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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주·통일을 외치다 쓰러진 넋이 어디 이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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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주·통일을 외치다 쓰러진 넋이 어디 이 뿐이랴"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18. 노촌 선생, 마이크 잡다 ②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25편)을 볼 수 있다.(☞ 바로 가기)

노촌 선생과 김구학회

인사동에 자주 들려 민주인사 양심적 지식인들과 어울리면서 노촌 선생의 한문서당(以文學會)도 알게 되었지만, 막상 선생의 자서전 <산정에 배를 매고>-노촌 이구영 선생의 살아온 이야기- 곧 '잔잔한 어조의 속 깊은 말씀 속에 묻어나는 모순과 질곡 투성이의 비극적 한국 현대사! 그 역사를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장으로 돌리려 애쓴 한학자 노촌 선생의 진솔한 이야기!'를 입수한 것은 2002년 11월 14일 선생의 단아한 모습을 뵈온 후였다.

마침 한 사람의 백범이 아니라 수십 명의 백범이라 할 만한 선생의 역정을 묶어 <김구열전>을 펴내기로 마음먹고 준비하는 중에 또 다른 <노촌일지>를 대하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노촌의 경교장 세미나와 산수 이종률의 증언을 토대로 김구 선생 글방이 열리고, 남북평화 협력과 자립 경제가 강조되는 가운데 백범이 부활하여 이를 건사한다. 많이들 탄압받아 구속되고 처형되고 옥사하기도 했으며, 끝내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1903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청년회 대표로서 상동교회에 다녀오면서 백범이 지녀온 전통신앙은 훨씬 진화한다. 지금 백범은 유불선 삼교를 넘어 국교 창달에 여념이 없으시다.

​김구학회와 백범의 부활

이 나라 백성들은 지금 십자가에 매달린 백범의 부활을 본다. 빌라도는 부귀를 위하여 백성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이지만, 예수는 사랑하기 위하여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권력이다. 예수가 죽은 후 다시 공의로운 세상을 만들라는 명을 받으니 곧 부활이다. 여기에서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는 예수의 권능이 샘솟는다. 그러나 그 구원과 심판은 너무 멀리 있다. 의에 죽은 자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백범이 그 모범을 보인다.

백범은 양반들과 자주 싸움을 벌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계방(稧房-돈으로 권력자와 연줄을 맺는 것)을 만들어 가며 양반들의 천대와 억압을 피하려 했다. 창암(백범의 초명)이 동학에 입도한 것은 진주(眞主)를 모시고 빈부귀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종지에 끌렸기 때문이다. 상놈으로 태어난 그의 원한은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동학군의 선봉에 선다. 탐관오리와 그 배후세력인 왜놈들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권비 토벌과 국권 회복은 그의 일관된 신조였다. 그에게 국권은 민족공동체의 생명이며, 이를 빼앗긴 것은 권비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양반들이 충신과 공신을 실컷 우려먹다가 나라를 빼앗겼는데도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질타했다. 상민들에게는 그들이 주권자로서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격려했다. 1903년 기독교 입문, 1905년 신민회 가입을 계기로 그의 꿈은 공화국 건설로 굳어진다.

그의 가문은 상놈이었지만 기와집이 즐비했고 선산에는 석물도 많았다. 계부 준영은 술망나니에서 깨어나 큰 재산을 모았다. 계부는 처음 교육 사업에 투신한 창수(창암의 개명)를 하나의 난봉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네가 남에게 그렇게 존경받을 줄 몰랐다"며 크게 놀랐고, 이어서 안악사건 때는 김구의 옥바라지를 도맡아 하게 된다. 창수는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지방 부호들의 지원을 받았고, 처신 잘못으로 생기는 가난도 눈여겨보았다.

자연 그의 빈부관은 억강부약으로 굳어져 갔다. 명예는 시절에 따라 부인될 수 있지만, 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백범의 주장이었다. 어려운 가운데 의연히 임정을 지키면서도 그는 공산당의 지나친 분파투쟁을 반대했다. 그들에게 먼저 민족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요 민생의 방법은 그 다음이라 했다. 특히 백범은 국제주의를 반대하고 시류에 영합하는 사회주의 대신 우리의 국성과 민도에 맞는 제도를 원했다.

그는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누구나 교육을 받으며 병이 나도 걱정이 없는 사회를 꿈꿨다. 그 꿈은 1934년 임정건국강령으로 채택된 조소앙의 삼균주의로 더 구체화 되었다. 또 백범은 젊어 한때 동학군을 이끌었고, 왜놈 장교 쓰지다를 타살하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의병들이 적개심만 가지고 날뛰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분혈용출하는 청년들의 격발"을 만류하고 독립군의 무모한 습격도 반대했다. 인재 양성, 조직 확대, 치밀 작전 등 실력 강화를 중시했다.

"대소 권력을 쥐고 축재한 자는 권비다. 석개오는 가진 것의 반, 뺏은 것의 네 배를 물어내고야 용서를 받았다."(누가 19-2) 권력의 비호를 받은 재산은 이를 비호한 권력에 더 문제가 있다. 재산을 모으는 것은 어느 시대나 백성의 본업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재산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자산가를 모두 증오하는 것이 탈이다. 좌우합작 때도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고, 또 그것이 당시의 열망이기도 했지만 결코 옳은 일은 아니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어렵다면 현실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소 고통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 당로자인 공권력을 바로 세워야 한다. 먼저 권비를 몰아내고 권비가 되려는 출셋길을 차단해야 한다. 권력을 부각시켜 그 위세에 가담하려는 지식인도 출새 떼들이다. 이들이 소위 반칙문화를 조장한다. 흔히 개혁을 앞세우지만 그 개혁이 공권력 내부를 겨냥하지 않으면 또 하나의 선동이 된다. 백범은 죽어 그 헤매는 권력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달아난 목신(木神)

백두산 상상봉에 나무 한 그루 솟아 있고, 그 위에 환한 신선이 휘영청 내려앉으니 박달(밝은 달)이라. 그 나무가 박달나무요 그 밑에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 방도를 터득한 출중한 인물이 태어나거늘, 박달(배달)겨레가 그를 상좌에 모시어 임금을 삼으니 박달임금 단군이라. 아침 저녁 밝은 나라(아사달)는 목신(檀樹神-帝王韻紀)을 모시고 장장 4200년을 견딘 끝에 이제 모든 백성을 다 살릴(다스릴) 일꾼으로 창암을 점지하기에 이른다.

창암(김구의 초명)은 처음 과거 공부를 시작했으나 설령 나랏일을 본다 하더라도 탐관오리들 틈에서 뜻을 펴기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손을 댄 것이 천문지리서요 병서였다. 창암은 마의상서(麻衣相書), 지가서(地家書), 황석공소서, 통감, 사략을 읽으며 조선의 목신이 수천 년간 오랑캐들의 도끼질을 견뎌내며 오늘에 이른 것을 알게 된다. 비록 만신창이가 됐으나 천지의 도수가 변해서 불원간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될 날이 온다고 내다보았다.

창암의 사상은 개벽으로 흘렀고 동학에 끌리면서 무장봉기에 앞장선다. 실패 후 안 진사(중근의 아버지)에 의지하여 고 능선의 사사를 받는다. 10년 간 광복기지를 마련할 방도를 찾다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16년간 계몽활동을 펼친다. 마침내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상해로 건너가 임정을 세운다. 26년이 지나 왜놈들이 물러간 조국 땅을 밟은 백범의 가슴은 안개로 자욱했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너도나도 감투싸움이었다.

그래도 백범은 독립 우선이었다. 점령군을 먼저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반탁을 지지했으나 오히려 단정(單政)을 세우려는 이승만에게 이용만 당했다. 소련의 지시를 받아 찬탁에 나섰던 공산당도 단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민족 분열과 상잔을 막으려는 백범의 노력은 허사로 끝났다. 백범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토해낸다.

"내가 백성의 공화국을 세우기로 마음먹은 것은 신민회에 참석하고부터였다. 황실과 친일고관들의 영화와 안녕을 보장받고 친일 인재들의 관리 등용을 허용 받는 조건으로 나라의 통치권이 완전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어간 직후였다. 일제를 떠받드는 새로운 사대부적 특권사회의 형성이었다. 그래서 백성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는 백성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고, 그 백성이 나라의 주인으로 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럴 때가 왔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의 거목을 찍어내다니. 놀란 목신이 우리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는가. 삼무고(食苦, 學苦, 病苦)의 동아줄로 단단히 붙들어 매어 깊숙이 뿌리내리게 하려던 내 꿈은 산산조각 났으니, 이제 살아있어 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시절은 나를 다시 절(寺)로 가라니 누가 있어 목신을 모셔오겠는가. 차라리 썩어 밀알이 되리라. 자살을 결심할 때마다 날 깨우셨던 하나님. 이제 그만 날 거두어 가소서."

백범은 마지막 연설에서 산적을 피하려면 떼 지어 가야 한다고 외쳤으나 이미 남북은 서로가 스스로 산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백범은 그래도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찢어 가질 만큼 욕심을 부릴 줄은 몰랐다. 백범이 떠난 후 1년도 안 되어 피비린내 나는 대살육전이 벌어졌다. 백범이 예상한 대로였다. 백범은 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죽어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듯, 나는 죽어 권력을 고난으로 짊어질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리라."

조선조만 하더라도 인재들의 목표는 특권층에 진입하는 소위 출세였다. 특권의 내용이 결과적으로 수탈과 억압이었는데도 인재란 인재는 500년간이나 그리(과거제도)로 몰려갔으니, 그리고 지금도 그 물줄기가 도도하니 어느 인재가 귀족을 마다하고 자유와 평등을 백성에게 찾아주고자 험난한 길을 걷겠는가. 서양에서는 평민들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고자 이 일을 해냈으니 바로 근대화요 민주주의 아닌가.

공화국이라 해도 조선의 인재들은 곧 많이 귀족공화국을 꿈꿨다. 그래서 많은 분파와 분쟁이 있었다. 백범은 이들 모두를 임정 품에 안으려 애썼다. 그러나 해방정국에서 다시 치솟은 부와 명예욕은 백성의 공화국을 가로막았다. 빌라도의 형통과 예수의 고난을 멈추기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너무 멀리 계셨다(시편 10-5). 이제 부패특권에 쓰러진 원혼들이 직접 나서서 그 권좌를 꾸짖어야 한다. 조령(祖靈)의 우렁찬 목소리로 권비를 내쳐야 한다.

백범 목신 앞에 무릎 꿇다

조선의 수호신은 박달(밝은 달)나무다. 박달 신이 내려앉았다 해서 조선족들은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박달신의 보호를 받는 박달(배달)겨레라 했다. 조선의 박달목신(檀樹神-帝王韻紀)이 주변국으로부터의 온갖 도끼질을 견뎌내고 4300년 만에 거목으로 우뚝 솟을 기회를 맞았는데 이 때를 당하여 겨레가 한마음으로 뭉치지 못하고 남북으로 갈리어 피범벅이 되도록 싸우니 목신은 크게 노하여 어디론가 행방을 감추고 만다.

김구가 뒤를 밟는다.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고향으로 가셨나. 그게 어딘가. 백범은 동학에 입도하기 전 역서와 사서를 통해서 조선의 수호신을 알게 되었고 왜놈들만 물러가면 국운만세라 생각했다. 10년 후 기독교를 믿게 된 김구는 바빌론의 태양신전 에사길의 위압을 벗어나 달의 도시 하란에 도착한 아브람을 읽는다. 간과주차(干戈舟車)로 중원을 통일한 황제를 버리고, 달뜨는 요하를 건너 부스랑(평양-저울대라는 뜻)에 도착한 배달족을 떠올렸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태양을 숭배하고 혹은 달을 사랑했다. 태양은 권력과 군림을 상징하고 달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오늘 존경을 받을지라도 내일 반드시 조롱당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박달가와 아브람 가는 달을 따라 나섰다. 배달족이 정착한 곳은 송화 강가 아사달이며, 아브라함이 정착한 곳은 가나안 땅 헤블론이었다. 아사달 아득한 거목 위로 박달신이 내려앉고, 헤브론 상수리나무에 사랑신 아쉬타르테가 둥지를 틀었다.

김구가 먼저 찾아간 곳은 아사달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박달님은 계시지 않았다. 다음으로 부스랑을 찾았다. 거기에도 박달나무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 아니 거기까지 가셨단 말인가. 아틀란티스 대륙이 가라앉은 대홍수 때 용마가 그림을 지고(負圖) 나온 곳. 남북으로 미친 듯 나대던 황하가 동쪽 발해로 순순히 방향을 틀은 곳. 용문의 한성(韓城)이니 박달님이 복희씨에게 그 용마의 등그림(河圖)을 풀어 보이신 땅이다.

그러나 박달님은 한성에도 계시지 않았다. 김구는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제가 분단을 막기 위하여 양군 철수를 주창했지만, 해방정국을 선제하지 못하고 전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듬해 이시영의 성재학계(省齋學稧)를 중심으로 총무 박영덕이 전선을 뚫고 최익환을 밀파하여 휴전협상을 벌였으나 쉽게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1952년 이시영을, 1956년 신익희를 평통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전쟁의 불씨를 제거하려 했으나 좌절되었습니다."

"1960년 학생 178명이 목숨을 바친 끝에 이승만이 물러나자 다시 김창숙을 중심으로 민자통(民自統)의 전열을 가다듬었으나 군사혁명이 일어나 일이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기약 없이 남북이 대치하고 원한과 증오의 골이 깊어 갈 조짐이 뻔한데 이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올지…." 박달님의 말씀이 멀리서 아련하게 김구의 귓전을 맴돈다. "너는 조선 백성을 다 살릴(다스릴) 적자로 점지되었음을 잊지 말라. 내 이미 지부인(地符印) 셋을 내렸다."

"곧 남한에 금영(金營)국이 서고 북한에 병영(兵營)국이 서리니, 네가 나서서 남북을 모두 민영(民營)화하라." 김구의 어깨는 천근만근으로 내려앉았다. 김구가 두려워 박달님을 연호하니 "이제는 상생의 세계라 민영화가 되면 구월산과 금강산 사이가 가운데 땅(土)이 되리라. 내가 먼저 남한에 불을 지피고(木生火) 이 불로 가운데 땅을 데운다(火生土). 가운데가 서쪽 요하로 시장을 확대하고(土生金) 다시 송화강 흑룡강으로 북진한다(金生水)."

"합방 100년, 분단 60년, 2010년에 이르러 남북협의회가 성립된다. 장차 조선이 하나 되어 북상할수록 동방의 힘은 점점 커진다(水生木). 문제는 또 일본이다. 나는 조선이 일본을 이끌고 올라갈 때까지(木生火) 동해를 떠돌며 연안국을 지켜보리라. 그 때가 되면 내 백두산에 좌정하여 참 가운데 땅(한성)을 삼으리라. 동쪽으로 일본 미국을, 서쪽으로 중원 유럽을, 남쪽으로 동남아 인도를, 북쪽으로 러시아를 평정(平正)하여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리라."

김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일어나니 민족일보 조용수가 뒤따르고 비서 장준하가 수발을 든다. 다들 비명에 가 원혼 되어 만나니 민주·자주·통일을 외치다 쓰러진 넋이 어디 이 뿐이랴. 그 중에도 박종철이요, 이한열이요, 강경대가 꽃다운 나이에 맞아죽으니 피어나지 못한 채로 떨어져간 젊음이 어찌 천추 한을 품지 않겠는가. 이제 그 민주화운동이 시민운동으로 대하되어 흐르니, 민영화가 눈에 보이는지라 백범은 서둘러 그 요원 양성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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