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일제강점기 유학자 '후창 김택술', 8월의 정읍 인물 선정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일제강점기 유학자 '후창 김택술', 8월의 정읍 인물 선정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이자 '후창집'을 저술한 유학자 김택술(1884-1954)이 이달의 정읍 역사 인물로 선정됐다. 김택술이 죽은 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은 그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을 건립해 향사했다. ⓒ정읍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이자 '후창집'을 저술한 유학자 후창 김택술(1884-1954)이 이달의 정읍 역사 인물로 선정됐다.

2일 전북 정읍시에 따르면 7세에 수학을 시작해 15세 무렵 사서삼경을 통달한 김택술은 1900년 성리학자 전우(田愚, 1841-1922)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의 대도를 배웠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된 뒤로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에 일제의 하사금을 거절했으며, 큰아들을 일본인의 학교에 입학하게 하라는 일제의 강요를 단호히 뿌리쳤다.

1925년에 동문인 오진영이 스승의 유지를 무시하고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돼 그의 죄를 성토했다.

이 때문에 일제로부터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돼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돼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

1930년경 단발령과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에 불응해 감시 대상이 됐으며, 일제가 주는 배급은 받지 않고 솔잎과 감자로 연명했다.

왜적을 타도할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不忘室)을 건립해 고절(高節)을 수립하고, 후학의 교육에 힘썼다.

김택술이 죽은 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은 그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을 건립해 향사했으며, 이 서원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됐다. 김택술의 저서로는 '후창집(後滄集)'이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송부성

전북취재본부 송부성 기자입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