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 검은 옷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검정색 옷과 대비되는 하얀색 리본을 패용한 채, 시민들은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치켜들었다.
무대에 오른 꽃감(활동명)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가 익명의 시민이 남긴 추모문구를 대독했다. 지난 14일 밤 신당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직후 <경향신문>이 마련한 온라인 추모공간에 남겨진 글이다.
익명의 시민이 남긴 '미안하다'는 사과는 "슬픔과 분노로 이 자리에 왔다"는 집회 참여자들의 감정을 관통하고 있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낭독된 시민들의 추모문구엔 또 다시 벌어진 젠더폭력 사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다시는 여성을 잃을 수 없다'는 분노와 결의가 함께 담겨 있었다.
이날 보신각 현장엔 신당역 살인사건의 추모와 재발방지 촉구를 위해 주최 측 추산 500여 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민우회, 전국여성노동조합 등 6개 여성·노동단체가 모인 여성노동연대회의가 집회를 주관했고 이외 86개 여성·노동·시민사회단체가 연대했다.
회사, 기관, 언론, 정치권 모두 문제 ... "우리는 이것을 구조적 성차별이라 부른다"
무대에 오른 발언자들은 스토킹 범죄에 있어 피해자 보호와 피의자 관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수사·사법기관, 사내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서울교통공사, '스토킹처벌법의 사각을 보완하라'는 민간의 요구를 묵살해온 정치권, 사건의 구조적 성격을 외면하는 정부·여당의 태도를 입 모아 규탄했다.
현장을 찾아 즉석 발언을 신청한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은 "여성을 혐오하고, 스토킹하고, 불법촬영하고 심지어 살해하는 일은 수백 수천 번도 더 있던 일이지만 우리 사회는 그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다"며 "여성의 불안을 그저 망상으로, 개인의 일로 치부하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이 사건을 막을 수 있었다"고 역설했다.
서울교통공사에서 여성 역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현경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대의원은 "공사는 지금도 이 비극이 불평등한 일터에서 발생한 젠더폭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며 "점수를 조작해 여성 응시자를 탈락시키고, 여성 야간 노동자를 위한 침실도 마련하지 않고, 나이든 여성 노동자를 조롱하는 직원들을 방치하고, 성폭력 2차 가해도 징계하지 않아온" 서울교통공사의 성차별적 조직문화가 신당역 살인사건을 방조한 것이라 강조했다.
사건 이후 이어진 언론과 정치권의 태도도 도마에 올랐다. 박지수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활동가는 "언론이 남용하고 있는 '보복범죄'란 용어는 '피해자가 합의를 안 해줘서 (그에 대한 보복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가해자의 관점이 반영된 용어"라며 "피해자 책임론을 경계하기 위해 언론은 사건을 어떻게 보도해야할지 더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연주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사무국장은 해당 사건을 '젠더프레임으로 보아선 안 된다'고 발언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등의 말을 인용하며 "(남녀) 프레임을 만들어 증오·선동 정치를 펼친 건 윤석열 정부와 집권 여당 아닌가" 되물었다. 스토킹 피해의 특성이 보여주는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는 것은 대선 국면부터 이어진 현 정부의 안티 페미니즘 전략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노헬레나 한국여성노동자회 연대사업국장도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정치권의) 성차별적 발언들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 사건 이전의 한국 사회와 한 맥락 안에 있다"며 "우리는 이걸 구조적 성차별이라 부른다"고 강조했다. 신당역 사건을 두고 "(가해자가) 좋아하는데 (피해자가) 안 받아주니 폭력적 대응을 한 것 같다"고 발언한 이상훈 더불어민주당 시의원, "피해자가 여가부로부터 상담 등을 지원 받았다면 비극적 사건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 발언한 김현숙 여가부 장관 등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젠더폭력 현장, 사회 곳곳에 있다" ... 여성들, 사회 전반에 '성평등 문화' 구축 요구
현장에 모인 시민들은 정치권이 일차적으론 스토킹 범죄 대책 마련에 집중해야 하되, 근본적으론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성차별 구조"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인이라는 극단적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여성폭력 사건은 "서울교통공사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스토킹 범죄에만 국한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진성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는 "오늘 아침에도 나는 지하철에서 한 남성 시민에게 폭언을 들었다. 계속되는 신체접촉과 원치 않는 '도움'을 거부했다는 게 이유였다"라며 "(사건이 벌어진) 지하철은 장애여성이 일상적인 차별을 경험하고 안전을 위협받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사건 이후 정치권이 강조하고 있는 여성·시민 안전 대책은 "일상의 다양한 공간에서 차별받지 않는 삶을 보장하는 일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게 진 활동가의 지적이다.
이경민 경찰청 공무직 노동조합 위원장은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지하철 역무원들의 경우처럼) 경찰청 공무직들도 민원인의 협박, 심지어 물리적인 접촉에까지 시달린다"며 노동자들에게, 특히 여성노동자들에게 '안전하지 못한 일터'에 공감을 표했다,
그러면서 이 위원장은 "경찰청이 여성안전에 대한 국민 불안을 해소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청 내 공무직 여성노동자들의 일만해도 '남의 일'이라며 회피하면서 어떻게 사회 전체의 여성들 불안을 해소할 수 있겠나" 되물었다.
주최 측의 현장 발언과 시민 즉석 발언 등으로 1시간 30분 가량 진행된 집회는 현장에 모인 시민들의 분노와 공감을 "투쟁으로 이어나갈 것"을 결의하며 마무리됐다.
현장 발언이 마무리 된 오후 8시 30분께 집회 참여자들은 △스토킹 전담부서 설치 등 스토킹 범죄에 대한 실질적 대책 마련 △신당역 살인사건 가해자의 엄중 처벌 △여성 직원 업무 배제 등 부적절한 대책에 대한 사과 및 철회 △성차별 구조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과 각성 등을 요구하며 현장 퍼포먼스와 행진에 나섰다.
보신각에서 시작된 이날의 시민 행진은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과 시청역, 5호선 광화문역 등을 거쳐 다시 보신각으로 되돌아오며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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