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윤석열 정부는 국민 주거안정 지원 대책(8·16 대책) 발표에서 수도권 1기 신도시(성남 분당, 고양 일산, 부천 중동, 안양 평촌, 군포 산본) 재정비 관련, 올해 하반기 연구용역을 거쳐 2024년 도시 재창조 수준의 재정비 마스터플랜을 수립해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는 지역 주민들에게 2024년까지는 사업을 본격 추진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졌다. 애초 윤석열 정부는 110대 국정과제에서 '1기 신도시 특별법' 제정을 거론하며 재정비 사업의 추진 속도를 높이겠다고 했으나, 이번 발표로 구체적인 계획도 마련되지 못한 채 시기마저 늦춰져 버린 셈이다.
반발의 목소리가 커지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진화에 나섰다. 8.16 대책 1주일만인 23일, 1기 신도시 재정비를 위한 마스터플랜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오는 9월 마스터플랜 연구용역을 발주하고, 5개 신도시별로 전담 마스터플래너(MP·총괄기획자)를 지정하겠다고 했다. 또한 5개 신도시별로 팀을 만들고 여기에 재정비 사업의 권한을 지닌 (지자체의) 각 시장을 참여시켜 협의체를 운영하겠다고도 했다.
1기 신도시 5곳이 모두 있는 경기도의 수장 김동연 경기도지사도 나섰다. 경기주택도시공사(GH)와 재정 및 종합구상 용역 등을 통한 내용들이 1기 신도시 재정비 마스터플랜에 담길 수 있도록 요청하고, 해당 지역구 의원들을 중심으로 국토위원들과 협력해 1기 신도시 특별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원 장관은 경기도지사는 신도시 재정비에 아무런 권한이 없다며 받아쳤다. 도시정비 기본계획 수립과 지구지정, 안전진단 실시, 조합설립·사업계획 인가, 준공 처리 등이 모두 (도지사가 아닌) 시장의 전적인 권한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첫 삽은 고사하고 재정비 사업의 주도권을 누가 가져가느냐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은 30년 전 진행된 1기 신도시 사업과는 질적인 면은 물론 양적인 부분에서도 차원이 다르다. 전체 면적만 5014만 제곱미터에 116만8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주택만 29만2000호가 존재한다. 이 지역을 재정비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최경호 주거중립성연구소 수처작주 소장은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이 탑다운 방식의 '마스터플랜'으로 진행되어선 안 된다고 주문했다. 몇 가지 포인트를 잡고 진행하되, 사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수 등을 처리하는 추진본부을 두고서 여기서 상황에 따라 처리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일괄 재정비가 아닌, 순환재정비와 용적률의 차등 적용을 언급하며 이를 위해 '토지주택은행' 같은 기구 설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최경호 소장은 국토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 서울시 사회주택종합지원센터 센터장 등을 역임했고 서울플랜 2040 수립에도 참여했던 (주택 및) 도시계획 전문가다. 아래 그와의 인터뷰 내용.
"당장 사업성 개선을 위한 무분별한 규제완화 방안 발표하지 않아 천만다행"
프레시안 :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 관련해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 사업은 윤석열 대통령의 후보 시절 주요 공약이었지만, 지난 16일 정부가 마스터플랜을 2024년까지 마련하겠다고 하자 공약을 파기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졌다. 윤 대통령이 당선되면 곧바로 재정비 사업이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던 지역주민들 입장에서는 2년 뒤에야 겨우 마스터플랜을 수립한다는 것은 사업을 안 하겠다는 신호로 읽힐 수도 있을 듯하다.
최경호 : '당장 동시다발적으로 정비사업을 시작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정부의 8.16 주택공급대책에서 유일하게(?) 반가운 구절이었다. 2024년을 언급한 것이 총선용 선물꾸러미로 '주민들 줄세우기'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어쨌든 당장 사업성 개선을 위한 무분별한 규제완화 방안을 발표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사실 국민 여론을 생각하면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는 게 좋을 수 있다. 자기 집값 오르는 것을 싫어할 국민은 없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이를 2년으로 미뤘다.
최경호 : 정부로서도 뾰족한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야당일 때와 비교해서 책임감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은 어느 쪽이 여당이 돼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경기 하락세인 와중에 섣불리 대규모 정비사업 계획을 발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00만 명이 넘는 이들이 사는 공간을 한달음에 재정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도 고심했을 것 같다.
프레시안 : 정부가 2년 동안 재정비 사업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한다고 했는데, 이는 완벽한 청사진을 만든 뒤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취지 아닌가.
최경호 : 속내야 모르겠지만, '완벽한 청사진으로서의 마스터플랜을 만들고 시작하겠다'는 이유로 법안 제정이나 기타 일정을 미루는 것에는 반대한다.
프레시안 : 왜 그런가.
최경호 : 만약 1기 신도시가 1000세대 단지 하나 짓는 것이라면 전통적인 의미의 '마스터플랜'을 세워서 진행하면 된다. 그러나 1기 신도시는 규모 등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대략 30만호가 5개 도시의 5014만 제곱미터에 걸쳐 있다. 인구도 117만 명가량 된다. 이런 규모의 사업을 모든 시간표와 계획을 짠 다음에 그대로 진행한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탑다운' 방식으로는 이렇게 큰 규모와 긴 기간의 사업에서 발생하는 변수나 외부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
프레시안 : 좀 더 자세히 말해 달라.
최경호 : 30만호가 동시에 철거되면 이들을 받아줄 집이 없다. 그러니 가령 2만 호씩을 순차적으로 한다고 해도 15번에 나눠 해야 한다. 첫 팀이 시작하고 일사분란하게 매년 이어서 들어온다고 해도 준비기간 하고 뭐하면 짧아도 대략 15년은 걸릴 것이다. 그 사이에 인구구조, 산업구조가 다 변한다.
현대사회는, 특히 계획기간이 길수록 처음부터 '탑다운' 방식의 조감도와 마스터플랜을 그려놓고 접근하는 '종합적 합리주의' 방식의 계획 패러다임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각종 변수를 인지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인간의 합리성 범위에도 한계가 있고, 따라서 모든 것을 고려한 완벽한 계획을 짤 수 없다. 도시계획을 비롯한 정책결정이론에는 그래서 이미 1960-70년대에 점진주의(Incrementalism)라는 개념이 나오고 합리주의와 점진주의의 절충안인 '혼합주사(mixed-scanning) 모델'도 나왔다.
프레시안 : 구체적인 예를 들어줄 수 있는가.
최경호: 학술적으로도 조금 어려운 개념이라서 얼른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대략 1960년대의 국토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이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탑다운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합리주의에 가깝고, 20년 짜리 기본계획을 세우고 중간중간에 재정비하는 지금의 도시기본계획이 혼합주사모형이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다. 추상적 목표 보다는 또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중시하는 교류적/협력적 계획, 가치판단의 중립성을 회의하며 각 이익집단, 특히 약자를 충실히 대변해야 한다는 옹호이론 등 21세기의 계획패러다임은 계속 진화하고 추가되면서 서로 보완하고 있다. 도시계획에서 주민참여의 폭을 넓혀온 것도 그러한 차원이다.
프레시안 : 듣고 보니 전통적인 관점에서 '청사진'을 잘 그리고 이를 집행하면 된다는 관점은 매우 안이한 생각이 되어버렸다고 봐야겠다. 그게 아니라 계획의 수립과 진행과정에서 현대사회의 복잡한 돌발변수에 잘 대응해가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어 정책의 재무적, 민주적,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과연 중요할 것 같다.
최경호 : 1기 신도시라면 정비사업조합원 뿐만 아니라 세입자, 주변지역 주민, 쓰레기나 기반시설에 대한 각종 비정부조직이나 이해관계자 집단이 저마다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런데 마스터플랜을 잘 짜고 '마스터플래너'를 훌륭한 사람을 모셔서 잘 계획하고 잘 집행하겠다는 식이라면 아직 1970년대 이전의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한 번에 재정비 안 된다. 순환정비와 차등 용적율 적용이 필요하다"
프레시안 : 그렇다고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사업을 진행하기는 어렵다.
최경호 : 조감도나 지금 단계에서 완벽해 보이는 계획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에서는 내가 생각할 때, 몇 가지 염두 해두고 사업을 진행하는 게 필요하다.
프레시안 : 차근히 이야기해보자.
최경호 : 우선 순환정비로드맵이 필요하다. 1기 신도시는 1991년부터 1993년 동안 총 5곳에 약 30만 가구, 117만 명이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었다. 그때는 죄 논밭이었다. 그러니 한 번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실 그때도 원자재 품귀현상도 벌어지고 바다모래를 썼다고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철거로 인한 대규모 이주인구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여기에 사람이 100만 명 넘게 살고 있다. 이들의 이주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지역을 재정비한 40~50년 뒤다. 지금도 이들 지역 정비를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부담이 이렇게 큰데, 또다시 정비가 필요해지는 시기에 계획대로 용적률을 늘린다면 이주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하는 재정비 사업은 단지 별로, 혹은 단지 안에서도 쪼개서, 예컨대 500세대나 1000세대 이하 규모로, 순차적으로 정비를 진행해야 한다. 물론 권역별로 어떻게 조를 나누느냐에 따라서 한 신도시에서도 여러 조가 동시에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럴 경우 지역에서 반발이 심할 듯하다. 후순위로 정비가 밀리는 경우는 '이러다 개발 안 하는 거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마스터플랜을 2년 동안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두고도 지금의 논란이 생겼다.
최경호 : 다른 동네가 먼저 정비사업에 들어가면 그 옆 동네는 공사기간 내내 불편을 겪어야 한다. 또한 부동산 경기가 활황기 때 사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후순위로 밀려 하지 못하게 될까봐 불안할테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자연히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어떻게 이런 불만을 잠재울 수 있나.
최경호 : 순서를 정한다면 먼저 떠오르는 기준은 시설 노후도다. 다만 후순위로 하는 지역에는 일정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순환개발을 진행해야 한다. 구조적으로 튼튼한 곳은 미안하지만 허물고 용적률을 눌려 다시 짓는 것이 아니라 리모델링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 그러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프레시안 : 사실 지역주민들이 재정비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 중에는 주택이 노후한 이유도 있겠으나, 개발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기도 하다. 재정비 사업이 성공하려면 '용적률'을 기존보다 높여서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사업성이 좋아지고 자기부담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게 재정비 사업의 요체다. 그런데 기존 1기 신도시의 용적률이 상당하다. 여기서 더 용적률을 높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최경호 : 1기 신도시 5개 도시의 평균 용적률은 198%다. 분당은 184%, 일산은 169%, 평촌은 204%, 산본은 205%, 중동은 226%다. 역세권의 일부 지역이 아닌 넓은 주거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평균 용적률 상한은 300% 정도가 한계로 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용적률 상승으로 사업 이익을 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분당과 일산을 제외한 지역은 사업성이 나오기 쉽지 않다.
프레시안 : 그래서 대선 때 용적률을 500%까지 높이겠다는 공약이 나왔던 듯싶다.
최경호 : 500%로 높이는 건 말이 안 된다. 1기 신도시 주민이 100만 명이 넘는다. 지금 평균 용적률이 198%인데, 여기서 2.5배가 늘어나면 아무리 가구당 인구수가 줄어도 -신도시는 주로 3~4인 가구가 거주하니- 200만 명이 넘어야 가능하다. 10만 명도 아니고 100만 명의 사람들이 어디서 오는가. 몇 천 세대 정비사업 하나 할 때 가능한 논리를 30만 세대 정비사업에 들고 오면 안 된다. 반대로, 설령 미분양이 나지 않고 이를 다 채워도 문제다. 지금도 교통난이 심각한데 GTX는 몇 개를 더 뚫어야 할 것이며, 쓰레기와 에너지 문제는 어떻게 감당하려 하는가.
프레시안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경호 : 역세권 중심으로는 지금보다 고밀화 하는 '컴팩트 시티' 방식을 적용하면서 전체적으로 약간 용적률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용적률로 사업성을 보완하는 모델 말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야 한다. 또 일부 지역은 용적률이 생각보다 늘지 않아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디는 먼저 시작하고 어디는 늦고, 어느 곳은 500% 해주고, 어느 곳은 300% 해주고 하는 식이면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그러면 어떻게 조율할 수 있나.
최경호 : 권역별 인센티브의 차이와 순서별 리스크의 차이를 매개하는 기구가 필요하다. 가칭 '토지주택은행'이라고 해보자. 그것이 리츠 방식이 될 수도 있겠고 지금 LH의 '토지은행' 제도를 확대 개편하는 것이 될 수도 있겠다. 거친 아이디어지만, 내부 계정에 지자체나 지방공사도 참여하는 '지역계정'이나 '용적률 계정' 등을 만드는 것이다. 먼저 출발한 정비사업과 기다리고 있는 정비사업 사이, 용적률이 늘어난 곳과 별로 늘어나지 못한 지역, 혹은 심지어 줄어든 지역 간 개발이익을 적정 권역별로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취지는 좋으나 그럴 경우, 사유재산문제에 왜 정부가 개입하느냐는 지적이 나올듯하다.
최경호 : 반대로 왜 공공이 개입해서 민간조합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느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1기 신도시 재정비는 5개 도시에 걸친 100만 명이 넘는 이들의 터전이 걸린 문제다. 공사기간 동안 이주민을 받아줘야 할 주변 도시들의 전월세난까지 염두에 둔다면 10개 도시에 200만 명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개발을 하면 도로 등 기반시설도 뒤따라 정비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것을 사유재산의 문제라고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지금의 주택단지들은 개발시대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잠잘 곳을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지어댄 덕분에 이제 대규모로 시가지를 구성하고 있다. 아파트 같으면 대지지분도 '집단주의'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이걸 사유재산이라고만 보고 100만 명의 사람들이 알아서 순번 정해서 진행하라고 하는 게 오히려 공공의 책임방기 아닐까 싶다. 리츠 방식이든, 토지주택은행 방식이든, 불가피한 인센티브의 차이를 보완할 방법과 정비사업의 순서를 정해야 하고 이대로 따라도 괜찮다는 '신뢰'를 구축해야한다.
"15년 걸리는 정비 사업, 원희룡과 김동연 싸울 이유 없다"
프레시안 :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짚어주었다. 다만 워낙 거대한 사업이고, 지역도 흩어져 있다. 이를 종합적으로 컨트롤할 타워가 있어야 할 듯싶다. 그런데 현재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과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서로 주도권을 가지려 싸우는 모양새다.
김동연 지사가 '2년 뒤 마스터플랜' 발표 직후 '공약파기'라고 비판하자 원희룡 장관은 경기도지사는 신도시 재정비에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받아쳤다. 도시정비 기본계획 수립과 지구지정, 안전진단 실시, 조합설립·사업계획 인가, 준공 처리 등이 모두 (도지사가 아닌) 시장의 전적인 권한이라는 것이다. 실제 그런가.
최경호 : 지금의 정비 사업은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도정법)에 따라 하는데 거기에 승인권자에 광역 도지사가 빠져 있다. 이것만 보면 원 장관의 이야기가 맞는 셈이다.
프레시안 : 왜 그런 것인가.
최경호 : 정비 사업이 주로 도심 내에서만 국지적으로 일어나지 않나. 그렇기에 도정법에서 정비사업과 관련한 계획수립이나 승인 등의 권한을 가진 단체장은 특별시장, 광역시장, 특별자치시장, 시장 등 공간적으로 밀집한 '도시'의 시장이다. 다만 특별자치도지사가 추가된 것으로 안다. 광역도지사는 빠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과제는 광역 단위로 동시에 여럿이 하는 정비사업의 순서와 이익을 조율해야 하는 일이다. 기존 도정법 패러다임 밖의 상황이 닥쳐온 것이다.
프레시안 : 과연 그렇다.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은 5개 도시를 넘어 주변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니, 경기도지사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최경호 : 5개 도시 이외에도 그 도시 주변의 경기도 다른 도시도 큰 영향을 받고, 대장동과 같이 도시개발법에 따른 개발사업이나 3기 신도시 사업, 다른 택지개발 사업들의 완공 시간표와도 긴밀히 연계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용적률도 손을 댄다면 도로도 손 보고 기반시설도 늘려야 한다. 이것을 5개 도시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나. 경기도비는 하나도 안 들어가고 국비와 시비만으로 할 것인가. 경기도지사가 빠지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새로운 시대의 과제에 직면했는데 기존 법체계에 얽매여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 그러지 말라고 우리가 선출직 정치인들을 뽑아서 행정을 지휘하게 하고 국회에서 새로운 법도 만들고 하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 : 그래서 김동연 지사가 해당 지역구 의원들 중심으로 국토위원들과 협력해 1기 신도시 특별법을 통과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듯하다. 여기에는 도지사가 권한을 갖는 게 핵심이다.
최경호 :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 경기도가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름은 1기 신도시 특별법이 아닌 '광역 순환 정비 특별법'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1기 신도시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의 정비사업도 줄서서 대기하고 있는데, 이곳의 주민들은 각자의 생활권에 따라 주변 수도권으로 잠시, 혹은 오랜 기간 이사 가는 경우도 상당할 것이다. 1기 신도시 정비와 서울의 정비사업을 동시에 다 같이 한다면 수도권 전부가 공사판이 되고 원자재값, 전‧월세값이 폭등하는 등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광역 순환 정비 개념으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프레시안 : 그 법에 담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최경호 : 법에서 순환정비로드맵 상의 정비사업 순서를 언급할 필요는 없다. 법안은 우선 △순환정비의 로드맵을 만들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 기존의 정비조합과 사업승인권자들의 권한을 제약하고 순서를 따르게 하려면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환정비에 필요한 규제와 인센티브 범위를 정하고 △이미 어느 정도 나와 있다고는 하는데, 노후도와 수요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순환정비 시간표를 짜고 실무를 진행할 수 있는 기구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 가령 '광역순환정비 추진본부'의 설치 근거와 운영에 필요한 인력, 예산 동원의 법적 근거다. 기타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기존 도정법이나 도시개발법, 수도권정비계획법 체계로 풀 수 없는 이 과제를 풀기 위한 차원에서 정리해야 한다.
프레시안 : 이 법을 구체화하고 통과시키는 데에도 상당 시간이 걸릴듯하다.
최경호 : 경기도지사와 국토부 장관이 충돌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국토부 장관은 2년 정도가 임기일 것이고, 경기도지사는 임기가 4년이다. 아까 말했지만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은 첫 삽을 뜨고 최종 마무리가 될 때까지 15년은 걸릴 것이라면, 도지사가 3선을 해도 이들 임기 내에는 다 할 수 없다. 이렇게 긴 시간에 걸친 사업을 하면서 변화에 대응하고 초기 계획을 수정하고,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연속성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 국토부 장관과 경기도지사는 서로 협력해 법을 만들고, 그에 따라 순환정비로드맵을 만들고 전 과정을 끌고 나갈 기구를 출범시키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내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임기 내에 첫 삽은 뜰 수 없다고 '공약파기'라고 하거나, 법 보다 마스터플랜이 먼저라며 '경기도지사는 빠지라'고 해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원희룡 장관은 마스터플랜을 세운 뒤, 그에 맞는 법을 제정하겠다는 의미 아닌가.
최경호 : 화려한 조감도를 국토부 혼자 만들 수는 있겠다. 과거 방식의 마스터플랜과 그에 따른 시간표를 제시하고 이에 맞는 법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으로 100만, 아니 200만 가까운 주민들이 쉽게 수긍하고 동참해서 10년이 넘는 기간에 최초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을까. 그 사이 선거도 여러 번 있을 텐데, 그때 마다 모든 지역에서 '우리 지역만 용적률을 높여 달라', '우리 지역이 더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 사업하게 해달라'고 하면 사실 정치인들로서도 악몽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는 탑다운 방식의 계획이 통할 문제가 아니다. 국내엔 2010년대 경기침체 장기화 현상을 이르는 말로 소개되기도 했는데, 머들링 쓰루(Muddling through)라고, 앞서 '점진주의'를 주창한 린드블롬이 1959년에 한 말이 있다. 번역하면 '꾸역꾸역 이리저리 헤치며 힘겹게 나아가기'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를 1기 신도시 정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 지난한 과정을 헤쳐나갈 수 있는 조직과 제도의 토대를 탄탄히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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