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부는 예산안으로 입법부는 법안으로 정책 의지를 드러낸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7월 누적 60조 규모의 부자감세안을 발표했다. 대규모 부자감세로 세입이 줄어들자,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늘리겠다고 공언한 돌봄 등 서비스 영역 또한 민영화하려는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반민생 예산안 심의를 앞두고 시민사회는 무기한 철야 농성을 시작했다.
'약자복지'는 정치 수사였다. 윤석열 정부 집권 반년 지났다. 아동, 노인을 비롯하여 사회적 약자가 대상이 되는 정책 분야를 포함, 복지제도 전반의 공공성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직후 '윤석열 시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어떤 모습일까 염려하며, 시급한 복지정책을 제안했다.(☞ 관련 기사 : <프레시안> 3월 29일 자 ''윤석열 시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잔여주의 노선만 강화할 것이라는 우려는 빗겨나지 않았다.
지난달 15일 안상훈 사회수석은 윤석열 정부 복지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핵심은 두 가지다. 현금복지 취약계층 집중 지원이 첫 번째다. 다음은 사회서비스의 민간 주도 고도화다. 현 정부의 복지정책 방향을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전인수식 '약자복지'
정부는 취약계층 대상 '약자복지'의 근거로 기준중위소득 인상, 생계급여와 의료급여 강화, 기초연금 인상을 든다. 하지만 8월 30일에 발표한 첫 예산안을 보면 의아하다. 기준중위소득 5.47% 인상을 두고, 역대 최고의 인상률이자 윤석열 정부의 '약자복지' 정책 의지가 도드라진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윤석열 정부가 기준중위소득 인상률을 '약자복지'라고 선전하는 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 억지를 써서 자기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궤변을 늘어놓는 처사)다. 대폭 인상했다고 연일 홍보하지만, 5.47% 인상률은 공식통계인 가계금융복지조사 상 중위값에 한참 뒤처지는 현 수준의 기준중위소득을 끌어올리기 위한 조정값이다. 물가인상률이 7%대에 육박하는 초인플레이션 상황에 빗대어 보면 인상 수준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낮은 인상률을 기록한 것은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올해 인상을 최대 수준의 인상률이라고 홍보하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예산안 상세브리핑에서 "주어진 재정여건 아래에서 복지 투자를 크게 늘렸다"고 자찬했다. 그러나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아전인수식 해석임을 알 수 있다. 내년 복지지출은 8.9조 원 늘어난다. 이 중 공적연금 의무증가 금액이 8.3조 원이고, 기초연금 물가 반영으로 2.4조 증가한다. 복지 증액의 대부분이 '약자복지'의 정책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법률에 따라 올라가는 공적연금의 자연증가분이다. 이를 두고 복지 투자를 크게 늘렸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복지 공공성을 방임한 정부
더 큰 문제는 돌봄, 요양, 교육 등 사회서비스 전반을 민간주도로 고도화하겠다는 방향성이다. 민영화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의 복지서비스는 90% 이상 민간에서 이뤄지고 있다. 여기서 중앙정부, 지자체별 복지프로그램을 통폐합하고 민영화를 가속 시키는 것은 복지서비스의 공공성과 국가책임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더불어민주당 최종윤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커뮤니티케어 관련 '지역사회 보건복지 연계 재가서비스 체계 구축' 사업 예산은 2022년 158억에서 2023년 35억으로 삭감되었다. 지역사회 통합돌봄 예산을 80% 이상 대폭 삭감시킨 것이다. 2016년 시범사업이 시작된 통합재가서비스의 경우 이용자의 90.4%가 높은 만족도를 보일 만큼 성공적인 사업이었다. 돌봄사업 기관이 흩어져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이용자가 장기요양기관에 한 번만 신청하면, 방문요양, 주·야간보호, 방문목욕, 방문간호 등 다양한 서비스를 한 기관에서 받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급자 중심 복지정책을 개선하고, 이용자의 만족도가 높은 복지돌봄 서비스를 국가가 주도하여 강화하는 방향이 옳다. 복지·돌봄서비스의 파편성과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통합적 전달체계 구성이 돌봄 수요가 폭증하는 시대의 정책 추진 방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복지·돌봄서비스의 파편화와 시장화를 부추기면서 민영화로 역주행하는 중이다. 사회안전망의 구멍과 사각지대가 넓어지고, 질 낮은 복지서비스가 횡행하며, 복지정책에서 약자가 소외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겉으로는 '약자복지'와 '사회서비스 혁신을 통한 복지·돌봄서비스 고도화'를 국정과제로 내세우고, 곳곳에서 돌봄, 요양, 교육 관련 사회서비스 축소를 일제히 강행하고 있다. '최중증 발달장애인 24시간 돌봄 지원' 등 일부 정책을 신설한다고 '약자복지' 정부가 아니다. 이 또한 최중증 장애인을 선별하며, 폐지된 장애등급제처럼 작용할 위험성이 다분하다.
안상훈 사회수석이 복지정책 방향성을 브리핑하며, 사회서비스 분야에 국가 역할이 줄어든 자리에는 '일자리 저수지'가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도 기만적이다. 이미 복지·돌봄서비스 일자리는 민간이 주도하고 있다. 돌봄 분야의 대표적 노동자인 요양보호사는 근속 3년을 넘는 경우를 찾기 힘들 정도로 격무에 노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최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윤석열 정부가 만들고자 하는 일자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양두구육, 윤석열 정부의 열쇳말
정치권에서 한때 '양두구육(羊頭狗肉,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매한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내세우나 속은 변변하지 않은 상황을 일컫는 말)'이라는 말이 회자 되었다. 볼썽사나운 여권의 당권 다툼 속에서 도드라진 사자성어이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이중성을 꼬집은 말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는 현금수당을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면서도, 고소득층까지 포괄하여 지급하는 '부모급여' 도입에 1조3천억 원을 투입했다. 반지하 참사를 깊이 애도한다면서 공공임대주택 예산 5조7000억 원을 삭감하고,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등 역대급 부자감세를 자행했다. 민생 현장에 방문할 때는 '약자복지'를 외치며 복지·돌봄서비스는 민영화하고 있다. 아전인수식으로 '약자복지'를 강변하면서 노골적으로 '부자와 동행'하는 윤석열 정부에 '양두구육'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는 없다.
국회의 시간이다. 쪽지예산으로 지역구 밥그릇 챙기려 들지 말고, 윤석열 정부의 반민생 예산안을 철저히 심의하라.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살려내고, 복지·돌봄서비스의 민영화를 막아내라. 올겨울 국회의 존재 이유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