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신묘년(1591년) 봄,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고자 파견됐던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1년 만에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이 달랐다. 서인 황윤길은 부산에서 급히 장계를 올려 '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以爲必有兵禍. 이위필유병화)'라고 했고, 동인 김성일은 '신은 그런 정황을 보지 못했습니다(臣 不見基有是. 신 불견기유시)‘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전쟁을 지휘했던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물으니, 김성일은 '황윤길의 말이 지나쳐서 조정을 진정시키려고 했다'고 답했다.(징비록. 懲毖錄)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동인에 속한 김성일이 조정을 두둔하고자 그러한 말을 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동인이 서인인 황윤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결국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고 조선은 전무후무한 7년의 참혹한 전란을 겪었다. 어떤 해석이 맞든 분명한 것은 안보에 정치논리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총선이나 대선 등 선거가 임박할수록 이념 공세로 지지층 결집을 모색하고 진영 대결로 자신들의 약점을 덮어 상대를 압박하려는 박제화 된 폐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정치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는 산업화 대 민주화, 민주 대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의 구도와 관련되어 있다. 서구에서 좌우가 경제정책이나 국가 대 시장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형성되는 역사적 맥락과 시민혁명 및 산업혁명의 오랜 과정 끝에 형성된 것과 뚜렷이 대비되는 부분이다.
한국에서도 세금과 복지정책, 성장과 분배를 둘러싸고 보수당과 진보성향의 정당이 대립하기도 하지만 보수와 진보, 좌우를 나누는 경계에 일제의 식민 지배, 군사정권, 민주화의 과정이라는 정치사회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이념이 정책 수립의 철학적 토대로 기능하지 않고 지지층 결집에 악용됨으로써 나쁜 정치의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진영 정치의 강화와 특정 이슈가 부각될 때 친일, 반미, 친중, 친북 등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정파의 이해를 충족시키고 진영정치를 강화하는 데 악용해 왔다.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세력을 억압, 구금하는 기제로서 악용된 국가보안법과 반공 이데올로기는 독재정권을 연장하는 국민 탄압과 정치배제의 수단으로 동원됐다.
지금도 '보수집회'에서는 참석자들이 문재인 구속과 북한조차 폐기한 주사파(주체사상파) 타도를 외친다. 박근혜 탄핵 후 '태극기 집회'에서 나왔던 구호가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등장했다. 굳이 역사인식의 빈곤과 반지성적 태도의 결여를 들을 것도 없다. 법률적으로 사실관계에서도 맞지 않는 철 지난 구호를 반복하는 그들의 천박한 수준이 안쓰럽다.
반면 진보 진영 역시 친일 프레임을 다시 꺼내 들었다. 한미일의 해상합동훈련을 '친일 국방'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 진영 프레임에 편승하려는 야당 정치인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친일과 반공, 반일과 친미, 친북과 반북, 친중과 친미. 분별없이 전개되는 위험한 진영 논리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적대적으로 공생해 온 양대 진영이 전가의 보도로 꺼내 드는 망국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구도가 다시 선명해지고 있다.
안 봐도 뻔하다. 목적은 알량한 지지층 결집일 것이다. 이들의 비루한 인식구조와 이익 앞에서 자신의 지성조차 헌 신짝처럼 팽개치는 필부의 만용을 여기서 멈춰야 한다. 또 다시 태극기와 촛불이 시대착오적 구호로 상대를 모함하고 공격하는 극단의 대결의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친일 국방'의 듣도 보도 못한 프레임으로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나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없었다'는 납득할 수 없는 논리를 편 국민의힘 정진적 비대위원장 모두 과도한 프레임 정치에 사로잡혀 있다. '욱일기가 우리 땅에 걸릴지 모른다'는 이 대표와 '인공기가 걸리면 좋겠냐'는 국민의힘 성일종 정책위의장의 말도 적절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안보에 정치논리를 개입했던 430년 전 붕당의 폐해는 현재 그대로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All history is contemporary)'라는 어느 유명한 역사가의 말처럼 세월이 그렇게 흘러도 우리는 여전이 친일 프레임에, 주사파 타령이다. 언제 깨어있는 대중의 민주주의에 이들이 굴복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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