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태극기'. 한국정치의 극단적 진영정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다. 2002년 중학생들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이후 미군에 항의하는 국민의 외침이 촛불로 나타났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촛불은 국민대중이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의 에너지로 자리 잡았다. 촛불은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초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국민주권주의의 강력하고도 실질적인 기표로 작동했다.
2019년 '조국 사태' 때 조국을 지지하고 검찰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이 촛불을 들고 나왔지만 이전의 촛불들과 달리 진영을 배경에 드리우기 시작했고, 이의 대척에 위치한 또 다른 진영과의 충돌이 시작됐다. 촛불은 여전히 진영에 속한 지지자들을 응집하는 강력한 매개체였지만 이미 과거의 촛불이 아니었다. 조국 일가의 혐의와는 무관하게 조국을 비호하는 반지성이 촛불로 미화된 면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태극기는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진영의 대표적 상징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로 불리는 이들은 민주화 세력에 운동권, 주사파, 좌파 등의 이념적 굴레를 씌우고 매도함으로써 자신들 진영 단일대오의 동력으로 타 진영을 압살하고자 과격한 구호들을 동원했다.
촛불과 태극기는 2019년에 분화했다. 조국은 싫지만 당시 현직 대통령인 문재인을 구속하라는 구호에는 동의할 수 없는 세력, 박근혜를 석방하라는 주장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은 조국을 강력히 규탄하는 마음에 태극기 집회에 동참해도 태극기 본류와는 결을 달리하는 세력이다. 검찰개혁이란 명분으로 조국을 옹호하는 자들을 비난하는 태극기 집회를 '비판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촛불 역시 마찬가지다. 박근혜 탄핵에 찬성해 2016년 촛불 집회에 동참했으나, 조국을 수호하자는 촛불에는 뜻을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은 2019년 서초동 촛불에 동참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촛불과 태극기는 뒤틀리고 왜곡된 진보와 보수의 한국적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매개로 자리잡았다. 정치는 이를 지지층 결집과 상대를 압도하려는 동력의 원천으로 차용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진보를 표방한 이들은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들과 함께 윤석열 퇴진과 탄핵을 촛불이라는 이름으로 의제화하기 시작했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정권에 대한 수사를 다양한 영역에서 진행하면서 파열음은 거세지고 여야의 충돌은 한 치의 접점도 없이 강대강 구도로 치닫고 있다.
특히 민주당 이재명 대표 수사를 둘러싸고 촛불과 태극기는 격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언론 표현에 의하면 보수 진보의 '맞불' 집회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이들은 보수와 진보로 위장한 극단세력일 뿐이다. 문재인을 구속 수사하라는 이른바 '보수' 집회나 윤석열 퇴진과 탄핵을 외치는 '진보' 집회에서 지성과 성찰, 객관을 보려는 진정성을 발견할 수 없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생성된 반공 이데올로기, 좌파 운동권, 종북 주사파, 수구 꼴통 등의 색깔론은 상대를 낙인찍으려는 음습한 정치공학을 전제한다. 군사문화와 권위주의 정치가 사라진 지금도 이들은 여전히 한국정치를 규정하고 있는 지배적 변수들이다.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퇴행적 프레임을 없애지 않는 한 우리정치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 이의 책임은 전적으로 정치에 있다. 정치가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에서 19세기적 이념의 틀을 깨기 위한 어떠한 협상도 절충도 없는 여야의 행태는 이미 정치를 스스로 포기한 정상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공천, 상대를 압살하려는 조선 중기 이후의 살육의 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음모만이 존재할 뿐이다.
극단이 충돌함으로써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종됐다. 검찰수사는 현 정권이 지난 정권을 보복하기 위한 사정의 도구로만 매도되고, 검찰수사의 공정성을 논리와 보편의 잣대로 따져보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촛불은 맹목적으로 이재명의 정당성과 윤석열 탄핵을 주장하고, 태극기는 서슴없이 좌파를 종북 주사파로 공격한다. 여야는 이에 편승해 지지층 결집과 프레임 전환이라는 진부한 전략만 구사하기 바쁘다.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반정치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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