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민 신임 주일본 한국대사가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가해기업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자산매각에 따른 현금화를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해당 발언은 외교부와 조율되지 않은 대사 개인의 견해인 것으로 전해졌다.
9일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윤덕민 대사의 현금화 동결 발언에 대해 "강제징용 관련해 국민적 우려와 관심이 높은 사안으로 정부는 조속한 해법 도출을 위해 다각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며 "해당 발언은 (가해 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가 이뤄지기 전에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8일 윤 대사는 부임 이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현금화가 이뤄지면 한일 관계가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 기업과 일본 기업 (사이에) 수십조원, 수백조원에 달하는 비즈니스 기회가 날아갈 가능성이 있다"며 "현금화 동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은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배상에 대해 1억~1억 5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미쓰비시의 이행이 이뤄지지 않자 원고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는 국내에 있는 미쓰비시의 상표권 2건, 특허권 2건에 대해 강제 매각인 '현금화' 명령을 내려달라고 소를 제기했고 1,2심 모두 승리했다.
이에 미쓰비시중공업은 지난 4월 대법원에 재항고했는데, 일반적인 재판 기간 등을 감안할 때 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오는 9월 중에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대법원이 강제매각을 판결하게 되면 현금화는 이행 수순을 밟게 된다.
윤 대사는 이와 관련 "(피해자들이) 충분히 배상을 받을만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며 "피해자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아주 적은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해 현금화가 피해자들에게도 바람직한 해결 방안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현금화를 통한 배상이 이뤄지면 피해자의 존엄과 명예 회복, 마음의 상처 치유 등의 과정이 생략되기 때문에 "피해 당사자가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며 실제 현금화가 피해자 단체들에게는 "도덕적 차원의 승리"일지 몰라도 "승자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피해자 측을 지원해온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성명을 통해 윤덕민 대사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들은 윤 대사의 발언이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이행을 가로막고 대한민국의 사법 주권을 무시하는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의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일본 정부를 설득하고 대법원 판결의 실현을 위해 외교적인 노력에 앞장서야 할 주일대사의 책무를 망각한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라며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심지어 권리 실현을 가로막는 윤덕민 대사의 발언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어 현금화가 이뤄지면 한국 경제 전반에 경제적 손해를 입을 수 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익을 위해 피 해자 개인의 권리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윤 대사는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사죄와 배상이 도덕적 차원의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피해자들이 수십 년 동안 호소해 온 정당한 요구의 의미를 폄훼하고 지원단체와 피해자의 분열과 국민의 부정적 여론을 조장하려는 불순한 의도마저 내비쳤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윤덕민 대사의 오늘 발언을 보면 피해자의 권리를 내세우면서도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고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일본 정부의 눈치만 보며 굴종 외교에 급급한 윤석열 정부에게 과연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을지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 실현을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다해야 할 책무를 망각한 윤덕민 대사는 즉시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이처럼 윤 대사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외교부는 다소 거리를 두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외교부는 윤 대사의 발언은 주일대사로서 과거사 현안이 빨리 타결돼야 한다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며, 발언의 구체적인 내용이 외교부 본부와 조율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외교부 당국자는 현금화 절차는 시간이 지나다보면 시한이 도래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피해자와 이해당사자 등이 참여하는 논의를 통해 정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한편 이날 외교부에서는 '강제징용 문제 관련 민관협의회' 제3차 회의가 진행됐다. 앞서 피해자측 소송대리인은 양금덕·김성주 할머니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특별 현금화 명령 재항고심에 대해 외교부가 판결을 늦춰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한 것에 반발해 이번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협의회에서는 오는 19일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현금화 명령 결정 가능성 및 그에 따른 대책이 주로 논의됐다. 협의회 이후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미쓰비시중공업의 특허권 매각 명령 관련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심리를 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 결정이 나올 경우 현금화 명령이 완성될 수 있어 이를 염두에 두고 판결 이행과 채권-채무관계 해소 방안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고 밝혔다.
법원의 결정이 열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해결책을 내지 않을 가능성도 있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기각이든 더 심리가 진행되든 정부가 해결 방안을 만들고 피해자측과 의사소통하는 것은 계속 노력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며 "우리는 긴박성을 가지고 있지만 (심리불속행은) 정부 쪽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심리불속행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안을 급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 이후 피해자 측이 완강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외교부는 피해자 측을 직접 찾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국장급 인사보다 더 고위급의 인사가 피해자 측과 접촉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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