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25편)을 볼 수 있다.(☞ 바로 가기)
늘 듣는 얘기는 우리 집이 양반 집이란 것, 양반의 자식이란 것, 그러니 부모 말 잘 들으란 얘기겠지. 양반이 무언지도 모르고 그저 아부지 엄니보다 더 센 분, 더 어려운 분, 아니 더 높은 분으로 마음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차차 그 분이 문정공, 아주 공자 같은 분으로, 커서는 내가 그 할아버지의 17세 손으로, 또 기록을 보고는 왕이 꿈에 그리던 성인을 본 듯하다 했고, 집현전 동료들까지 걸으면서도 수천 권 장서를 외우고 다녔다고 외경했음을 알았다.
사당(당집)이 동내에 있었기에 그 자손인 우리는 대대로 이 동내에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커가면서 들으니 멀리서 일가가 말 타고 찾아와 제를 올린다기에 무심했던 사이 그가 위패를 훔쳐갔다고 했다. 공신 자손들에게 벼슬을 준다고 해서 그랬다고 했다. 집안에서는 상종 못할 것들이라고 해서 제례를 바꿨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색당쟁 때도 파가 갈리면 홍동백서를 어동육서나 조동율서로 하는 등 해서 인연을 끊었다고 했다.
벼슬이 뭔지도 모르고 일가들이 상부상조하며 사서삼경에 나와 있는 대로 또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서평 한가였다. 집안에 독선생을 앉히거나 아니면 집안 어른들이 나서서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쳤지만,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 노릇을 제대로 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란 도인이 되는 길이었고, 벼슬이 더 윗자리라면 더 큰 도인일 것이었다. 말을 타고 와서 몰래 위패를 가져가는 것은 벼슬일 수 없었다.
차츰 먼 데 사는 일가들이 높은 벼슬을 했고, 지금도 벼슬을 하려고 기를 쓴다는 건 좋게 보이질 않았다. 우리가 어려서 읽는 소학에도 수신제가가 치국평천하의 근본이라 하지 않았는가. 또 벼슬이라 해도 최대 국난이었다는 임란 때 왕을 따라간 고관과 대소궁인 90명이 공신에 책봉된 반면, 무공을 세운 장병들은 겨우 20명에 불과했다니, 또 우리 종친 중에 벼슬을 멀리하고 대학자가 된 구암 선생이나 남당 선생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얘기였다.
집안 어른들이 고양 일산으로 시제를 지내러 다니셨기에 먼 조상 산소가 거기에 있는 줄 알았고, 남양만(南陽灣)에 많은 개펄은 나라에서 공신전으로 만들었기에 이를 받은 선비들이 내려와 마을이 되었다니 우리도 그 중 하나로 여겼다. 더욱이 부자가 공신이었던 문정공과 장남 공간공 모두 장례비가 없어 왕실에서 대줬다고 했으며, 특히 문정공은 어름과 소태로 허길 달랬다 할(大東奇文) 정도였으니 그 종손들이 한양에 발붙이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태조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의 800명 가까운 인물시사를 소개하는 가운데 유일한 청백리 문정공이 형 문양공의 후의도 한사코 거절해서, 당대의 권신 재종제 상당군이 가족을 모아놓고 의논한 끝에 동대문 밖 고암동 논밭(씨 100말분)을 내놓았으나 서평군(문정공의 예직)이 또 사양해서 그 소출만 보냈다는 기사를 인용하였으니(1928), 이 사실이 뒤늦게 집안에 알려진 셈이다. 나중에 들으니 또 그 소출도 지방민에게 나눠줘 고암동은 안암동이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안의 일상은 늘 낮에 일하고 밤에 글 읽는 데도 바쁘기만 했다. 내가 태어나고 한 달 여 만에 별세하신 할아버님도 동내에서 뿐 아니라 가근방 여러 곳에 훈장을 하시면서 자(字) 성행(聖行)대로 수양에 전념하셨기에 학행저세(學行著世-학행이 뛰어나) 사림모해(士林模楷-선비들의 모범)로 칭송받으셨지만 벼슬에는 관심이 없으셨고, 아버님은 숫제 호를 경독재(耕讀齋-일하고 글 읽는 집)로 하셨으니 가히 수도(修道)가 가훈의 전부라 할만 했다.
그런 가문이 내가 나던 해 경술합방을 맞이했으니 그 격변의 세월을 감당하기 얼마나 어려우셨겠는가 짐작이 갔다. 겨우 열 살에 이웃마을 두렁바위(堤岩)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을 엿들을수록 별 말씀이 없으신 집안 어른들의 얼굴이 좁은 가슴 속으로 주름져 들어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는 여전히 공부였다. 그런데 내가 열네 살 장가들어 아들딸을 둘 때까지 사서삼경이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오랑캐 글이라고 벼르시던 학교를 가라시지 않는가.
40대 중반까지 수원·안양·오산 등지에서 훈장을 하시던 할아버지셨기에 개항 개화를 몸소 느끼실 수 있으셨고, 아버지 열 살쯤에 전기·석유·성냥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대처 같았으면 벌써 농사나 글방 가지고는 안 되겠다 할 법도 했으나 할아버지는 여전히 천리(天理)를 따르셨고, 아버지도 그 용천인지(用天因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려하지 않으셨는데 몇 해 전부터 역학 선학 명학을 파고 드시더니 아버지의 도통하신 결론이 신학문이란 말씀 아닌가.
내가 소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이어 멀리 떨어진 보통학교로 유학을 가 또 수석 졸업을 했으니, 제 나이에 입학한 급우들과는 거의 6~7년 차이가 나는데다 할아버지의 덕행이 자자해서인지 나를 따르고 알아보는 선후배가 줄줄이 이어지며 기대도 컸었으나 나는 상급학교를 쳐다보지도 않고 학교에 갈 수 없는 아희들을 위해 강습소를 개설했다. 더 공부해야 왜놈 종노릇만 하게 된다는 아버지의 소신을 알고 있기에 또 마침 신간회가 나서서 적극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는 기자(文聖王)의 후예였기에 교명을 문성학원이라 했다. 교과목에 일어 대신 조선어를 국어로 하고 운동회 때 만국기에 태극기를 달았다. 사랑채 마루에서 춘향전을 공연하기도 했다. 처음 면에서 와서 곤란하다하더니 다음으로 순사가 와서 교과목에 일어를 국어로 하라 한다. 이 벽촌까지 일제의 압박이 밀려옴을 느끼니 문을 닫아야 했다. 때에 어머니가 중병에 드시니 의원을 구하러 다니면서 아버지의 방악합편과 동의보감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문정공이 의서 발간에 큰 공을 세웠다 했으며, 왕이 병이 나자 입시케 하고 세자를 부탁하니 문정공이 황송해하며 스스로 약을 지어 바쳐 왕의 병을 낳게 하였다고 비문(신도비)에 적혀 있으니, 집안 어른들의 의약 관심이 높았던 것을 짐작키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가 왜놈과 부딪치지 않을 전문직을 바라셨기에 독학으로 의원이 될 수 있는 평양 의학강습소(箕城)에 등록하였으나 스물을 훌쩍 넘은 나이에 무리였다. 집에 돌아와 약사(藥種商)시험을 준비했다.
2년 만에 읍내에 약국을 개설한다. 어머니 병환 때문에 알게 된 병원에서 반년 간 조수로 일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정식병원이 없는 데서 약국 지성당(至誠堂)은 약국이요 병원이었다. 많은 친지들과 환자들이 찾아주었다. 8년 만에 살림집을 겸해 약국을 확장했다. 지서(警察)에서 자꾸 소방대장을 맡으라 한다. 여러모로 거절키 어려웠다. 전쟁(태평양)이 터지니 소방대를 경방단(警防團)으로 바꾸어 경찰 보조를 시켰다. 또 안할 수 없었다.
후배들이 보국대(노무대)나 징병을 피하려고 몰려들었다. 이들을 훈련시키며 경찰들과 자주 만나야 했고 의견 충돌도 가끔 있었다. 특히 일인 지서장은 사석에서 걸핏하면 조센징(朝鮮人)이었다. 나는 반발하고 대들기도 했다. 경찰과 싸웠다는 얘기가 자자해지니 집안에서 말리기도 했다. 소문을 들은 얘들도 불안해했다. 나라를 빼앗긴 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열 살 난 아들이 금방 내려온 도라꾸(트럭) 운전수에게 들었다며 일본이 고상(항복)했다는 것 아닌가.
몇 달 전만 해도 사이판이 함락되었을 때 일본 순사에게 안타깝다는 위로를 보내던 읍민들이었다. 애는 무심코 한 소식이지만 약국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그럴 리가 없다고 의아해 했다. 방학이 되어 내려온 친척 중학생은 무슨 소리, 일본은 "사이고노 이찌닝마데 고상와 나시"(최후 1인까지 항복은 없다)라고 소리친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베이에이게끼메쓰(米英擊滅)"라 소리칠 때도, "도고. 야마모도 겐스이"(일본 전쟁 영웅들)를 자랑할 때도 아무 말 못했었다.
언젠가 아들이 하야시(林) 선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들로 나간 자리에서 일본은 곧 망한다고 했다며 수상해 해도 그런 얘기 딴 데 가서 하지 말라 했다. 오늘 또 아들에게 같은 주의를 준다. 주변 옛 관아자리에 옛 세도가 안동김씨가 살았는데, 덴노(일본천황)의 일가(친척)라고 떠드니 난감했다. 보천보 전투에 관해서 얘기한 기네야마(金)선생은 지서에 불려가 곤욕을 치렀는데, 나는 겨우 미국이 일본을 쳐들어왔다는 얘들 얘기를 반대로 하고는 겁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은 급박했다. 신문을 보는 우리는 끝을 보는 듯했다. 졸업한 지 10년을 넘어 대처에 곧 많이 자리 잡은 후배 제자들이 고향에 들리면 날 자주 찾아왔다. 난 자리를 함께 하며 용돈도 주었다. 다들 독립군 얘기요 임정 얘기였다. 그 끝에 몽양과 민세의 건준이 점점 다가왔다. 지서에서 기별이 와 가보니 짐을 싸고 있었다. 분위기는 침통했으나 우리 아들과 자주 어울리던 그 집 애들은 퍽 반가워했다. 나는 바로 후배들에게 떠밀려서 치안대장이 된다.
모두 경방단원이었다. 면민대회를 열어 해방을 경축했다. 백의민족이 모여 목청껏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나팔 북을 앞세워 거리 행진도 했다. 대원들이 야밤에 나서서 진쟈(일본 사당)를 불질렀다. 도망간 순사들 집을 들쑤셔 무기를 압수했다. 공출에 앞장섰던 면서기 구장들은 습격을 당했다. 나는 단원들의 호소로 또 친인척의 애원으로 달려가 만류하기도 했다.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조카가 시중에서 주정을 하다 잡혀와 내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추석(9·20)을 맞이해서 후배들은 벌써 연극을 준비했다. 뒷동산 작은 벌판에 간드레불이 무대를 밝히자 태극기와 조선인민공화국이 펄럭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9월 8일에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했고, 하루 전 38 이남을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는데, 이를 모르고 미군을 환영하러 나간 공화국 간부와 노동자 주민들이 총격을 받았다고 했다. 독립이 항아리 입 같이 그렇게 쉽게 열리겠느냐 한탄하신 아버지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달아났던 순사들이 다시 들어오니 나는 좀 찜찜하기도 했고 허탈하기도 했다. 이어 삼상회의다 신탁통치다 미소공위다 하니 앞날이 어찌 될 것인지 퍽 궁금했다. 김일성이 피리를 불며 서울 밤거리를 날라다닌다고 하더니, 또 여운형한테 질 거라는 소문도 시정에 흘러 다녔다. 경기도 특히 남수원(수원 남쪽)에서는 여운형이요 안재홍이었다. 해가 바뀌니 분단을 막기 위해 뭉쳐야 한다는 민전이 나왔다. 나는 벌써 자천 타천으로 지역 책임자가 되고 있었다.
의장단에 민세가 빠진 것은 좀 섭섭했지만 모두 다 건국준비요 좌우합작으로 여겼다. 그런데 좌우 극한 대립으로 대소 테러와 반테러가 횡횡하고 3·1 기념식조차 따로 하기에 이르더니, 그나마 희망이던 미소공위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고 정판사사건으로 인하여 공산당이 불법화되니 통일정부는 물 건너갔다고 생각되었다. 마침 이범석 장군이 환국하여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걸자 청년들의 마음은 많이 거기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경찰과의 관계도 다소 소원해지고 해서 내년에 있을 한의사 시험 준비에 들어가려는데 후배들이 몰려와 민족청년단을 권하는 것 아닌가. 나는 다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서에서 좀 보자는 연락이 왔다. 들어가니 바로 1년 전 내가 치안대장으로 앉아있던 자리 아닌가. 젊은이가 잡혀왔는데 얼핏 보니 안면이 있어 보인다. 경찰은 말로만 듣던 힘줄 몽둥이(황소 양물)로 그 청년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비명이 가득 차 왔다. 나는 그 길로 연행되었다.
이유를 물으니 서(경찰서)에 가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꼭 열흘 만에 귀가 조치된다. 어떤 조사 심문도 없었다. 대질도 없었다. 전국적으로 특히 대구 폭동을 전후해서 각 지방으로 대소 파업과 항의 집회가 번질 때였다. 자연 친일 세력의 재등장과 이를 비호하는 군정에 대한 항의였다. 주동자들은 대체로 자주민족 세력이었으니 쉽게 민전을 내걸었을 것이었다. 중부권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소위 예비검속이었다.
나는 더 신바람 나서 청년단 조직에 열을 올렸다. 많은 선후배들이 몰려들었다. 민족지상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내놨던 의학서적들을 다시 집어넣었다. 아주 약국을 준비 사무실로 내놨다. 나는 면 단위 조직을 벗어나 숫제 이 지역 전체를 쌍부(옛 지명)로 묶어 대단위 단부로 만들고 그 단장이 된다. 수원에 중앙훈련소가 개설되자 간부훈련을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이제 모두 짙은 감색단복을 입고 만나면 기립자세로 심장에 손을 댔다. 다들 새사람이 되었다.
마침 추석은 연휴였다 단부 결성 축하공연을 마련했다. 공설운동장에 설치된 무대를 발전기로 환히 밝히고 조명등까지 마련했다. '밝아 오는 고향'이었다. 단기를 앞세운 나는 양쪽에 보좌진을 대동하고 등단하여 개막 연설을 했다. "시대는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요구한다. 민족이 있어야 국가가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민족 위에 세워졌다. 민족을 보위하기 위해서다. 민족이 분열되면 피를 흘리게 마련이다. 우리는 오늘 정부를 수립하더라도 내일은 통일로 가야 한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단독정부 수립이 현실로 다가왔다. 많은 유지들이 단정을 반대했지만 국제 정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5·10선거에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선거관리위원장을 맡는다. 그러나 국회에서 이범석 장군이 총리로 지명된다고 했을 때 수락하지 않길 바랐다. 많은 단원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훈련소 부소장으로 있으면서 만난 백범 선생 비서 장준하 교무처장이 떠났을 때 장군도 단정을 불가피하게 본다고 생각했었다.
여하튼 1948년은 내게 격변의 한 해였다. 4월에 수원군단부를 대표하여 이범석 단장으로부터 조직 공작에 지대한 성과를 올렸다는 표창을 받았으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자주독립 국가 수립에 절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감사장을 받았다. 나는 다시 훌훌 털고 봄에 있을 의사시험 준비에 뛰어든다. 다행히 합격되어 이웃집을 마저 사서 병원을 따로 낸다. 그러나 장정 신체검사에 다녀온 단원으로부터 빼지를 뜯겨 짓밟혔다는 보고를 듣고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려 왔다.
올 것이 오고 있었다. 족청이 해산되고 한청(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된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안 맡을 수가 없었다. 한청단장으로서의 1년은 적색분자 색출이었다. 나는 남로당이나 민청에 가입한 인사들에게 전향을 권유했다. 이미 반공 정부가 선 이상 신분을 유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나.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용서를 빌라였다. 보증인이 없는 경우에는 적극 나서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믿고 그러느냐 야단을 치셨지만.
새해 선거가 다가오자 또 뒤숭숭해진다. 단정 세력의 입지는 더 좁아지고 있었다. 평택에서 민세가 출마를 결심하자 그런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갔다. 한청단장으로서의 나는 처신이 매우 어려웠지만 피하기 어려웠다. 개표 결과 범여권이라 해도 20퍼센트에 불과했다. 언뜻 남북협상이 재개되는 것 아닌가 하는데 느닷없이 기습 남침이었다. 몇몇 보도연맹원들이 지서에 간다고 해서 좀 섬뜩했으나 내가 그 연맹 고문 아닌가. 또 경찰 후원회장인데 어쩌랴 싶었다.
다음날 기별이 와 지서에 들리니 본서에서 모시고 오라고 한다는 것 아닌가. 나는 놀랐지만 옷 갈아입으러 집에 오면서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옛날 기록을 가지고 그러는 모양인데 지난날 민전은 없어졌고 또 그간 정부 수립을 위해 할 만큼은 했지 않은가. 더위에 며칠 고생하느니 우선 피하고 보는 게 낫지 않겠는가. 나는 왕진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한참 후에 경찰이 찾아와 인격을 믿었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왕진밖에 모르는 처에게 자꾸 따졌다고 했다.
나는 당선을 거들어준 국회의원을 찾았다. 서울이 불바다가 되었다는 얘기가 들려왔으니 또 주말이면 거의 내려와 있는 집이었다. 마침 토요일이었다. 김 의원은 날 반갑게 맞는다. 몇몇 의원들도 있었다. 하는 말들이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으니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란다. 나는 장기전을 예상하고 이튿날 오산 외가로 내려간다. 50여 칸이 넘는 기와집에 자기 땅만 밟고 다닌다는 지주였다. 제일 서울에 유학 가 있는 아들이 궁금했으나 라지오는 먹통이었다.
마침 중이 기식하고 있었는데 자주 산성(권율)에 올라가 전황을 점쳤다고 해서 나는 자연 그와 자주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가 사서삼경에도 조예가 깊으니 금방 의기투합이었다. 전쟁이 오래간다는 것, 피란은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 등. 수덕사에 있다고 해서 작반하여 내려가게 되었는데 홍성에 있다는 문순공 남당 선생의 양곡사가 생각나서 발길이 가볍기까지 했다. 홍주의병 개항반대 왜양일체 위정척사를 이끌었던 인물 성상이론의 주창자 아니신가.
검문소마다 스님은 쉽게 통과되는데 내게는 곧잘 시비가 붙었다. 서울서 한약방을 하다 내려왔대도 계속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보통사람으론 안 보였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서울에서 박헌영과 같이 서 있는 것을 봤다면서 다그치기도 했다. 무슨 선발대로 의심하는 듯했다. 시간이 자꾸 지체되니 스님과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피차 야속하기만 했다. 귀퉁배기를 맞아 이빨이 빠졌는데도 바지를 벗고 뛰어보라 하니 곧 총을 쏠 것만 같았다.
가만히 생각하니 더는 못 갈 것 같았다. 신분을 밝히면 더 위험할 듯했다. 내려갈수록 심할 것 아닌가. 가족들이 궁금해서 조바심도 났다. 다시 돌아가자.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한청단장이었다. 직접은 안했어도 좌익들 잡으러 다니는데 앞장섰지 않았나. 보도연맹을 강요하지 않았나. 그러나 나의 행실을 아는 사람들은 나를 악질반동으론 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월말 다 된 저녁 아들 이름을 부르며 들어선 내게 식구들이 몰려나와 울고불고 난리 아닌가.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 때 끌려간 사람들은 다 제 무덤을 파고 총살당했다는 것 아닌가. 시체를 파다가 얼마 전 면민추모제를 올렸다고 했다. 모골이 송연했다. 얘들 얘기론 엄마가 너무 울다 실신했다고 하니 죄인 같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와 반갑게 또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다행히 지서(내무서)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쳐다보기조차 싫었다. 다만 주인이 남하한 병원 약방을 인수해서 '인민진료소' 간판을 붙이라 했다. 또 안할 수는 없었다.
두 달 지나니 추석(9·26)이었다. 고향에 들리니 멀리 인천 쪽으로 검은 연기가 가득한 하늘을 비행기가 떼로 몰려다녔다. 신나게 바라보는 마을 사람과 달리 내 마음은 착잡했다. 아버지는 석 달은 피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적치 3개월에 백치 3개월이라 대개 난리는 3개월. 아방궁도 3개월이 탔다지 않는가. 나는 죽을 기를 쓰고 3개월을 숨어 있어야 했다. 친척집 방공호요 처갓집 마루창 밑이었다. 집을 수색할 때는 울타리를 뜯고 산으로 튀기도 했다.
석 달이 지나니 1·4 후퇴였다. 아버님 말씀대로라면 또 난리니 다시 석 달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참질 못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모두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착잡했다. 3월에는 몇몇 유지들이 찾아와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격려도 했다. 그런데 4월이었다. 농지를 돌아보고 오는데 개가 죽기로 짖어댔다. 긴장하고 살펴보니 경찰이었다. 개를 쏴 죽인 경찰이 집에 들이닥쳐 날 못 찾자 가족들을 폭행했다. 나는 또 일단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며칠 후 유지들의 주선으로 수원경찰서에 출두한다. 도피 경위를 자세히 신고하고 나선 며칠 만에 풀려난다. 아내는 6·25 때 묻어두었던 돈을 싸들고 사방을 뛰어다녔다. 그 후에도 두어 번 본서에 불려갔다. 자치대장 시절 장터에서 얻어맞고 있는 후배를 말리려다 상대방을 밀친 일이 있는 날 폭행죄로 고발한 것이다. 형님뻘 되는 분이 내게 출마를 권하기에 형님이 나가보시라 했었다. 후순위로 밀리고 나선 내가 병원에서 허위 진단서를 떼 줬다고 트집을 잡았다.
고향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때로 찾아오는 환자와 친지를 맞는다. 꼭 3년이 되니 휴전이었다. 병원 문을 다시 열었지만 전 같지 않았다. 치안대장 때 가택 수색을 당한 경찰이 가끔 불러서 행패를 부렸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행패를 부린단 말인가.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쓴 죄 밖에 없는데 뒤가 구린 자들이 언제까지 기승을 부릴 것인가. 나는 대처에 나아가 내 뜻을 더 넓게 펼쳐야 한다. 을종 가지고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갑종 의사시험 준비에 들어간다.
다행히 시험은 합격이었다. 고향을 뜰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술렁거리는 지방 민심은 날 놔주지 않았다. 3선 개헌 4사5입 파동을 겪으면서 반 이승만 여론이 파도치더니, 60년 4선을 앞두고 자유당은 서둘러 정부통령 후보를 지명해 놓고 필승전략을 짜기 바빴다. 날보고 기존 청년단체를 새로 통합 개편하는 반공청년단의 대의원을 맡으라는 게 아닌가. 거절하기 어려웠다. 애들도 커 가는데 우선 회색분자라는 딱지부터 떼어야 했다. 8·11 대의원 대회에 참석하니, 말은 정치단체가 아닌 반공교육기관이라는데 누가 그걸 믿겠는가.
면 단장을 맡으니 모두 족청 한청 때 간부요 단원들이었다. 행정기관 지시대로 반 공개투표가 진행되니 단원 중 일부는 이를 따라야 하느냐고 내게 와 울분을 토했다. 처연해서 제대로 대꾸도 못했다. 득표율은 가히 짐작한 대로였다. 중앙청 앞 본부에서 열리는 단합대회에 참석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단장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더더욱 반공전선에 매진하자고 역설했다. 밖에는 4·19였다. 마침 가까운데 사위가 근무하고 있어 평복으로 갈아입고 하향을 서두른다.
왜 이리 난리들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다 권귀(權鬼) 때문이었다. 본래 균형추 권자인데 거기에 귀신이 붙으면 차별권자가 된다. 다른 사람보다 낫게, 다른 사람을 얕게 만드는 데 신바람이 난다. 재물, 환락, 명성 없는 권력은 무슨 맛인가. 환락(絲竹粉黛)을 멀리한 채 청빈했던 문정공은 지금 무슨 생각으로 누워 계신가. 그 많은 저서를 통해 권귀를 내몰고 민족의 존엄성을 지키자시던 문순공은 지금 뭐라시는가. 권혼을 되살려라. 하면 권백을 불어넣어야 한다.
일제하에서도 수재들이 한결같이 고관되기를 희망하는 것을 보고 나는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었다. 상급자가 된다는 것은 곧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을 잘 보살피기 위함인데, 다들 권귀에 홀려 백성을 뜯어먹고 있지 않은가. 이를 분개한 자사들의 꿈도 또 곧 많이 부귀영화 아닌가. 임시정부에서도 파벌싸움이 있었다지 않는가. 나는 갑자기 권백을 불어넣을 평사(平士)란 인물이 떠올랐다. 이 나라에 이 평사들이 지금 회색분자로 질시 받고 있다 해도.
오늘 조선에 고통을 안겨주는 제국주의도 바로 그 최상급 권귀요 아프리카 침략에서 1천만, 신대륙 개발에서 5천만, 1차 대전에서 2천만 또 2차 대전에서 3천만 사상자를 낸 장본인 그 아닌가. 얼마나 무서우며 그와 싸우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렵겠는가. 평화민족이요 문화민족이 지금 피를 흘리고 있는 것도 다 권귀등살 아닌가. 이를 내쫓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평사를 모아야 한다. 서둘러 대처로 나가야 한다. 갑종면허가 이미 길을 트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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