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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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 것 없는 생애이지만 나름대로는 충실하게 살았어요. 나라 망한 국치를 겪으며 왜놈들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 봉선사의 승려가 되었고, 그곳에서 손병희 선생과 한용운 선생을 만나 나라 구할 방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탑골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젊은 승려들과 독립선언문을 뿌리다가 왜경에 붙잡혀 1년 여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25살에 망명길에 나서서 해방될 때까지 22년간 독립운동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한때 중국혁명이 조국의 해방으로 이어진다는 신념으로 광동꼬뮌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중국 신여성 두군혜(杜君慧)와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의열단장 김원봉 선생, 민족혁명당 김규식 주석, 임시정부 김구 주석 등 우리 독립운동 샛별들과 함께 망명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청장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지만, 3·1혁명의 현장에서 그리고 일제의 차디찬 감옥에서 온몸으로 체득한 민족사적 대의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편하게 살려면 불의를 외면하고 인간답게 살려면 불의와 싸우라'는 것을 신조로 삼았지만, 망국노의 일원으로 이역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흔히 풍찬노숙을 말하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힘겹고 가열 찬 시공이었습니다.
거기다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이념·지역·출신·노선에 따라 점점 파당이 갈리고 밀정이 따라붙고, 더하여 일제의 기세는 나날이 욱일승천하고 있어 민족해방의 희망은 점점 어두워 갔습니다.
그럴수록 유능한 가문의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명문대학 교수직이라는 유혹이 나를 괴롭혔지만, 그때마다 먼저 간 의열단원과 조선의용대 동지들의 선하디선한 눈망울이 떠올라 오히려 잠시라도 사특한 생각에 빠진 자신을 질책하곤 했습니다.
그런 나날 속에 들려온 왜놈의 항복은 모든 고통을 해방하는 듯했습니다. 고국은 손오공이 되어 금방 날아갈 듯한 금수강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흔일곱에 돌아온 고국은 전혀 녹녹치가 않았습니다.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통고했으며, 그것도 상하이에서 두 달 간이나 머물게 해서 개선은커녕 쥐 죽은 듯이 들어와야 했습니다. 미국의 처사가 영 내키지 않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은 '해방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남북이 분단되고 각각 외국의 군정이 들어서고 이어서 반탁과 찬탁으로 갈리고 다시 친일파가 설쳐대니 독립운동가들의 설 땅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해방된 조국의 시대정신은 통일국가의 수립과 민주공화제의 정치, 국민 모두가 잘사는 균등사회를 만드는 일이었지만 어느 것 하나도 밝지가 않았습니다. 몽양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고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군정에 의해 6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되었어요. 조국은 끝내 두 개로 갈라지고, 마침내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집니다. 의열단 정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부산까지 갔는데 이번에는 부역자로 몰려 투옥됩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이승만 정권과 맞섰지만, 또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비록 범속한 인물이지만 시대 가치를 추구하다가 번번이 영어의 몸이 되다 보니 이번이 도합 네 번째가 됩니다.
그 후에도 혁신계 인물로 찍혀 또 투옥되었으니, 일제→미군정→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도합 다섯 차례 투옥되는 진기한 기록의 보유자가 되었습니다.
독립전선에서 산화한 동지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에서 살해당한 민주인사들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전후 다섯 차례의 옥고와 계속되는 빈한·병고는 나이가 들수록 육신을 괴롭혔습니다.
혁신계라서 정부의 보살핌은 저리가라였고, 망명 시절 얻은 세 아들이 자라나 인천 앞바다까지 배를 타고 아버지를 찾아 왔건만 무정한 이승만 정부가 만나지 못하게 쫓아냈습니다. 아내도 임시정부에 많은 도움을 줬었지만 인륜까지도 막고 말더군요.
군사정권의 폭압은 날로 심해지고 어디에도 희망을 보이지 않아 1964년부터 <혁명일기>를 썼지요. 소소한 일상의 기록과 그때그때에 생각을 기록한 것입니다.
말년에 이르러 병고가 심해지고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몇몇 동지와 지인들이 한 푼씩 모아 성동구 구의리에 방 한 칸을 마련해주어서 "비나 피하라" 뜻의 피우정(避雨亭)이라 당호를 짓고, 긴 세월 동가숙서가식의 떠돌이 삶을 접을 수 있었지요. 그나마 1년 밖에는 생의 유예가 없더군요.
저는 <혁명일기>에 어느 날(1964년 12월 23일) 이렇게 썼다오. 지인이 찾아와 나도 독립유공자의 명단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쓴 일기입니다.
항산의 전언에 의하면 나와 소해 선생은 독립유공자 표창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한 소식이다. 표창을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한 일이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독립무공자(獨立無功者)임을 자임하는 사람이므로 표창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금도 불평할 리 없는 것이고 ,또 현 정권이 나를 유공자라고 해서 표창한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일관한 주장은 우리나라가 아직도 독립이 되지 못하고 외국 세력 하에서 전 민족이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논공행상할 때가 아니다. 우리 역사와 범속한 내 지난날을 곱씹자면 끝이 없을 거외다. 망국노로 살 수 없었고, 독재와 포개서 살 수 없었기에 미력한 힘이나마 항일투쟁과 반독재 투쟁의 말석에 서게 되었답니다.
사는 동안 기름진 곳, 안전한 지대에 한눈팔지 않았고, 자신에겐 춘풍(春風)이고 타인에겐 추풍秋風의 이중 잣대를 몰랐으며, 공적(公的) 가치를 위해 사적(私的) 이해를 접고 살았음을 자부합니다. 구지레한 처신을 멀리하고 설움과 아픔을 다독이며 나름의 가치에 충실했다고 자부합니다.
어느 날(1964년 2월 13일)에 썼던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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