 학현연구실은 공부모임에만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경제학회와 경제발전학회를 태동시키는 산실 역할까지 했는데 한국사회경제학회(한사경) 창립의 건으로 선생과 나는 좀 더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고 그 만큼 선생을 힘들게 해드렸다.
한사경은 1987년 4월에 창립되었다. 이 학회는 이후 발족된 학술단체협의회 소속 여러 단체들과 함께 당대 학술운동의 산물이었다.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던-공안당국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암울한 시절, 그러나 이에 맞서 여기저기서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고, 어둠을 밝히려는 산자들의 몸짓도 활발해지던 시절이었다. 이때 선생과 나는 시대화두를 자기 화두로 가져 가며 공부 길을 동행했던 동시대인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성장제일주의 서강학파와 경합헀던 경제민주화지향 학현학파의 일원으로서 선배, 동료들과 함께 선생을 한사경의 초대회장으로 요청드렸던 것이다.
87년 4월이면 아직 6월항쟁이 일어나기 전이다. 공개적으로 진보경제학회를 발족시키는 데에는 큰 부담과 위험이 따랐다. 정권유지에 불안했던 전두환이 4월 13일 모든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했던 때다(4·13 호헌조치). 이런 까닭에 박현채,정윤형 선생을 비롯해 진보경제학계 원로들은 한사경 창립에 한사코 반대했다. 학회 명칭을 정치경제학회가 아니라 사회경제학회로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학현선생도 원로들로부터 압력을 많이 받았던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런 위험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제자들의 손을 잡아 주고 기꺼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셨다. 학현선생은 그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한사경의 창립은 학현연구실이 산실 역할을 하고 학현선생께서 '총대'를 메어 주셨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다. 또한 선생은 한사경의 창립후에도 모금운동으로 독자적인 학회사무실을 내기까지 상당 기간 학현연구실을 학회사무실로 사용하도록 내어 주셨다. 당시 학회지, 연구발표집에서 한사경의 주소는 학현연구실로 되어 있었다. 이러함에도 아, 나는 왜 선생께 고마워할 줄을 몰랐을까. 뿐만 아니라 학회의 소소한 운영과 관련해 당신의 의견을 내실 때 나는 무례하게 반대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아마도 절정은 내가 '학현경제학'을 비판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경제발전학회, 한국사회경제학회, 서울사회경제연구소(학연연구실을 개편)가 공동으로 선생의 삶과 경제사상을 기리고 평가하는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2009년 8월), 나는 선생의 경제사상에 대해 '녹색 사회민주주의'의 지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97년 외환위기이후 한국경제의 전환과 관련해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보시는게 아니냐는 비판적 논조로 말했다. 이 부분에서 마음이 좋지 않다. 선생께서도 마음이 많이 상하셨던 것같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내가 학현선생을 마지막으로 공개 석상에서 뵌 것은 2016년 9월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법대 공익인권법센터와 인권센터가 공동주최로 경제민주화 주제의 심포지엄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 학현선생이 노구를 이끌고 특별강연자로 오셨다. 나도 발표자로 초청받아 모처럼 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다. 특별강연 제목은 '경제정의와 경제민주화'였다. 이 강연에서 선생은 내 예상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유럽 및 일본의 경험, 한국의 경험과 한국헌법에서 경제민주화 조항에 대해 설명하고 난후 노동자의 경영참여, 경제력집중의 방지, 중소기업의 강화를 경제민주화의 3대 요목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거대한 반동의 길로 치닫고 있는 윤석열시대 한국에서 한층 더 절실한 경제민주화 과제가 되고 있다.
나는 강연후 선생의 귀가 길을 배웅해 드렸는데 그 노구에도 계단을 내려가면서 절대로 옆 난간을 잡지 않으려고 애를 쓰셨다.이 때 내 머리에는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이전에 대구에서 한사경 여름학술대회를 마친후 제자들과 가파른 팔공산 등산 길에 올랐을 때다. 이 때도 선생은 헉헉대며 힘겨워 하면서도 결코 제자들 신세를 지지않으려고 손을 뿌리쳤다. 꿋꿋이 경제민주화 길을 걸으신 그 모습을 상징하는 듯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선생님 얼굴을 뵌 것은 서울대 영안실에 놓인 영정 사진이었습니다. 살아생전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실 줄만 알고 받는 것은 도통 서투르셨지요. 당신의 너른 품으로 지난 날 철없는 제자의 못난 짓들을 부디 용서하시길 엎드려 빕니다. 선생님, 세세생생 좋은 그 길에서 부디 편히 쉬소서. 비록 선생님의 육신은 떠났지만 ‘냉철한 머리, 따뜻한 가슴’의 학현경제학은 영원히 이 땅에서 살아 숨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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