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피의 기억은 흐른다
1.
정월 초하루 썰어놓은 떡국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박산 골짜기에는 더 이상 굴뚝 연기 오르지 않았다
어제 내린 함박눈보다 세차게 퍼붓는 군인들의 총알
구덩이를 파고 묻은 사람들 위로 포탄이 터지자
살덩이와 옷가지가 나무마다 걸렸다
가녀린 목숨들을 불태운 연기가 온 산을 덮었다
핏빛 눈이 내리는 언덕
숨소리가 사라진 골목길
새들도 저 바깥을 향해 떠나가는 하늘 아래
엄마는 아이를 잃고 아이는 엄마를 잃고
서로를 울어 줄 사람 하나 남지 않았다
몇 날 며칠
죽음들을 덮으려고
하늘만 낮아지고 낮아졌다
2.
피 묻은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박산골
작은 야생화 꽃잎마다
본 적 없는 피의 기억이 흐른다
신도 감히 설명할 수 없는 꽃향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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